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후 경기 시흥시 과림동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이하 조리과학고) 1층 양식실습실.

흰색 조리복과 30㎝가량의 흰색 조리모를 쓴 3학년 1반 남녀학생 41명이 뜨거운 불 위에서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이날의 실습 요리는 ‘닭 버터구이와 꼬치냄비’로 일식조리 기능사 자격증시험의 주요 과목. 현재 서울 프레지던트호텔 일식조리과장인 이충신 강사가 학생 한사람 한사람에게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고 있었다.

“선생님,제가 만든 닭고기는 왜 이렇게 살점이 부서지고 모양이 흐트러지는 거죠?” “잔 칼집을 너무 내서 그래요. 칼집을 그렇게 많이 내면 모양이 흐트러져서 보기 좋지 않아요. 씹을 때 질감도 별루 안 좋지요.”

이 강사가 학생에게 설명을 끝내기가 무섭게 바로 옆 조리실습대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여학생들이 찾는다.“선생님, 꼬치냄비에 들어가는 유부 주머니 모양이 이상해요. 오셔셔 좀 봐주세요.”

그래도 평소 3시간쯤 걸리는 실습 시간이 이날은 다른날 보다 30분이나 일찍 끝났다. 학생들의 실력이 그만큼 늘었다는 얘기다. 마침 조리과학고로 교생실습을 나와 있던 경희대 조리과학과 김기쁨(23·여)씨는 “고3 학생들 실력이라는게 믿어지지 않는다.지금 당장 현장에 나가도 손색없이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고3학생들은 1주일에 13시간씩 일식,중식,서양고급요리,실험조리등의 조리 실습을 한다. 2학년은 주당 9시간, 1학년은 주당 7시간의 조리실습시간이 배정돼 있다. 실습에 나와 강의를 하는 사람들은 힐튼호텔,인터콘티넨탈 호텔등 국내 유수의 호텔 조리장 30여명으로 일주일에 1회씩 학교로 출강할 뿐 아니라 학생들을 호텔로 불러 현장 실습을 지도해준다. 물론 일반 과목 담당 교사와 더불어 현장에서 15년 이상의 경험을 지닌 조리과 전공 교과 교사들도 6명이나 있다.

조리과학고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히 전공 교과에 모든 수업과 교육이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다른 특성화고등학교의 경우 전공 과목이 3∼4개로 분과돼 있는 경우가 많지만 조리과학고에는 오로지 ‘조리’ 전공 하나만 있다.

학생선발과정에서도 조리 분야에 확고한 소신이 있는 학생이 아니면 입학 자체가 힘들게 돼 있다.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5대 과목의 중학교 성적 점수가 50%,직접 면접과 더불어 이른바 간접면접이라 불리는 목적의식 평가와 적성검사가 40%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내신 성적도 모두 상위 30%이상일 정도로 우수한 것은 물론이다.

다른 특성화고교들과 달리 일반 교과 과정도 철저히 전공 교과에 맞춰 운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레시피(요리법)가 minced onion(잘게 다진 양파),cloves garlic(다진 마늘)등 영어로 이뤄져있는 실정을 감안, 이 학교에서는 ‘조리실무영어’ 수업을 개설했다. 학생들은 2학년때부터 매주 2시간씩 호텔이나 외식업체 등 현장에서 사용되는 영어 어휘등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이 수업을 듣는다.그래서 졸업할 때쯤에는 아무리 복잡한 요리라도 영어로 된 요리법을 보고 직접 조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인당 최소 300개 이상의 요리법을 영어로 작성할 수 있게 된다게 학교측의 설명이다. 최근에는 일식,중식 요리의 비중이 커지면서 일본어 12단위,한문 12단위 등 다른 외국어 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학교는 조리학도의 선서를 매 실습시간마다 복창시키는 등 학생들에게 조리인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실어주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고 있다. 해마다 입학전에 3박 4일 과정의 ‘조리정신 집체훈련’을 다녀오는 것도 모두 이런 목적에서다. 올해는 전교생 529명이 2월 19일부터 설악산에 있는 청소년 수련의 집에서 이 훈련을 받았다.

수학여행도 일반 학교와 큰 차이가 있다.이 학교의 수행여행지는 전북 전주.학생들 3∼4명이 한조가 되어 전주 전통음식 업체 60여곳에 배치돼 일일 실습을 하는 것이 수학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은 그 곳에서 각 식당마다 조금씩 다른 전주 비빔밥 조리법을 실제로 배운 뒤 학교로 돌아와 자신이 일했던 곳의 조리법과 다른 친구들이 일했던 업체의 것을 비교 평가하는 시간을 갖는다.

열심히 교과과정을 쫓아가다보면 일상생활마저 변하게 된다는게 학생들의 얘기다. 강원도 홍천에서 ‘유학’을 와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는 박유리(16·2학년)양은 “다른 친구들은 동대문이나 남대문 쇼핑몰을 찾아다니듯이 우리는 수산시장이나 주방기구점등을 찾아다닌다”면서 “어디에서 음식박람회가 열린다고 하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간다”며 활짝 웃었다.

안양과학대에서 4년동안 교수로 강의를 하다 1999년부터 이 학교 전공 교사로 일하고 있는 허훈 조리부장은 “이런 학생들의 열정이 바로 조리과학고의 밝은 미래를 의미하는 것 아니겠냐”면서 “앞으로도 학생들이 조리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존경받으며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학교에는 박양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30%정도를 차지한다. 서울에서 온 학생들이 30%이고 시흥 등 경기지역 출신이 40%정도다. 대부분 학생들이 통학을 하고 현재는 전체 학생 중 97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기숙사가 협소해 나머지는 학교 주변에서 하숙이나 자취를 하고 있다. 학교측은 양식,한식 전문 조리실과 제화제빵실 등이 들어가는 620평 규모의 종합실습동과 기숙사를 올해말 완공을 목표로 짓고 있다.

국민일보 시흥=김나래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