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으로 인문학 위기 뚫는다\"(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영문학도라면 너나할 것 없이 \'벽돌\'이라 불리는 \'노튼 앤솔로지\'(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를 옆구리에 끼고 자랑스럽게 캠퍼스를 활보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미 문학의 각종 고전을 집약해 담은 이 책은 영문학도들에게는 \'교양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캠퍼스에서 두툼한 고전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누구나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라는 냉소적 평가와 함께 \'고전\'으로 상징되는 인문학이 \'위기\' 혹은 \'죽음\'에 내몰렸다는 얘기까지, 악조건에 휩싸인 인문학의 위상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넘쳐 흐른다. \"인문학의 위기에 신경쓰는 사람들은 인문학자밖에 없다\"는 말도 있다.

과연 인문학 자체가 정말 위기에 처한 것일까?출판평론가 표정훈 씨는 \"인문학의 위기와 대학 인문학 전공 과정의 위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제도권의 인문학 전공자가 줄었다고 해서 인문학 자체가 위기에 있다고 진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덧붙인다.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계\'에 문제가 있더라도 여전히 고전을 비롯한 인문서는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수사는 일정 부분 과장된 혐의가 짙다.

고전은 지속적으로 번역되면서 저변을 넓혀가고 있고, 새로운 기획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서려는 움직임도 끊이지 않는다. 고전이 \'고리타분하기는 해도 읽어두면 좋은 책\'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중고교생의 논술 열풍도 여기에 한 몫 한다. 지난해 12월 서울대 출판부가 펴낸 \'권장도서 해제집\'이 선풍적인 관심을 모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 \'읽어야할 책\'을 넘어 \'읽히는 책\'으로광속으로 정보가 오가는 첨단 지식정보 시대에 \'인문적 교양\'을 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고전(古典)이라는 것이 강한 생명력으로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인류의 지(知)의 유산을 읽는 것임과 동시에 미래를 헤쳐나갈 \'지혜의 생명력\'을 체득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는 \"고전은 시대를 뚫고 나가는 사유가 담긴 책으로, 자기 자신만의 사유를 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도구\"라고 단언한다.

창의력과 상상력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요즘같은 시대에 인류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고전은 \'과거의 책\'이 아닌 \'미래의 책\'의 가치도 지닌다. 한마디로 고전은 인류 정신의 \'인프라\'이자 \'사회간접자본\'이고 \'기초체력\'이다.

그러나 시간을 내서 고전을 읽는 것이 바쁜 현대인들에게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한국의 출판계에는 인문서적의 새로운 기획과 번역의 질적 제고 등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부고(訃告)를 무색케 하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읽어야할 책\'이었던 고전을 \'읽히는 책\'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그 특성상 단시간에 가시적 효과를 내기 힘들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떠들썩한 \'위기\'의 수사학에도 동요하지 않는 꿋꿋한 고전 간행의 세세한 결들을 살필 수 있다.

최근 우리 출판계의 인문학 고전 출판 움직임을 들여다보면 \'위기\'보다는 오히려 \'부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뚝심 있으면서도 참신한 기획이 곳곳에 엿보인다.

▲ 절대사상, 위대한 책, 그리고 다시 쓰기인문학이 놓인 \'사각지대\'의 두터운 장벽을 뚫으려는 노력은 쉼없이 계속된다.

출판계 한쪽에는 사재기 등 얄팍한 베스트셀러의 상술이 판을 치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빈곤한 주머니 사정을 뛰어넘어 \'지혜와 교양의 상징\'인 고전을 번역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소수 식자 층의 전유물이었던 철학의 고전들이 일반인, 나아가 어린이들로까지 독자층을 확대하는 등 \'고전의 대중화\'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단순한 번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읽혀서 정신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고전을 내놓을 것인지에 대해 번역자(저자)와 편집자가 고군분투한 흔적이 담긴 시리즈들이 제법 된다.

펴내는 책들을 감히 \'절대 사상\'이라 치켜세우는가 하면(살림 \'e-시대의 절대사상\'), 마르크스와 칸트, 아도르노 등 거장의 원전을 국내 학자가 \'리라이팅\'(rewriting.다시 쓰기) 하기도 한다.(그린비 \'리라이팅 클래식\')
그뿐인가. \'반짝\'하고 끝나는 무슨무슨 \'셀러\'가 출판계를 휩쓰는 와중에도 \"우리 책은 많이는 안 팔려도 여전히 \'그레이트\'(위대하다)하다\"고 당당히 외치기도 한다.(한길 \'그레이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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