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_이론과 실천
토론을 대신하여 - 교육과정 재개념주의자들 이야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둘러싸고 100년 동안 전개되어 왔던 교육과정 논쟁 중에서 우리가 그동안 가장 많이 접해 왔던 것은 타일러-브루너로 대별되는 양대축이다. 이른바 목표를 중시했던 타일러, 내용을 중시했던 브루너는 당시 미국 사회의 환경을 반영하며 이후 수십년간 지구촌의 교육과정 정책과 실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기계적으로 구분하긴 좀 그렇지만 오늘날 효율성에 기반한 과학적 관리와 운영, 행동적 목표, 양화된 측정과 평가 등등은 모두 타일러의 영향이다.
브루너의 경우, 지식의 구조, 발견학습, 나선형 교육과정 등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는 스푸트닉 쇼크 때 미국정부의 선택을 받게 되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알려진 브루너는 젊은 시절 그의 행적과 이론이다. 장년 브루너는 내러티브와 서사를 중시하면서 이른바 "문화 구성주의"를 이야기하게 된다.
그 이후에 나온 재개념주의자들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저 진보적 교육을 공부하는 이들의 교재정도로 쓰였던 마이클 애플과 윌리엄 파이너, 그리고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했던 질적연구자 아이즈너가 있다. 아이즈너는 교육비평과 질적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최근에 많이 알려졌다.
타일러와 브루너의 견고한 독점을 깨고자 나온 파이너와 애플은 지금 공부해볼만한 가치가 차고 넘친다. 전통을 혁파하는 방법으로 파이너의 경우 개인의 실존과 성찰에 주목한다. 애플은 알려진대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에 주목한다. 그냥 이분법적으로 볼 것은 아니고 이 둘은 만만치 않은 무게감과 상호보완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중에 맥도널드에 의해 다소간 절충되기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재개념적 교육과정 논쟁이 왜 우리나라에서는 활성화되지 못했으며 아직도 50년이 넘은 타일러류, 혹은 그 변종들이 현장을 장악하고 있을까? 답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싸게 먹힌다는 것이다. 과학화된 수업, 효율적 경영논리, 가시적 목표, 계량화된 평가... 우리 교육현장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요소들이다. 효율에 집착하면 결국 경쟁에 의존하게 되고, 선발적 교육관을 중시하게 되고... 적은 투입으로 고효율을 노리는 경제논리가 판을 치게 된다.
[보충] 브루너가 우즈홀에 모였던 당시의 미국 풍경은 소련의 스푸트닉 발사 이후 정부 권력자들이 최고로 열을 받았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당시 타일러, 심지어 듀이 등이 싸잡아서 불신을 받게 된다. 결국 교육학자들을 신뢰할 수 없었던 미국 정부는 심리학자였던 브루너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과학자들로 이뤄진 우즈홀 회의를 기획하게 된다. 이를 두고 슈왑은 "미국의 교육과정은 죽었다"라고 흥분한다. 어떤 학문이 죽을 때 나타나는 징조 중의 하나가 다른 영역의 학자들이 넘보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교육과정을 재개념화하고자 했던 일단의 학자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나온다. 파이너, 애플, 아이즈너, 보울스, 긴티스, 라이머, 일리치, 프레이리, 맥도널도, 지루...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살아남은 표준화 방식과 계량적 평가, 즉 타일러류는 과거에는 테일러리즘(기술공학적 합리주의)과 만나서 성황을 이루었고 지금은 신자유주의와 만나서 끝없는 부활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혁신학교에서 수업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고민과 혼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교육과정의 제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검토없이 한 가지(예를 들면 '배움의 공동체'와 같은) 수업방식을 적용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사토마나부 교수의 철학을 규정했던 것은 네 사람이다. 듀이(사회적 상호작용), 쇤(반성적 실천), 비고츠키(협력적 배움), 아이즈너(표현적 활동)가 그의 철학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그의 3가지 시리즈 저서에서 대부분 드러난다.
그런데 배움의 공동체를 적용했던 학교에서는 그의 철학적 배경이나 우리 환경에 접목하기 위한 전제조건 등에 대한 검토보다는 사토마나부 교수의 핵심적 수업방법이랄 수 있는 수업공개 및 평가회, 아동의 움직임에 대한 미시 관찰, 점프, 교실좌석 배치 등 기법적인 것을 중심에 두었다. 물론 이것의 당위성으로 작용된 경영학적 분석틀인 SWOT 분석의 결과로 '배움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다시 정리하면, 다소간 급하게 진보교육감의 아이콘처럼 혁신학교가 추진되었고, 마땅한 수업방법 대안을 찾지 못하던 혁신학교의 주체들은 배움의 공동체 모델을 앞다투어 도입하게 된다. 사례 축적 기간이 짧았던 탓에 적용된지 6개월도 안된 상태에서 일부 학교의 사례가 모범 사례처럼 회자되는 기현상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이제 서서히 그것에 관한 반성적 숙고들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필연적 과정이다. 그 어떤 것도 획일적 적용으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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