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컴로고초기화면으로 header_kyocom
교컴메뉴
교컴소개 이용안내 소셜교컴 나눔마당 배움마당 자료마당 교과마당 초등마당 특수마당 글로벌교컴 온라인프로젝트학습 교컴 UCC
회원 로그인
정보기억 정보기억에 체크할 경우 다음접속시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개인PC가 아닐 경우 타인이 로그인할 수 있습니다.
PC를 여러사람이 사용하는 공공장소에서는 체크하지 마세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로그인하시면 별도의 로그인 절차없이 회원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교컴 키우기 자발적 후원


:::: 교컴가족 로그인(0)

  • 주간 검색어
  • 현재 검색어
  1. 1 89
  2. 아동과 교육
  3. 진로
  4. 시험감독
  5. 자유 역리
  6. 생활기록부 예시문 33
  7. 듀이 아동과 교육
  8. 존듀이
  9. 자리배치 1
  10. 세특 2
기간 : ~
  1. 1
  2. 피터스와 듀이
기간 : 현재기준

교컴 포토갤러리

사회/역사/지리

<b>[공동수업] 4.19혁명과 좌절된 민주주의

함영기 | 2004.04.19 07:42 | 조회 7639 | 공감 0 | 비공감 0

영상으로 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록

 

관련사이트

4.19 민주 혁명회| 4.19혁명기념도서관| 4.19혁명의 발발| 국립4.19민주묘지

 

<개요>

 이승만 대통령,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고 49년에는 민족의 큰 별인 김구선생이 안두희에게 피격 당해 사망. 이 시절 우리나라는 6.25동란이 일어났으며 53년 7월 27일 휴전했는데 이 전쟁으로 한국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큰 피해가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받은 정신적인 피해는 물질적인 것보다 더 컸다. 

한 민족의 염원인 완전한 민족 통일의 길이, 6.25사변으로 인해 한 걸음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1953년 7월 휴전 협정후, 전쟁의 피해 복구에 큰 성과를 보았으나, 정치적으로는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 세력을 막고 포로를 석방하는 등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펴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부산에서의 제 2대 대통령 선거 때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를 탄압하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도록 하는 <발췌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경북고 학생들은 일요일 임에도 불구하고 야당 선거 유세 참석을 막기 위한 일요일 등교 조치에 대해 시위하게 된다.

이 날 1,800여명의 학생들이 학원의 정치 도구화 반대 등의 구호를 들고 시위를 벌였으며, 전국적으로 시위가 번져나가는 계기가 된다. 직접 선거를 실시하여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1960년 3월의 대통령과부통령 선거에서 야당 대통령 입후보자인 조병옥이 병으로 죽음으로써 쉽게 당선 되었으나,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을 당선시키려고 엄청난 부정을 저질러 선거를 강행함에 따라, 이에 국민들이 크게 분노하여 4.19의거가 일어나고, 마침내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정권의 존립 기반이나 정당성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수호를 위한 반공주의지만 그것도 정권의 유지를 위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옹호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가지 사실에서 발견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인 법치주의를 스스로 뭉개버린 사건에 있다. 그것은 국회내에 야당 의원의 숫자가 많아지자 일사부재리(한 번 논의된 안건은 같은 회기 내에 두 번 논의되지 않는다는)의 원칙을 어기면서 까지 억지로 통과시킨 1952년의 대통령 직선제로의 발췌 개헌 사건과, 대통령의 중임 제한 조건(1차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었다)을 초대 대통령에게만 적용을 피하는 내용의 사사오입 개헌 사건(203명 찬성에 135명 찬성 - 개헌은 국회의원 2/3이상의 찬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정족수는 136명- 으로 표결 뒤 부결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곧, 2/3는 135.333 이고 사람은 소숫점 이하로 나눌 수 없으므로 반올림 하여 정족수는 136이 아니라 135이므로 가결이라고 발표한 사건이다)이다. 

이런 이승만 정권에게서 민심은 등을 돌리고 만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선거가 있는 날 드디어 이것은 학생들의 마산시위로 폭발하게 된다. 4월 11일 마산 시위 당시 행방 불면 되었던 중학생 김 주열 군의 시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20cm정도의 대무장 폭도용 최루탄이 발견 되면서 이에 분노한 시민 2만여 명이 모여서 규탄 시위를 한다. 이러한 마산 시위는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4월 19일 10만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으며, 경찰은 시민에게 발포해 6,000여명의 사상자가 나게되고 정부는 5시를 기해 계엄을 선포한다. 4월 25일 전국 대학 교수들의 성명 발표와 시위로 침체 되었던 시위 열기가 다시 불붙으며 4월 26일 시위 군중들이 아침 부터 광화문에 모여 이승만의 사퇴를 요구하였으며 11시경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퇴가 발표 되면서 이승만정권은 막을내리게된다.

제2공화국이 존재한 때는 불과 40년 전이다. 그런데 그 시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흔히들 당시는 사회가 혼란스러웠고 정부는 무능, 부패했다는 어렴풋한 인생만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세력이 또 그를 뒤이은 같은 성격의 정권이 한 세대 동안 끈질기게 그 같은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세계경제가 침체하고 미국의 무상경제원조가 삭감되자 경제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경기가 하강하고 성장률이 크게 둔화된 반면 물가는 오히려 크게 올랐다. 소비재산업의 가동은 거의 중단되었으며, GNP 성장률도 1957년 8.7퍼센트에서 1960년 2.1퍼센트로 떨어졌다. 그 결과 중소기업이 몰락하고 실업자가 늘어나는 등 민중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이 점차 활발해졌다. 

노동운동은 대한노동초연맹이 정권의 도구로서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위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노동쟁의는 주로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노조지부 분회의 민주적 개편 등을 내걸고 일어났다. 학생운동은 교육 여건 개선과 학원 민주화 요구로 집중되었다. 학생들은 교육시설의 확장, 해임된 진보적 교원의 복직과 진보적 학술활동의 자유, 학원에 대한 경찰의 간섭 배제 등을 요구하였다.1957년 서울대 법대생들은 이승만의 양자를 부정입학시킨데 대해 동맹휴학으로 항의하가도 하였다.

민중운동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제 4대 정·부통령선거가 다가왔다. 1960년 2월 28일 재야인사를 중심으로 하여 공명선거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같은날 대구지역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 획책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3월 15일 40퍼센트 사전투표와 3인조 5인조 투표, 개표 조작 등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하였다.(3·15부정선거)

이날 마산에서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부정선거 반대운동은 곧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으며 언론계, 법조계, 학계 등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3월 하순 이후 시위는 잠시 주춤하였으나, 4월 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의 주검이 발견되면서 다시 확대되었다. 이후 부정선거 규탄투쟁은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4월 18일 서울에서는 시위를 벌이던 고려대생들을 정치폭력배들이 습격,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인 4월 19일, 서울시내 10여 개 대학생들은 이에 항의하여 대규모 시위에 돌입하였다. 시내 중심가에 운집한 2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기성 정치인들의 각성과 재선거를 촉구하면서 경무대로 향하였다. 당황한 경찰은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하였고 그 결과 100여명이 사망하였다.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군부는 이승만 정권을 적극 지지하지 않았다.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서울지역의 군사지휘권을 잠정적으로 이양받아 비상계엄을 강화하였으나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다. 반공정권 유지에 이해관계가 걸려있던 미국은 4월 19일에 민주적 재선거 실시. 

언론·집회의 자유 보장등 8개항의 수습방안을 정부에 제시한 데 이어 다음날에는 민주화 촉구성명을 발표하여 이승만정권의 붕괴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계엄선포 직후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시위는 4월 22일 재야인사들의 이승만 퇴진 요구와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시위를 계기로 다시 확신되었다. 4월26일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이승만은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의 사퇴, 3·15선거 무효 등을 발표하였으나 민중의 불만을 무마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승만은 다음날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축출된 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과도정부는 내각책임제 개헌·총선거 실시 등 4월민중항쟁에서 표출된 민주화 요구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으나 부정선거 관련자의 처벌, 부정축재가 재산 환수 요구 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60년 7월 29일 총선거를 통해 장면을 국무총리로 한 민주당정권이 출범하였다. 민주당정권은 당면과제로 '유엔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부정선거 원흉과 발포책임자 처벌, 경제건설의 촉진과 미국으로부터 최대의 원조 획득'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정권은 초기에 3·15부정선거 책임자와 발포책임자를 검거하였다가 곧 대다수를 석방하였다. 

이처럼 민주당정권은 이승만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여기에 경제상황의 악화도 민주당정권을 끊임없이 위협하였다. 당시 한국경제는 사실상 파탄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정권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국토개발계획과 실업자대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자금이 미국 원조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올라 민중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

4월민중항쟁 이후 부분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노동운동·농민운동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화와 신규노조의 결성,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투쟁으로 전개되었다. 4월민중항쟁이후 전국에서 민주노조가 결성되면서 대한노동총연맹은 영향력을 상실하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노도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농민운동은 수리조합과 지방행정기관의 민주화 요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전쟁 기간중의 양민학살에 항의하는 운동도 일어났다. 1960년 5월11일 경북 거창에서 한국전쟁 당시 면장이었던 사람이 주민들에게 생매장당한 사건을 계기로 양민학살 사건들이 속속 폭로되면서, 경기북유족회를 비롯한 피학살자유족회가 각지에서 결성되었다.

학생들은 4월민중항쟁 직후 학원민주화운동·신생활운동·국민계몽운동 등 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혁신세력은 총선거에서 참패하고 신생활운동 등이 민주당정권의 비협조로 쇠퇴하자, 곧 통일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서울대에서 민족통일연맹을 결성한 것을 필두로 하여 각 대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조직들을 결성하였다.

민주당정권의 굴욕외교와 진보세력 탄압에 대한 반대투쟁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민주당정권은 1961년 2월 8일 미국과 '한미 경제 및 기술원조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원조사절단 활동에 대한 협조와 편의제공이 약속되고, 그 구성원에게 경제적 정치적 외교특권이 부여되었으며, 원조사업과 관련하여 도입되는 물품의 관세가 면제되었다. 이 협정은 즉시 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월 13일 17개 혁신계 정당·사호단체는 '2·8한미경제협정반대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이 협정을 "종주국과 식민지간에 있었던 전근대적 협정"이라고 비판하면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 협정은 국회의 비준을 받지 못하였다.

민주당은 또한 진보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 법안이 발표되자 야당인 신민당, 신풍회화 혁신정당, 언론·법조계 등에서 일제히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2대악법 반대투쟁"은 2월18일 대구에서 1만여 군중이 운집하여 횃불시위를 벌인 것을 시발로 하여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22일에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반민주악법반대 공동투쟁위원회' 주최로 3만여 명의 시민이 참가한 '악법반대시민성토대강연회'가 열렸다. 강연회 이후 벌어진 횃불시위에서는 "양키 고홈", "통일을 반대하는 장정권은 물러가라"당의 반미·반정부 구호도 등장하였다.

1961년 5월16일 새벽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부쿠데타는 일차적으로 부패·무능한 민주당정권하에서 통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이 성장하는데 대하 군부가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한국 등 제3세계에서 보다 안정되고 강력한 정권을 창출하여 세계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정책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59년 쿠바혁명과 베트남의 반정부 무장투쟁, 그리고 1960년 한국의 4월민중항쟁 등에 의하여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영향력은 전반적으로 약화되었다. 이에 미국은 대소 강경정책과 제3세게에 대한 강력한 반혁명전략을 채택하여 세력을 만회하려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된 것이 제3세계 국가의 군부였다. 이들 지역에서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미국의 이익을 지켜주는 대가로 미국의 지원을 얻었다.

한국의 군부는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힘입어 가장 효울적으로 조직된 사회 집단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주한미군을 통해 미국의 통제를 받고 있었고, 미국에서 군사연수 등을 받으면서 친미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5·16군부쿠데타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를 지지하기까지 하였다.

4·19로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후 한국 언론은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정부의 언론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급격히 사라졌고, 언론 스스로도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언론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자유를 누려끨 그러나 갑자기 어놀遁자유가 주어지자 우후죽순처럼 정기간행물이 쏟아져 나와, 일간지나 주간지가 4·19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날 정도가 되면서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들로 인한 폐단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이렇듯 제 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언론자유가 급격히 신장됐지만, 언론자유는 점차로 제약되는 경향을 보였다. 모처럼 보장된 언론자유를 지키고 언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율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5·16쿠데타가 터졌다. 5·16이후 언론자유는 말살되고, 언론은 정권의 통제와 특혜 속에 제 몫을 하지 못하여 기업적 성장에만 집착하게 됐다.

5·16 군부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은 우선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입법·사법·행정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박정희를 의장으로 추대하였다.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하여 경제개발에 필요한 지원을 얻는 대신 한일회담추진과 베트남 파병을 약속하였다.

군부정권은 먼저 '반혁명의 색출·제거, 안정적인 권력 창출'을 위한 기구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였다. 이를 핵심으로 한 군부정권은 민정이양 이후의 권력장악을 위하여 민주공화당의 결성을 추진하는 한편 '정치활동정화법'등으로 기존 정치인들의 활동을 철저하게 규제하였다. 모든 정당·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수많은신문·잡지도 폐간시켰으며, 자신들의 집권에 편리하도록 헌법을 개정할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군부정권은 이러한 작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당하기 위하여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파친코사건등 이른바 '4대의혹사건'을 일으켰다. 중앙정보부의 공작 결과 민주공화당이 새로 결성되고 1963년 10월 15일에실시된 총선거에서 박정희는 야당 후보인 윤보선을 불과 15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박대통령의 집권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출 처 :http://www.419revolution.org/

 

 

좋아요! 싫어요!
twitter facebook me2day
338개(1/17페이지) rss
사회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38 [사회] 4.3관련 콘텐츠를 만들어 볼까하는데 조언 부탁드립니다 ^^ [2] 홍윤지 6080 2006.01.04 17:21
337 [공통자료] [와이드맵] 독도 등고선 학습 ‘층층이 상상’ 무료 체험 ~12/22 사진 행복한인생 1622 2023.12.06 11:25
336 [지리] 나만 아는 남한 퍼즐 출시 사진 행복한인생 3524 2023.11.08 09:14
335 [사회] [안내] 사회과 교사를 위한 경제 교육 사랑방 함영기 5265 2002.12.29 11:21
334 [사회] [사회] 암흑시대 지성인 눈·귀 연 촌철살인, 리영희 함영기 4441 2003.09.15 08:28
333 [사회] [한국사] 시민이 되찾은 부평 미군부대터 애초엔 민영환씨 땅 함영기 4385 2003.12.25 08:13
332 [사회] [사회공통] 탄핵심판으로 본 헌법재판 용어 함영기 4040 2004.03.21 15:13
331 [사회] [이야기한국사] 장희빈은 영의정과 동급이었다 함영기 4212 2004.03.29 09:48
330 [사회] [이야기 한국사] 대장금으로 복권된 궁녀의 삶 함영기 4391 2004.03.29 09:49
>> [역사] <b>[공동수업] 4.19혁명과 좌절된 민주주의 첨부파일 함영기 7640 2004.04.19 07:42
328 [사회] [사회] 한국해 표기된 고지도 사진 함영기 3673 2004.04.21 08:00
327 [사회] [여성] 근대 여성교육 변천사 특별전 함영기 3837 2004.07.07 07:42
326 [사회] [역사] 中의 동북공정 VS 간도 영유권의 국제 공론화가 해법 사진 함영기 5211 2004.08.08 12:39
325 [사회] [역사] 충무공의 무기는 화려했다! 사진 함영기 4726 2004.09.18 06:57
324 [사회] [자료] 학생의 날 개요 및 유래 첨부파일 함영기 4349 2004.11.03 08:49
323 [사회] [사회] 우리나라 정부 조직도 첨부파일 함영기 8268 2005.04.14 01:11
322 [사회] [사회] 강남·非강남 생활격차 여전 사진 함영기 4351 2005.04.14 01:28
321 [사회] [사회] 4·19혁명 [四一九革命] 계기학습 자료 함영기 7621 2005.04.19 08:28
320 [사회] [5.18] 광주 민중항쟁 상황일지 함영기 6150 2005.05.18 08:28
319 [사회] [5.18] 광주 민중항쟁 관련 현황 함영기 5609 2005.05.18 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