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다산 정약용은 아내 홍씨에게서 아들 여섯과 딸 셋을 두었으나 제대로 자란 이는 아들로는 학가(學稼.1783-1859)와 학포(學圃) 둘 뿐이었고, 딸로는 강진 유배지 제자인 윤창모에게 출가한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아들 넷과 딸 둘은 천연두나 홍역으로 잃었다. 팔삭둥이 큰딸은 생후 나흘 만에 죽어 이름도 짓지 못했고, 셋째 아들 구장은 세 살에 마마로 죽었다. 무척이나 아낀 둘째딸 효순(孝順)도 세 살에 마마로 황천길을 택했으며, 넷째 아들 삼동(三童)이 역시 마마로 잃었다.
막내아들 또한 마마로 죽었다는 소식을 1802년 겨울, 유배지 강진에서 접한 다산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그 아이 아비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다만 네 어머니 때문에 슬퍼한다\"는 말로 그의 슬픔을 삭이면서 그 때문에 충격이 더욱 컸을 어머니를 위로하라고 당부한다.
그 또한 분명 이런 슬픔에 가슴 아파했고, 그랬기에 자상한 아버지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퇴계 이황과 함께 만나서 가르침을 받고 싶은 역대 성현 두 명 중 한 명으로 다산을 거론하는 금장태(琴章泰.62)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또한 자상하고 인자함이라는 맥락에서 \'아버지 다산\'을 평가한다.
하지만 금 교수의 이런 견해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다.
강진 유배생활 18년 동안 다산은 두 아들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극성 부모의 전형을 방불한다. 매양 공부하라, 사촌과 잘 지내라, 왜 공부에 진전이 없느냐 하는 식의 불호령뿐이다.
위치를 바꿔 두 아들이 되어 본다면, 아마도 그 아들들은 아버지에게서 단 하루라도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 그의 큰아들 학가(학연으로 나중에 개명)만 해도 아버지의 충고에는 아랑곳 없는 듯한 삶을 살았다.
금 교수는 다산이 욕심을 누르고 이성이 지배하게 해야 함을 역설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글쎄, 다산이 정말 그러했을까? 누구보다 욕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던 이가 다산이었다.
흔히 다산을 두고 백성을 사랑한 목민관이라 하고, 그러한 증거로 백성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랑론을 펼친 목민심서 등의 저서를 들기도 한다. 금 교수 또한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이끌리오)이라는 근간 다산 평전에서 이런 견해를 편다.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대목이 있다. 이 지구상 어느 사상가, 어느 정치가 치고 백성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이는 거의 없다. 동아시아 사상사에서는 철저한 법가적 통치를 주창한 상앙 정도가 예외라고나 할까? 나머지는 모조리 늘상 백성을 앞세워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임을 끊임없이 역설했다.
예수회 재단이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 캠퍼스를 구성하는 건물채 중 하나로 \'다산관\'이란 곳이 있다. 여기서 다산은 정약용이다. 다산이 한 때 천주교 신자였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또 하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나중에 천주교를 배교했다는 점이다. 그가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 천주교 재단 학교의 묘한 건물 이름이다.
다산의 일생에서 정조의 만남과 교류가 중대한 분기를 이루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금 교수는 이번 평전에서 서학에 대한 다산의 이중적 태도는 정조에 대한 충성과 사상적 친밀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젊어서 서학에 뜻을 둔 다산은 정조를 만나면서 서학에 거리를 두었고 급기야 과거의 서학에 대한 경도를 잘못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한국 종교사, 특히 유학사 연구에 주력하는 금 교수의 이번 다산 평전은 곳곳에서 다산을 성현(聖賢)화하고자 한 고심을 엿보이고 있다. 이것이 이 평전이 갖는 장점이자 결점이다.
그럼에도 현장답사와 풍부한 시문을 적재적소에 가미하면서 그의 일생을 다방면에서 정리하고 있는 평전이 노작에 속한다는 점에서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464쪽. 2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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