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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5.18] 광주 민중항쟁 전개과정

함영기 | 2005.05.18 08:30 | 조회 6893 | 공감 0 | 비공감 0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시민,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항한 반 독재투쟁을 벌였다. 김영삼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이 국회에서 변칙 통과된 것에 자극을 받은 부산대생이 교내시위에 이어 거리로 나와 부산시청 앞에서 시민들과 합세하여 유신철폐, 독재타도, 야당탄압중지 등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이 무너지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 무력 진압했으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갔다. 마산대생과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경찰과 맞서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까지 합세, 시위가 기층민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20일을 기해 위수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한 결과 이틀간의 마산시위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불씨는 10·26사태를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갈등이 폭발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한 군사독재체제였다. 국민들은 1978년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에게 더 많은 지지표를 던졌고 김경숙의 죽음을 부른 YH여공농성사건, 야당총재 의원직 제명사건, 부마항쟁의 폭발 등 그 저항이 최고조에 달했다. 유신정권의 말기 권력내부의 암투와 맞물려 1979년 10월 26일 18년간의 장기 집권을 누려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사망함으로써 마침내 유신체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실세로 등장한 신군부와 구군부 사이에 군권장악의 권력투쟁이 야기되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이용하여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무력 점령하는 12·12 하극상 군사쿠데타를 성공시켜 반대세력을 강제 전역시키고 12·12 군사반란세력을 규합, 권력을 장악했다.


1979년 10·26사태이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유신연장 음모에 의해 안개정국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0년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함으로써 학원민주화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노동자들도 노조 민주화, 근로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힘의 응집을 위하여 집회와 가두시위를 일제히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5월 14일 광화문, 종로 등에 5만여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지도부는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17일부터 정상수업을 받으면서 시국을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학생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틈을 타서 5·17비상계엄확대조치를 선포함에 따라 그 동안 용솟음쳤던 민주화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진압하고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일부 정치군인들이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학생과 기층민중의 투쟁에 쐐기를 박은 데 이어 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탄압을 감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하였다.


최초 충돌, 전남대 정문 앞
5·17비상계엄 전국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사이에서 최초 광주항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등교를 원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평화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는 메가폰을 통해 두어 차례 해산을 종용한 후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5·18민중항쟁의 최초 충돌이자 과잉진압의 시작이었다. 공수부대는 달아나는 학생들을 잡기 위해 인근 주택을 뒤지기도 하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까지 구타하였다. 이런 공수부대의 포악한 진압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것이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시민의 분노와 저항, 금남로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이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자 계엄군은 오후 3시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무력 진압행위를 만류하는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에게도 무차별 곤봉세례를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진상을 알기 위해 금남로로 몰려들었다. 19일 오전 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서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라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였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맨주먹 또는 몽둥이, 각목을 들고 나와 결사 항전하였다.

항쟁의 확대와 첫 발포
5월 20일 항쟁 3일째,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가 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명이 넘었다. 윤상원 등 사회운동 진영에서 계엄당국의 거짓된 선무방송에 맞서기 위해 만든『투사회보』가 시내도처에 수천매씩 뿌려지면서 항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함으로써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불을 질렀다. 시내 곳곳에서는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다. 이것이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였다. 비슷한 시각에 세무서 앞과 조선대 부근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발포에도 아랑곳 않는 항쟁의 불길은 그 승리의 절정을 향하여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신군부의 잔학한 만행
공수부대에 의해 최초로 희생된 김경철은 공용터미널에 다녀오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들려 무수하게 구타를 당한 채 트럭에 실려 후송되었으나 다음날 사망했다. 김경철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농아였다. 이는 수백명의 사망자, 부상자 중의 한 예에 불과하다. 여성들에 대한 성추행도 무수히 저질러졌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보고 격분한 장노년층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사적 항쟁의지로 발전했다. 신군부의 만행은 전남대 교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계엄군의 만행은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집단 발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계엄군의 퇴각과 양민학살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광주시민들은 어제의 참상을 뒤돌아보고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오후 1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다.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서둘러 무장하기 시작했다. 거센 항쟁에 밀린 계엄군은 퇴각하면서 무차별 발포하여 사상자를 내고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했다.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LMG)의 위력은 계엄군의 퇴각을 서두르게 하였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했다.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27일 충정작전에 투입될 때까지 광주 외곽도로를 차단, 봉쇄하고 인근을 지나는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송암동으로 이동하던 계엄군과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전교사 병력간의 오인사격으로 군인들이 희생되자 그에 대한 화풀이로 원재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중학생에게 총질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무장시민군의 등장
5월 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총격에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자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일부 시위대는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전남의 여러 지역에서 응원 시위부대가 왔다. 광주시위의 진압에 동원되어 텅 빈 지서,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M1소총, 카빈소총, 기관총과 탄약, 화순광업소의 TNT까지도 날라져왔다. 이들 무기들이 시민에게 지급되면서 이른바 \'시민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싸움은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전개되었다. 최신식 무기의 정예부대와 비조직적이고 낡은 무기로 무장한 시민군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혈전을 벌였다.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전개된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시가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군은 자발적인 지도부가 형성되어 무기조작법과 무기관리 등 무기소지자의 통제가 실시되었고 일반차량을 통제하는 등 시민군의 활약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항쟁 5일째 되는 22일,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전기, 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의 지원으로 해결되었다.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자가 잇따랐고 황금동 아가씨들까지 자청하여 제공했다.
치안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한 건도 없었고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도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시민군 지도부에서는 차량통행증, 유류발급증, 상황실출입증 등을 발부하는 한편 외곽지대 자체방위를 맡은 시민군과 유대를 갖고 지원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편성, 출동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5월 22일 거센 시민의 항쟁에 밀려 계엄군이 일시 퇴각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엄청난 사태 앞에서 쌍방 모두 슬기로운 수습이 요망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5·18수습대책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명망가이자 민주인사로 알려진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등 20여명으로 구성되었고 선봉에 선 학생들 중심의『학생수습대책위원회』와 종래의 명망가 중심의『일반수습대책위원회』도 출범하였다. 민주인사나 유지급 중심으로 구성된 수습위에서는 주로 계엄당국과의 대화나 건의, 협의 등을 맡았고 학생중심의 수습위에선 대민 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들은 장례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 의료반 등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또한 계엄사에 요구한 7개항의 요구조건을 홍보하고 300여정의 무기를 회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사의 무성의와 그들의 각본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무기회수문제도 수습대책위원회의 의견 불일치로 결국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5월 18일에 발발한 민중항쟁의 소식은 언론보도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전남일원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일 오후와 19일에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행해진 무자비한 계엄군의 살상행위는 시외버스 승객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또 시위대중 일부가 아시아 자동차공장의 차고에서 차량을 대거 획득 운행하면서 도내 각 지역에 직접 알리고 응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의 항쟁은 전남일원의 호응 속에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5월 21일의 집단발포 소식은 전남도민의 의분을 사기에 충분했고 이에 화순 나주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전남 일원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대는 전남뿐만 아니라 전북 등 전국적인 진출을 시도했으나 고속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한 계엄군에 의해 좌절되었다. 광주는 목마르게 응원군을 기다렸지만 전남 이외의 지역과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시민군의 결사항쟁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여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하였다. 이것은 계엄군의 무력 진압작전의 예고였다.
저녁 7시 계엄군의 침공이 감지되는 가운데 학생지도부에서는 시민군에 참여하고 있던 고등학생이나 여성의 귀가를 종용했다. 시민군들은 비장한 가운데 마지막 선택이 요청되었다.
항복이냐, 죽음이냐, 민중항쟁의 결전에 서서 전열을 가다듬으며 홍보부에서는 계엄군의 침공사실을 가두방송으로 알렸다. 27일 새벽 4시, 도청 주변에서 총성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왔고 도청탈환을 향한 계엄군의 기관총 소리는 밤하늘을 찢는 듯 했다. 구식 무기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지도부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갔다. 진압 끝! 그리고 시민군 생존자는 시체더미 속에서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 체포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신군부의 무력진압
수습위의 건의사항도 묵살되고 대화도 평화적인 해결도 거부당한 채폭동을 일으킨 총기소지의 폭도로 지목된 시민군들은 죽거나 부상당하였고 생존자는 모두 체포되어 군부대로 끌려갔던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원들은 시체더미 위에서 승리가를 합창하며 충정작전을 끝냈다.
도청탈환을 목표로 조직된 특공대는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로 조선대학교 뒷산에서 최종점검을 마친 뒤 시내 주요지점을 향해 잠입, 침투하기 시작했다. 또 시 외곽에서도 시내 중심가를 포위한 채 시민군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전화선은 모두 끊겼고 탱크 지나가는 소리만 금남로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도청표적은 탱크와 중무장 헬기,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시민군 말살 초토화작전이 전개되었다. YMCA, 계림초등학교도 총검과 군화발 아래 유린되었다.작전개시 1시간 30분만에 도청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1980년 5월의 민중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렸다.

5·18민중항쟁의 부활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폭도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주시민의 의로운 항거는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으로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당시 광주는 총검 앞에 유린당했으나 역사는 정의의 편이었다.
폭도는 광주시민이 아니라 헌정을 유린한 반란자 신군부 그들이었다. 의로운 광주, 외로운 광주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5·18민중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민주인사와 학생들의 5월투쟁이 시작되었다. 투쟁의 선두에 선 유가족들의 소복투쟁은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묵시적 배후조종자 미국에 대한 반미의 불길은 광주와 부산에서 미문화원이 불타고 서울의 문화원이 점거 당하여 \"양키고홈\"의 구호가 메아리쳤다.

마침내 6월항쟁으로 이어져 신군부 세력들은 6·29선언으로 항복했고 1988년 5공 청산을 위한 \'5공비리특위\'와 \'광주청문회\'가 열렸으며 \'역사바로세우기\' \'전노일당 사법처리\'가 이루어져 광주항쟁은 명명백백하게 정의로운 민주화운동의 의거로 부활, 승리하였다.

연행 구금과정과 잔학상
5·17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실시와 함께 이루어진 예비검속으로부터 항쟁기간과 그 이후에 연행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연행, 구속된 사람의 숫자는 수천을 헤아린다. 광주의 전지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초토화시킨 토벌작전 그대로였다. 항쟁기간 중 난데없이 들이닥친 계엄군은 집, 사무실, 학원, 도서관, 식당, 시위주변의 길거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총 개머리판과 곤봉 등으로 구타하여 트럭에 실어 교도소나 상무대로 연행하였다. 심지어 팬티바람으로 줄줄이 묶어 폭도취급을 하였다. 전남대나 광주역 부근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전남대 본관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했다가 21일 3공수여단이 교도소로 철수할 때 함께 이송되었다. 또한 상무대로 끌려간 사람들은 상무대 안의 교회와 연병장의 임시막사에 수용되었다. 굶주림과 구타, 비좁은 공간에 몇 백명씩 공동 수감되는 등 지옥을 방불케 하는 그날의 참상을 두고 사람들은 \"나는 그때 인간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
상무대로 붙잡혀온 많은 사람들은 상무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짜여진 각본에 맞춰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한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하는 등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왔다.


이 사건은 5·18민중항쟁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 5월 21일 저녁, 신군부 세력은 TV를 통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였다. 당시 신군부 세력은 \"광주사태는 간첩 김대중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광주지역 불순분자들이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선동하여 일으킨 내란 폭동이며 김대중으로부터 거사자금을 받은 정동년이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학원소요사태를 민중봉기로 유도 발전시켰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동년은 광주상황이 발발하기 전인 5월 17일 저녁에 예비 검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5·18민중항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신군부 세력은 12·12군사반란을 통한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김대중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김대중의 지지 기반이었던 호남인들의 반발을 회피하기 위한 명분으로 사건을 조작하였던 것이다.


상무대의 법정은 5·18민중항쟁에 참여했던 구속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급조하여 지어졌다. 당시 군부는 5·18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정에 총으로 무장한 헌병을 입장시켜 놓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비공개로 421명의 구속자들을 약식재판으로 진행하였다.

각본에 의한 수사, 각본에 의한 형식적 군사재판이었다. 구속자들은 재판시작 전에 민간인 신분으로 합당한 절차가 무시된 군사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항의하였으며 항의표시로 소리 높여 애국가를 불렀다. 또한 구속자들은 재판과정에서 일부 정치군인들의 권력찬탈을 위한 양민학살 만행을 폭로하며 언젠가는 5·18의 진상이 밝혀져 반드시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짜여진 각본에 의해 모두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 실형을 선고하였다.


5·18민중항쟁이 신군부에 의해 무력 진압된 후 전국민은 암울한 침묵의 시대를 보내야만 했다. 5·18학살책임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속자 가족들의 피눈물나는 구명운동과 함께 부모자식을 잃어버린 유족들, 부상자들만이 신군부 정권에 맞서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학생들은 5·18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광주항쟁의 진압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고 미문화원 등을 방화하거나 점거농성을 벌이는 등 반미운동을 전개하였다.또한 일부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민주화를 위해 분신투쟁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져 신군부의 폭압정치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결국 \'6·29선언\'으로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6월항쟁 이전까지는 5·18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조차 경찰의 방해로 치를 수 없었고 일반 국민들의 5·18묘지 참배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5·18특별법 쟁취와 5·18의 진실
1988년 여소야대라는 정국 속에서 국회 광주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광주청문회가 실시되면서 그 동안 왜곡 은폐되었던 5·18민중항쟁의 진실이 전국에 보도됨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정부도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함에 따라 추모제 등 5월 행사가 합법적으로 거행되었다. 1992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5·18학살책임자 처벌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역사에 의한 처벌을 강조함에 따라 학생, 지식인들의 철야농성과 항의성명이 빗발쳤고 학살책임자 고소고발운동이 본격화되었다.문민정부는 잘못된 과거 청산과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전국민적 요구에 밀려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신군부 세력에게 역사와 법과 정의에 의한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였다. 또한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면서 5·18민중항쟁에 대한 제도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법정 영창의 복원
 5·17비상계엄령으로 민주화를 촉구하는 정당한 시위를 폭동으로 몰아 무력 진압한 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4년 3월 상무대 이전을 지시함에 따라 부지매각과 군 시설물의 외곽 이전이 추진되었다. 상무대 지역을 신도심으로 개발하면서 도로 및 아파트 건설로 인해 5·18민중항쟁의 역사 현장인 법정 영창이 방치되자 5월 단체에서 법정 영창의 현장보존과 유지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주변지역 성토로 인해 건물구조의 안전성 및 현장 보존의 어려움이 대두됨에 따라 차선책으로 인근에 공원을 조성, 당시의 모습을 재현키로 결정하였다.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재사용이 가능한 자재들을 활용하여 1999년 4월 현재의 장소에 복원하였다.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 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연합사령관은 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신군부는 5월 20일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연합사에 부대이동을 문의하자 위컴은 미국정부와 협의한 후 동의(agreed)함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한편 5월 22일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또 미행정부는 \"광주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고 일반국민에게 광주민중항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켜 신군부를 두둔했고 무력진압을 합법화시켰다. \'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은 민주주의나 양민보호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체제 옹호적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군사정권이라는 무거운 탄압 속에 오랫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한국의 풀뿌리들은 1980년 광주를 통해 어느 한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 자주 인권 통일이라는 기치를 그들 가슴 내부에 자연스레 구호로 형성시켰으며 \'민주주의\'나 \'인권사상\'이 \'민중\'이라는 계층에 비로소 합류할 수 있는 시민 민주주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학교 교과서를 통해 몇십년 걸려도 깨닫지 못한 진정한 인권에 눈을 뜨게 됐으며,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달았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지난 어두운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광주는 항쟁의 대명사로서만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민중, 인권운동에 강력한 변혁의지를 심어주었다. 5·18광주민중항쟁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자치공동체의 형성 및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책임자가 권력을 장악한 참혹한 상황에서도 \'5·18 진상규명운동\'과정에서 범국민적 저항으로 승화된 움직임은 세계 곳곳에 제2의 광주 공동체정신을 탄생시켰다.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 학살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기념사업, 배상이라는 5대 원칙이 필리핀의 민중혁명과 태국,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대만의 계엄령 해제 및 민주화 추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하였고 동구의 민주화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광주항쟁이 기폭제가 된 한국의 민주화는 제3세계 민 5·18민중항쟁이 돋보였던 것은 항쟁 당사자들이 폭도로 몰리고 구속되는 암울했던 시절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 독재투쟁에 나섰으며, 마침내 제3세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출발시켰다는 점이다.

항쟁의 생생한 현장이 세계언론에 보도되면서 신군부의 부도덕성과 부당함을 여과없이 알렸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진압 주화의 모델로 정립되고 있으며 이른바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출국으로써 입지를 굳히고 있다. 

 

출처; http://www.518.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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