레벨 7 교컴지기 2019.02.13 13:42
"차이없이 차별없다"는 말은 돌려 말하면 "적절한 이유가 있다면 차별해도 된다"는 말로도 읽히죠. 이는 마치도 차별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차이를 말할 때는 그 사회의 시스템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되는 계급, 사람을 골라 어떻게 국가 차원에서 보완해줄 것이냐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맞겠죠. 적어도 그것이 배운 사람의 상식입니다. 피터스의 논거는 좀더 뛰어난 사람들에겐 특별한 교육적 제공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해석이 되는데... 이는 분명히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하죠.

무엇을 아는가(이론/지식), 무엇을 할 수 있는가(실제/역량)와 같은 문제가 분리될 수 있을까요? 또 어느 한쪽을 더 가치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주지교과는 수학, 과학 지식의 기둥을 이루는 것이고 실용교과는 실과나 기술/가정 같이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어느 지식도 삶과 유리되어 그 자체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교육은 사회적 진공상태에서 이뤄지는 고결한 무엇인가요, 아니면 인간 삶의 실제를 반영하는 것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완성된 인격'이라는 전제는 얼마나 성립 가능한 명제일까요... 성장이라는 것은 단순히 몸만 자라나는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인지 능력이 확장하고 사회/정서적 역량이 심화되며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을 두루 포함하는 개념이 성장이지요.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인간은 윤리적 책임감을 바탕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겁니다. 이 모든 과정은 연계돼 있고, 순환적이죠. 분석의 완결성이 인간 성장의 질을 말해주지 못합니다. 성장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이죠. 요컨대 사람의 '무엇이' 성장하느냐와 '어떻게' 성장하느냐는 분리될 수 없는 한몸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라는 것은 물론 피터스가 말한 도덕적으로 온당한 방식을 포함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갖는 교육의 과정 상 문제를 다룹니다. 피터스가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듯 하지만...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식은 '내재적 지식 세계로의 입문'입니다. 피터스 교육관이 결국 '보수적', '전통적'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물론 군데군데 지식에 대한 의심을 바탕으로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맥락에서는 수사에 불과하죠.

우리의 학교교육이 많은 부분 수단화돼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교육이라기보다 시험 준비 과정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정도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이뤄지는 관계, 의사소통, 사회화의 과정 속에서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죠. 이런 과정은 일련의 합리성 안에서 작동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역동성, 비예측성, 문화구성적 양태들이 배합돼 있죠. "합리성 이성"을 가진 사람은 올바른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노력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삶의 세계가 모두 이성, 합리, 존중,가치 속에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피터스는 듀이와 비교돼 오곤 했죠. 그런데 내용(피터스)이냐, 과정(듀이)이냐... 지식이냐 흥미냐, 전통이냐 현실이냐, 등등으로 도식화할 수 있을까요? 두 사람 공히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민주적 관계, 삶의 세계와의 연결, 전통에 대한 태도, 교과에 대한 태도 등 강조하는 비중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비중의 차이가 오늘날 교육현상을 바라보는 '관'의 차이로 연결되고 있죠. 피커스의 깊은 분석적 태도는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교육은 현실 세계에서 실제적으로 작동되는 '과정'라는 점을 생각하면 여전히 피터스의 교육관은 전통적이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선비교육'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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