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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

대안교육은 학교교육의 경직성을 벗어날 수 있는가?

함영기 | 2005.04.25 15:57 | 조회 2520 | 공감 0 | 비공감 0
 

대안교육은 학교교육의 경직성을 벗어날 수 있는가?


이 종 태(71회, 한국교육개발원)



1. 머리말


우리의 근대교육은 그 기원에 관하여 몇 가지 이론(異論)이 있기는 하지만, 민간 또는 국가에 의한 서구식 학교의 설립을 그 효시로 볼 때 대략 100년 남짓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동안 식민지와 남북 분단 등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우리의 교육은 양적으로 꾸준히 성장하였으며, 중등교육의 경우 1980년대 중반에는 90% 가까운 취학률의 보편화 단계에 이르렀다. 반면,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은 문제들로서 교육재정의 부족으로 인한 시설의 낙후와 과밀학급,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인한 암기 위주 교육, 획일화된 관료적 통제 등은 우리 교육이 질적인 측면에서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지난 6년간 국가 수준에서 추진해 온 교육개혁은 한 마디로 이러한 후진성을 극복함으로써 이미 전개되고 있는 지식기반사회에서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는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고 있다. 그것은 일부에서 ‘학교붕괴’라 부르는, 학교교육의 심상치 않은 위기 현상이다. 물론 성적이나 입시 문제로 학생들의 자살이 급증했던 90년대 초에도 교육 위기론이 크게 제기된 적이 있었고, 시각에 따라서는 더 많은 위기 국면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학교 존재 자체의 위기’(김진경, 1997)라고 할만큼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과 같은 학교교육의 틀을 가지고는 새로운 시대의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도 없고, 새로운 세대를 학교에 끌어들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탈학교론이, 다른 한쪽에서는 대안교육론이 세를 얻어가고 있다. 특히 종래 학교교육의 부분적 개선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을 추구하는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은 지난 몇 년간 급속하게 확산되었으며, 정책적으로도 반영되어 특성화고등학교라는 새로운 학교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거시적인 눈으로 볼 때 이러한 현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종래의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며, 그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할 만큼 근본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는가? 대안교육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은 기존의 학교교육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이 글은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보고 그 답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근대교육의 일반적인 성격과 우리의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의 구조적 특성을 살펴본다. 이어 이러한 특성에서 비롯되는 학교교육의 본질적 위기를 대안교육의 등장 배경으로 보고 그 동안의 대안교육 전개 과정과 그 안에 담긴 이념적 지향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종래의 학교교육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대안적 의의와 종래 학교교육의 질적 변화 가능성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2. 근대 학교교육의 성격


오늘날 보편화된 학교교육은 근대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성립되고 발전해 왔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학교교육의 형태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근대사회 고유의 성격을 반영한 특수한 형태임을 시사한다. 이는 곧 근대 학교교육― 더 일반적으로는 근대교육 ―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본질적 성격, 즉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 근대성의 이해


본래 ‘근대\'(modern)1)의 어원인 ‘모데르누스’(modernus)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5세기  말이었다. 당시 이 말은 기독교적인 현재를 이교, 즉 로마적인 과거와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 ‘근대’란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의 의도적 불연속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하버마스, 1996: 96). 기든스(1991: 21-22) 역시 근대성의 불연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근대 세계의 사회적 변화 속도나 범위, 그리고 근대적 제도(민족국가, 시장 등) 고유의 본질적인 속성 등은 그 이전의 세계에 비해 연속적인 ‘진화’가 아니라 단절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최근에 다시 이러한 단절적인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근대’의 여러 가지 특성을 초월 또는 탈피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탈근대성’(postmodernity)으로 명명된다(58).

근대성이란 이처럼 그 이전(또는 그 이후)에 대해 어느 정도 단절적으로 구분되는 근대사회가 갖는 독특한 의미 또는 특성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넓게 보아 계몽시대 이후 철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문적 탐구 전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에 따라 좀더 다양한 차원에서 근대성의 내용이 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들을 모두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은 필자의 능력과 여기에서의 논제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근대교육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직접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측면들만을 개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우선, 헤겔이 근대성을 계몽의 아들이라고 천명한 데서 나타나듯이,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이성 또는 합리성이 모든 판단의 주체이자 준거가 된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극명하게 표현된 바와 같이, 근대성은 이성 이외의 어떤 것도 타당한 것으로 수용하지 않는 비판정신을 특징으로 한다(하버마스, 1996: 99). 이러한 원칙은 결국 인간의 감각으로 확인되고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타당한 것으로 수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달 그리고 이를 통한 물질 생산의 비약적인 증가는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판단의 최고 권위가 이성이라는 것은 개인주의와 직결된다.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이 이성적 판단의 보편성을 믿었으나, 칸트의 자율적 도덕성 개념에서 보듯이 근본적으로 그것은 개인 각자가 최종 판단의 권한을 갖는다는 점에서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특성은 근대사회가 중세적 신의 지배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전통적인 신분이나 혈연, 지연의 속박 또는 공동체적 연대에서 탈피한 ‘개인들’로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이성적 판단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것으로서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근대성의 주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세계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기계론적 세계관(Randle, D., 1989: 19-32)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의 명제는 그것이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닐 때 진리이며, 또 그것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주의와 객관주의는 엄밀한 실증과학을 발달시키는 데 기여했다.

보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정초주의 역시 근대성의 핵심적 특징으로 지적된다. 정초주의란 탈근대적 철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근대성의 주요 특성으로 지적된 것으로서(조화태, 1994), 데카르트나 로크에서 보듯이 모든 지식은 필연적이고도 궁극적인 근거로 환원될 수 있으며 또 그런 지식만이 확실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리킨다. 보편주의와 정초주의는 절대주의 지식관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근대성은 자연과 인간, 객체와 주체,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의 원천은 기계론적 세계관과 스스로의 판단에만 의존하는 이성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원론은 상호 공존보다는 대립과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는 바, 여기에서 파생되는 결과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 인간 집단간의 대립, 인간에 대한 부분적이고 편향된 이해 등이다.

마지막으로, 근대사회는 이전(또는 그 이후)의 사회에 비해 고유의 특성을 갖는 제도를 발전시켰다. 기든스(1991: 22)에 의하면 민족국가의 정치조직, 비동물적 동력에 의존하는 생산력, 생산물과 임금노동의 완전한 상품화 등이 그러한 특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러한 제도들은 물론 앞서 열거한 근대성의 특징들과 조응하며, 독특한 근대인의 삶의 양식과 의식을 형성한다.

물론 이밖에도 독특한 시공간 개념이나 거대 담화, 진화 또는 진보에 대한 신념 등 근대성의 특징을 일컫는 요소들은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성의 여러 측면들은 그 자체로서 근대사회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많은 부분은 근대성의 부정적 측면 또는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제기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푸랑크푸르트 학파의 이성 비판은 이성 중심의 근대적 세계관이 수단-목적 합리성만을 추구하게 되어 결국은 비판적 기능을 상실한 ‘일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였음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또 보편주의 또는 정초주의적 태도는 한편으로 단선적 발전사관으로 이어져 서구적 세계관을 유일한 것으로 보는 서구중심주의로 귀결되었다는 점이 많은 제3세계 지식인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이것이 비서구 지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인간중심주의와 이원론적 세계관,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자원과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근대성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기든스, 1991: 23-25). 탈근대성에 관한 논의에 의해 부정적인 측면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면서부터는 근대성에 내재된 진보에 대한 신념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근대성에 관한 비판적 논의가 지향하는 것은 근대성 자체의 부정이라기보다 그 한계의 극복이다. 즉, 새로운 인식의 지평 속에서 근대성에 내재된 부정적 요소를 성찰, 극복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미래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나. 근대교육의 특징과 그 한계


교육을 이해하는 관점이나 방식에 따라서는 ‘근대교육\'이라는 용어 자체가 별다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교육이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항구불변한 특성과 가치를 지니며, 따라서 고대교육이든 근대교육이든, 아니면 21세기 교육이든 차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이홍우, 2000). 그러나, 앞의 근대성에 관한 논의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사고방식이나 태도 자체가 근대성의 한 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하나의 관점에서 본 교육의 개념을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이론과 실제의 차원에 일관되게 적용하려는 것은 곧 근대적 보편주의의 반영인 것이다. 근대성이 이전(또는 그 이후)의 시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근대교육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근대교육 고유의 패러다임이 있을 수 있다. 다소 임의적이기는 하지만, 근대성의 특징에서 연역할 수 있는 근대교육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근대교육이 기르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인간 특성은 합리성이다. 즉, 이성적 판단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고 모든 사물을 합리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의 양성이 교육의 목표가 된다. 근대 이후 개인의 해방, 과학과 기술의 발달, 물질적 풍요의 향유 등은 어떤 면에서 이러한 근대교육의 성과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과학적 태도로 표상되는 이 때의 합리성이란 주어진 목적의 실현을 위한 도구적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근대교육이 길러낸 합리적 인간이란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결여한 채 물질적 욕망 충족을 위해 타인과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이다. 그 결과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깨닫게 된 바, 인류 스스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자원 고갈과 생태 위기의 직면이다.

둘째, 근대교육은 보편적 지식관을 바탕으로 통일되고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지향한다. 즉, 누구나 알아야 할 지식이 있으며, 또 그것은 일정한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제시된다. 당연히 이러한 지식의 원천은 교사이며, 따라서 교사 중심의 교육이 자연스러운 형태이다. 물론 일찍이 루소 이후 보편적이고 체계적인 지식보다 아동의 흥미와 경험이 중시되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 역시 결국은 계몽사상 이후의 합리적 인간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근대성’의 한계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동중심교육이 방법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교사중심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 비하면 부차적인 위치에 머물고 있다.

셋째, 근대교육의 형식은 공교육체제로 구성된다. 즉, 교육은 국가의 주요 임무이며 따라서 국가가 운영하는 거대한 관료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은 신분해방을 가능케 한 평등의 이념에 따라 모든 국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한 방편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소수를 대상으로 하던 과거의 교육에 비해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따라서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는, 대중교육체제는 효율성과 통제의 원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학급과 학년, 그리고 졸업장 제도 등의 획일적인 통제 기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앞의 보편적 지식관과 현행 공교육체제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문제는 학교교육의 경직성이다. 학교의 입학과 졸업은 엄격한 자격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규정되어 있다. 물론 그 절차는 무엇을 어떤 순서에 따라 배워야 하는지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것과 배워야 할 것,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자의 자격, 정해진 기간에 배워야 할 분량, 나아가 학교의 크기와 건물의 구성, 학교에서의 일상적인 생활 규칙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과 밖은 엄격하게 구분되며 상호 출입은 까다로운 절차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절차와 규정들은 물론 학교교육의 최소한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실제로는 일리치가 말한 바, 무엇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보다 어떤 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있는가와 같은 ‘형식’에 의해 한 사람의 교육받은 정도를 판단하는 가치전도의 현상이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근대교육의 실질적인 기능은 인력(노동력)의 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공교육체제를 성립시킨 두 가지 동인으로는 앞서 말한 평등의 이념과 함께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력 양성의 필요를 들 수 있다. 후자의 대두는 ‘의미’ 추구를 강조해 온 중세까지의 ‘자유교육’이 근대 이후 문제 해결을 위한 지식(유용성)을 추구하는 ‘자유주의 교육’으로 전환되었음(R. A. Farrell, 1986)을 반영한다. 즉, 교육이 실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근대교육의 인력 양성 기능은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대량생산 체제에 걸맞는 값싼 인력 양성(획일화되고 순치된 노동력)이고, 다른 하나는 위계화된 산업사회에 부합되는 차등적 인력 양성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훈련과 통제가 중시되며, 후자를 위해서는 선발과 배치 기능이 중시된다. 여기에서 경쟁 원리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이상과 같은 특징들을 지니는 근대교육은 문예부흥과 계몽 시대를 거쳐 형성된 ‘근대성’의 반영인 동시에 그 ‘근대성’을 확충하고 재생산하는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교육은 신분에 근거한 귀속사회를 개인의 능력에 근거한 경쟁사회로 전환시켰으며, 과학 기술과 이에 근거한 산업 발전을 추동시킴으로써 인류의 무한한 진보 가능성을 믿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근대교육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복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시각은 1960년대를 고비로 점차 비판과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뀌게 된다. 산업사회의 요구에 종속된 대중교육 체제는 개성과 주체성의 상실을 초래하였고, 교육기회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평등사회는 실현되지 않았다. 교육을 통하여 기르고자 한 합리성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였으며, 이기적인 개인들간의 경쟁은 공동체의 파괴와 생태계의 심각한 훼손을 초래하게 되었다. 70년대 초 이후 등장한 탈학교론이나 재생산론 등은 이러한 논의의 이론적 성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이후 생태계의 위기 의식 확산과 이른 바 제3의 물결이라 일컫는 정보화사회의 등장으로 종래의 교육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즉, 이미 드러난 문제들이 종래 교육체제의 부분적인 개선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결함이 아니라 근대교육의 기본 가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근본적인 한계의 표출이라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이는 탈산업사회에서는 종래 교육의 틀이 더 이상 적합성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결국 근대교육 패러다임의 위기를 말하는 동시에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피터 드러커(1993)는 전통적인 학교가 직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학교는 읽고 쓰고 셈하기와 같이 학생들이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것들’(subject knowledge)을 가르치는 데 주력해 왔는데, 정보기술이 발달된 오늘날에는 학교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런 것들을 손쉽게 배울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학교가 여전히 종래의 방식을 고수할 경우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가 학교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공부하는 방법과 과정 지식(process knowledge)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이는 교육과정이나 학교의 운영 방식이 근본적으로 재구조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 한국적 상황과 학교교육의 특성


이상에서 살펴 본 근대교육의 특성은 대체로 한국의 학교교육도 공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우리 학교교육은 개항 이후 전통적인 학교제도 대신에 받아들여 식민지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서구식 공교육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학교교육이 이러한 공통점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대를 통한 타율적인 제도 수용과 남북 분단에 따른 이데올로기 통제 필요성, 그리고 이를 악용한 권위주의적 정치집단의 장기적인 권력 남용 등은 한국 교육의 특수한 문제들을 낳은 주요 배경이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교육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간섭에서 오는 획일성과 경직성이다. 이는 근대교육의 기본 속성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다. 최근 다소 완화되는 경향을 보이고는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전국의 학교가 거의 같은 내용을 비슷한 시기에 가르쳐야 하는 획일적인 교육과정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우리는 국정교과서를 편찬하고 있으며, 대학의 입학시험을 국가가 관리하고 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교육행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교원 인사와 교육재정이 일사분란하게 통제된다. 이 속에서 교사 개인 또는 단위학교의 자율적인 시도는 유무형의 압력을 받아 좌절된다. 입학과 퇴학, 진학과 취업의 길은 서로 반복교류하기 어려운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구조적으로 한 번의 실수는 평생을 좌우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중요한 현상이 과도한 입시경쟁이다. 물론 다수가 한정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경쟁이 불가피하지만, 진로의 사다리가 단선화되고 이것이 국가의 개입 속에서 경직되게 운영될 때 경쟁의 정도는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치열한 경쟁에서 불거질지도 모를 정치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서 국가는 경쟁 과정에 개입하게 되고, 이 개입은 이후 더욱 치열한 경쟁을 낳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아울러 이러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한 눈’을 팔 수 없으며, 그 만큼 우리의 학생들은 ‘교과서적으로’ 획일화되고 교사들의 수업 방식 역시 경직되는 또 다른 악순환도 계속된다.

이러한 실정은 오래 전부터 만성적인 교육재정 부족으로 인한 과밀학급이나 빈약한 시설․설비 등과 함께 한국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범으로 지목되어 왔다. 특히 90년대에 들어 세계화와 정보화가 강조되면서 개성과 창의성을 기르지 못하는 기존의 학교교육이 당장 폐기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었다. 6,70년대의 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학교교육이지만, 이제는 그 수명을 다했으며 새로운 교육체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90년대 중반 이후 국가 주도하에 대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의 교육개혁이 그다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학생들에게 더 적합한 교육을 하고자 하는 ‘수요자중심 교육’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학생들은 학교에 머물기를 더 싫어하며 ‘공부 잘하기’를 핵심으로 하는 기존의 학교 문화를 더욱 강하게 거부한다. 지난해에 대중 매체에 회자된 ‘학교붕괴’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관적 비유이다. 기존의 획일화되고 경직된 학교교육으로는 80년대 이후의 풍요 속에서 성장한 학생들을 더 이상 끌어안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은 단지 개혁 추진의 미숙 탓만이 아니라 종래 학교교육의 근본적인 위기임을 시사한다.

김진경은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의 학교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학교 존재 자체의 위기’로 진단한다(1997).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부 부유층 거주지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이 약화 또는 상실되고 있다. 둘째,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미 소비 주체로 등장한 학생들의 의식과 문화에 비해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학교 문화가 접점 없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셋째, 교사들의 승용차 출퇴근이 일반화함으로써 학교와 지역사회가 괴리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진단이 우리의 학교교육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따로 검증 절차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라도 아이들이 크게 변했으며 교실의 분위기가 예전같지 않다는 많은 교사들은 이구동성은 현실을 능히 짐작케 한다. 그들은 학교교육이 이대로는 희망이 없으며,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된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교육, 대안적인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에서 나타난 대안교육 붐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3. 대안교육의 등장과 이념적 지향


  가. 대안교육의 이념


근대교육의 시대적 적합성에 대한 회의는 곧 대안교육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안교육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대안교육’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대안교육의 등장을 말하기에 앞서 대안교육의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안교육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이다2). 그러나 이 말은 자생적이라기보다 영어(alternative education)의 번역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에 기존의 학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실험학교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자유학교’ 또는 ‘대안학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교육백과사전은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대안학교’의 의미를 “표준적인 ‘공립학교들’이 제공하는 ‘전통적인 것’과는 다른 경험을 추구하는 아동과 학부모들을 위하여 특별한 교수법과 프로그램, 활동, 여건 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고안된 학교”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전통적인 것과 다른 경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전히 열려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일 수도 있고 약간 변화된 정도일 수도 있다. 또 기존의 형식을 유지한 채 내용만을 바꾼 것일 수도 있고 형식 자체의 변화에 초점을 둔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대안교육은 정형화된 교육의 어떤 형태나 내용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정태적이기보다는 동태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안교육을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기존의 교육에 반하여 새롭게 추구되는 교육’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대안 교육의 의의나 성격을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 시대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려할 때, 대안교육의 의미는 ‘20세기 후반에 표출된 근대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는 새로운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대안교육 의미는 현시대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독특한 문제의식과 여기에서 비롯된 가치지향을 담고 있다. 물론 이렇게 보더라도 현행 교육의 문제를 파악하는 시각에서 따라 대안교육의 구체적인 의미는 다양하다.


  나. 대안교육의 전개


대안교육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근대 공교육체제에 대한 비판과 위기 의식이 고조되던 7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그 배경과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에는 6, 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비롯된 사회 비판적 분위기와 공교육 제도에 대한 회의, 그리고 상대적으로 부각된 60년대 영국 초등교육 개혁의 영향이 대안학교의 설립 붐을 가져왔다. 초기에는 주로 사립학교 부문에서 시도되었으나 나중에는 공립학교 가운데서도 대안학교들이 등장했으며, 1975년경에는 후자만 해도 미국 전역에서 약 5천개를 헤아렸다고 한다(B. S. Cooper, 1994). 그런데, 등장 배경이 말해주듯이 이 시기 미국의 대안 학교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던 핵심적인 생각은 아이들을 기존의 학교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것일 뿐, 아직 근대교육의 근본적인 한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는 새로운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한 자연 또는 생태 위기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다. 1986년 영국에서는 ‘녹색 교육’을 표방한 Green Teacher라는 잡지가 창간되었는데, 이것은 흔히 말하는 환경교육을 넘어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를 통일적인 존재로 봄으로써 평화교육이나 아동의 성장을 중시하는 교육 등을 지향한다. 1982년에 설립된 영국 하트랜드의 ‘작은 학교’는 이러한 생태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대표적인 대안학교이다(사티쉬 쿠마르, 1993).

독일에서는 교육과정을 비롯한 학교 운영에 대한 주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아이들에게 다양한 체험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70년대 후반부터 실험학교 운영과 이를 기초로 한 대안학교 운동이 전개되었다(강태중 외, 1996). 그 결과로 설립된 것이 ‘자유 대안학교’이다. 이는 주로 초등 교육과정으로 운영되는 작은 규모의 학교로서, 학생들의 다양한 체험 활동과 자율적인 학습이 강조되고 있다.

이밖에도 물론 각 나라의 특수한 조건을 반영하는 다양한 형태의 대안적인 학교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 이념적 특성으로 보면 대개는 이들 세 유형 가운데 어느 하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대안학교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인지학이라는 독특한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독일의 발도르프 학교와 아동의 잠재력에 대한 완벽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영국의 섬머힐이다. 전자는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 600여 개의 학교가 설립․운영되고 있고, 후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대안학교 설립에 모델이 되어 왔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대안학교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들은 20세기 초반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20세기 후반의 근대교육의 한계에 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둘 다 종래의 경직된 교육제도를 거부하고 철저하게 인간(학습자)의 본성에 부합되는 교육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념적으로는 후세의 대안학교들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개관한 대안교육이 우리 나라에서도 모색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를 전후해서이다. 이 시기에는 급진적 사회운동의 흐름을 타고 교육 제도의 구조적 변화를 목표로 전개되었던 80년대의 교육운동이 퇴조하고, 정치 지형의 변화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가 유포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나타난 뚜렷한 경향은 제도 변화보다는 인간 중심의 소규모 교육 실천을 통한 청소년들의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선구적인 형태는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이 1986년부터 시도했던 캠프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점수 경쟁과 타율적 인간을 양산하고 있는 기존의 교육 상황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적 성격의 캠프였다. 철저하게 자율적이고 동시에 공동체적인 가치를 추구한 이 캠프의 교육 이념과 방식은 대안적인 교육을 찾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될 만하였다.

90년대 초를 지나면서 이와 유사한, 비형식적 공간에서의 소규모 교육적 실험이라 할 수 있는, 캠프 또는 체험중심 프로그램은 학생들과 학부모의 호응 속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특히 입시와 성적의 중압감에 의한 학생들의 자살이 매년 100여 건을 넘는 현실은 이를 더욱 촉진하였다. 이 무렵 다양한 ‘대안학교’들이 등장하는데,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서울의 다솜학교(90),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광명 창조학교(92), 대구의 민들레학교(93), 자유학교 물꼬 준비 모임(93), 부산 창조학교(94), 성남의 여럿이 함께하는 학교(94),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따로 또 같이하는 학교’(95), 가출 청소년을 위한 들꽃피는 학교(예수가정, 94),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꾸러기학교(92), 공동육아협동조합 어린이집(94)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자연발생적으로 확산된 새로운 교육의 실험자들은 1995년 초에 대전에서 최초의 연대 모임을 갖고 생태주의적 세계관과 공동체적 삶, 자유와 자율에 기초한 교육이라는 공통적 지향점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대안 교육의 확산을 위한 공동 노력을 다짐하는 한편,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연대 모임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또 이 해 7월에 경기도 수지에서 개최된 ‘대안교육 모색을 위한 워크숍’은 대안교육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어 1996년 8월에 고려대학교에서 개최된 ‘대안교육 한마당’은 대안교육 운동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97년 3월 9일 우리 나라 최초의 상설 대안학교라 할 수 있는 산청 간디청소년학교가 개교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주로 계절 또는 주말 프로그램 위주인 여타의 대안교육 프로그램에 비해 내용과 형식에서 명실상부하게 대안적인 교육을 지향하는 학교가 출현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안교육 운동은 기존의 학교교육에 보완적인 프로그램 운영에서 점차 대안학교 설립 운동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을 촉진한 것은 1996년 12월 교육부가 ‘학교 중도탈락자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발표한 대안학교 설립 계획이었다. 여기서 대안학교란 이미 학생 중심의 인성 교육을 통해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재적응시키고 있던 영광의 성지고등학교를 모형으로 한 것으로서, 당초 전국에 6개교를 시범적으로 설립, 운영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다소 수정․보완되어 1997년 하반기에 체험위주의 인성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특성화고등학교 제도로 법제화되었고, 이에 따라 1998년 신학기에 성지고등학교와 산청의 간디고등학교를 포함한 6개의 대안학교가 정규고등학교로서 개교하였다. 이후 1999년에는 4개교, 2000년에는 1개교가 추가되어 현재 11개교가 운영되고 있다.

물론 90년대 후반에 대안교육이 이처럼 대안학교 형태로만 존속된 것은 아니다. 특히 정규학교 방식은 학생 모집이나 재정 지원 등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반면, 각종 법령과 당국의 간섭에 따른 제약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안교육의 본래 뜻을 지켜나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아예 학력 인정을 고려하지 않고(필요한 경우 검정고시 활용) 대안적인 교육 이념에 충실한 방식을 추구하기도 한다. 공동체 생활과 교육을 결합한 변산 공동체학교나 예천의 방하생활학교, 파괴된 가정의 복원을 위한 그룹 홈 방식과 교육을 결합한 안산 들꽃피는학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90년대 초에 대안교육 운동의 장을 열었던 계절제 또는 방과후 프로그램들은 다양한 형태로 존속되는 한편, 정부의 교육개혁 정책과 맞물려 기존 학교교육의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안교육의 확산에 비례하여 종래의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경향도 증가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가정학교(home schooling)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탈학교 운동이다. 둘 모두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참여자들끼리 정례적인 모임을 갖고 있으며, 최근 종래 학교교육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다. 대안교육의 이념적 지향


이상의 논의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대안교육은 그 등장 시기나 배경, 형태, 내용, 이념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나, 비교적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다양한 시도들이 모두 근대교육― 정확하게 말해 근대 이후 성립된 공교육체제 ―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을 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그러한 시도들은 단지 방법론상의 변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근대교육의 기본 가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이념적 지향을 모색한다. 대안교육의 다양성에 비추어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피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이념적 지향들을 몇 갈래로 정리해보는 것은 대안교육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 학교교육의 개선을 위하여 유용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전체적인 특징을 짚는다면 대안교육은 대체로 근대성 또는 근대교육의 기본 가정들에 비판적이며 따라서 탈근대적 경향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앞 절에서 지적한 근대성의 특징인 합리성이나 보편주의, 정초주의적 인식론, 기계론적 세계관, 물질적 풍요 중심의 가치관에 비판적이다. 그렇다고 합리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도구적 합리성이 지닌 한계는 비판하지만, 그 자리에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하고 성찰하는 미학적 이성 또는 생태학적 합리성을 놓는다(박이문, 1997; 이종태, 1999). 보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상호 이해와 의사소통의 가능성은 인정하고 또 중시한다. 물질적 풍요를 거부하고 원시적 삶을 지향하지는 않지만, 욕망의 조절을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

둘째, 대안교육은 아동 또는 학습자를 보는 관점이 전통적인 근대교육과 다르다. 근대교육의 기본 가정에 따르면 아동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따라서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도 아니다. 따라서 교사 중심의 교육이 자연스러우며, 성인의 관점에 의한 통제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대안교육에서는 대체로 아동(학습자)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며 따라서 자율적인 학습을 중시한다. 이는 통제 중심의 교육보다는 학습자의 자유와 자율적인 결정에 바탕을 두는 교육으로 나타난다. 당연한 귀결로서, 종래 학교와 같은 규율과 조직, 엄격한 교육과정 등을 중시하지 않으며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과 필요에 바탕을 둔 교육을 추구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맞추기보다는 학교를 아이들에게 맞춘다’는 생각으로 만든 니일의 섬머힐은 전형적인 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교사의 역할이 부정되거나 과소평가되지는 않는다. 교사가 주도하지는 않되, 마치 식물과 햇빛의 관계처럼 학습자에게 교사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하다.

셋째, 대안교육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대표적인 이념은 생태주의라 할 수 있다. 생태주의란 생태계의 온전한 유지가 인간 생존의 전제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근대문명의 인간중심성을 비판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공생을 추구하는 사조이다. 이러한 생태주의가 반문명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자연의 파괴를 가져오는 기계문명의 편리함보다는 불편하더라도 스스로의 노동을 통한 의식주의 해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태도를 중시한다. 그러한 행복은 기계에 빼앗긴 인간의 원초적인 능력의 회복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안교육은 다양한 노작(동)과 체험활동을 강조한다.

넷째, 대안교육은 공동체적 삶과 가치를 중시한다.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문명은 대립과 경쟁에서 초래되는 자원 낭비와 파괴적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공존과 협력을 중시하는 공동체적 가치의 지향은 탈근대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적 삶과 가치의 구현은 경쟁과 통제가 불가피한 대량교육체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안교육은 하나같이 친밀한 인간관계의 형성이 가능한 소규모 학교를 지향한다. 한편, 이러한 소집단 내의 인간관계가 스스로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공동체가 위치해 있는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관계가 필수적이다. 대안학교들이 교육과정이나 교사진의 수급과 관련하여 지역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섯째, 대안교육은 대체로 영성(靈性)의 가치를 중시한다. 과학에 바탕을 둔 서구의 물질문명은 종교가 지닌 비물질적이고 내면적인 삶의 차원을 억압하였지만, 그 결과 정신세계의 황폐화가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최근 특정 종교의 차원이 아니라도 영적 진리 또는 내면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D. Randle, 1989).

어떤 면에서 이러한 대안교육의 이념적 지향이 종래의 교육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작은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추구되었거나, 또는 교육의 이상(理想)으로는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으면서도 실제로 구현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대안교육이란 새로운 교육이라기보다 오히려 교육이 지향하고자 했던 본래의 이념, 즉 ‘교육의 본질을 되찾기 위한 애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정유성, 1998).


4. 시사점과 전망: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의 모색


이상에서 개관한 대안교육의 여러 양상과 그 전개 과정은 기존의 학교교육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역사상 늘 있어왔던, 주류에 대한 소수의 문제제기로서만 의미를 지닐 것인가 아니면 종래의 교육을 대체할 만한 가능성을 지닌 명실상부한 ‘대안’으로서의 무게를 지닌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존하는 다양한 대안교육의 사례들이 규모나 현실적인 영향력의 측면에서 기존의 학교교육에 비해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지향하는 이념이나 교육의 방식에 비추어 보더라도 가까운 장래에 대안교육이 기존의 학교교육을 대체할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왜냐하면, 대안교육은 현존 사회의 주류적 가치― 풍요로움, 편리함, 경쟁과 승리, 속도 등 -―에 거리를 두거나 역행하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다수 대중의 호응을 통한 지배적 위치로의 부상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에 세계 각국에서 시작된 대안적 교육의 탐색과 실천이 단지 새로움을 좇는 일시적 유행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문명의 산물로서 대두된 지구적 차원의 환경 및 생태 위기는 종래의 확대지향적 발전과 소비 문화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요구한다. 아직 자본의 확대 논리나 각국의 발전 정책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위기의 심화에 따라 생태주의가 정책 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은 불가피하리라고 예견된다. 이는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수용해야 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교육적으로는 생태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대안교육의 수요가 갈수록 증대될 것임을 시사한다.

둘째, 종래의 산업사회에 비해 지식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유형이 근본적으로 다른 지식기반사회가 도래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교육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다양한 지식과 실시간 정보에 대한 개인의 무한정한 접근 기회가 보장되는 인터넷의 보편화는 정형화된 지식과 교사 중심의 집단 학습을 기본 모형으로 하는 종래 학교교육의 효용성을 위협한다. 반면 지식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학습자 중심의 교육을 지향하는 대안교육은 새로운 사회적 조건에 적합하다.

셋째, 국내외를 막론하고 새로운 세대의 의식과 문화가 기성세대에 비해 단절적으로 변화하는 상황 역시 종래의 학교교육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문자보다는 영상이나 인터넷에 익숙하고 획일적인 통제나 구속을 극도로 싫어하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규율과 간섭이 필수적인 집단 교육보다 개인의 자율적 공간을 최대로 허용하는 개별화된 교육이 요구된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대안교육은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대안교육이 앞으로 그 규모나 영향력의 측면에서 점차 확대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지금의 대안교육이 기존의 학교교육을 잠식하여 결국은 대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현존하는 대안교육이 완결된 어떤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종래 학교교육의 한계에 대한 문제제기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대안교육이 확대된다는 것은 새로운 학교가 늘어난다는 것 외에 기존의 학교교육이 그 내부에서 질적인 변화를 거쳐 새로운 교육을 할 수 있게 되는 상황도 포함한다. 국가 주도하에 다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종래의 공교육체제하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미국의 여러 주에서 실험하고 있는 사례들은 주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되 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새로운 교육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임함으로써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기존 공교육체제 내부에서의 변화가 중요한 것은 교육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국가 외에 다른 누군가가 부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종래의 학교교육이 대안적인 교육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곧 앞서 논의한 근대교육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로서 새로운 교육의 패러다임이 갖는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형성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근대적인 합리성 대신에 자기성찰적인 인간, 보편적인 지식 대신에 개별적인 의미가 강조되는 지식(교육내용), 교사가 가르치기보다는 학습자 스스로 배우는 교육, 남을 이기기 위한 개인간의 경쟁보다는 상호 공존과 협력을 중시하는 공동체 교육, 자격증이나 졸업장보다는 실제로 얼마나 아는가를 중시하는 풍토 등이 강조될 것이다. 한 마디로, 교육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생각, 즉 새로운 ‘교육 문법’이 구체화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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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든스(이윤희, 이현희 옮김, 1991). 포스트모더니티, 민영사

김진경(1997). 학교교육, 존재 자체의 위기 그리고 대안(1), 교과연구 1997 여름호, 통일시대교육연구소

박이문(1997).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 서울: 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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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이재규 역, 1993).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한국경제신문사

하버마스(한상진 편, 1996). 현대성의 새로운 지평, 나남출판


Cooper B. S.(1994). Alternative Schools and Programs, in The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Education, 2nd ed. vol. 1

Farrell, R. A.(1986). A History of Liberal Education and Liberalism: the Traditional Humanist in Conflict with the Liberal Ideologue, a Doctoral Dissertation in University of Mass., printed by UMI Dissertation Services

Randle, D.(1989). Teaching Green, London: Green Print


1) 우리말에서 ‘근대’와 ‘현대’는 현재와의 시간적 거리라는 어감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나, 영어로는 모두 modern으로 표현되며, 계몽시대 이후 현 시대까지를 통괄한다는 점에서 여기에서는 ‘근대’ 또는 ‘근대성’(modernity)이라는 말로 통일한다.


2) 공식적 문헌상으로는 곽병선이 1995년 <교육개발> 3월호(한국교육개발원)에서 ‘대안적 학교교육’이라는 말을 쓴 것이 최초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기존의 학교교육이 지닌 한계에 대한 논의와 이를 벗어나려는 다양한 실천들이 모색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안교육’이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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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공지사항] 늦봄문익환학교 2008 여름계절학교 참가자 모집 첨부파일 주주 4321 2008.06.17 13:11
49 [홈스쿨] 다솜 홈 스쿨링(다리꿈 성장학교) [1] 주주 5779 2008.06.17 13:15
48 [대안교육자료] 간디학교 소개 동영상 [2] 주주 5195 2008.07.13 13:17
47 [대안교육자료] 교육안내] 나눔교육아카데미(Facilitator양성 기본교육과정) 참가모 사진 첨부파일 이연규 4828 2014.09.15 10:32
46 [대안교육자료] [아름다운가게] 2014나눔교육컨퍼런스-나눔교육과 페다고지: 프락시스를 사진 첨부파일 이연규 5172 2014.11.13 09:59
45 [공지사항] 2012 나눔교육 심포지엄 첨부파일 웃음아하하 5523 2012.05.23 0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