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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참고자료

[사회] 지하철 역명의 유래

함영기 | 2005.05.05 09:29 | 조회 10970 | 공감 0 | 비공감 0

 

역 명

지 명 유 래

의정부북부

각 대신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논의하였다 하여 의정부라는 지명이 생성된데서 유래

의정부

각 대신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논의하였다 하여 의정부라는 지명이 생성된데서 유래됨.

회 룡
(시흥대학)

조선시대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할 때 가마가 화룡사라는 절 부근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아 무학대사가 축원을 드리자 비로소 가마가 움직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회룡사로 개칭한데서 유래

망월사

인근에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만월을 보는 사찰이라 하여 망월사라 붙여진 절이 있어 유래됨.

도봉산

도봉산의 이름을 따 도봉산역으로 명명

도 봉

서울 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있음으로 얻어진 이름

방 학

도봉동에 있는 도봉서원의 창건과 관련하여 조선조 도봉서원을 정하기 위하여 도봉산 중턱에 중다리를 내려다보니 학이 평화스럽게 많이 놀고있어 방학골이 되었다는 설과, 이곳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있는 형상을 하고있어 방학골이라는 설이 있으나 곡식을 찧는 기구인 방아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말로 방아골로 불렀던 곳이 한자음이 비슷한 방학리로 되어 방학동이라는 명칭이 된 것으로 추정

창 동

나라의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인 조선시대 후기 어영청의 북창이 이곳에 있었기에 유래했다.

녹 천

이 지역에 홍수로 인해 폐허가 된 마을 뒷산에서 사슴이 내려와 마을앞 중랑천에서 목욕을 하고 간 이후부터 농사가 잘 되고 마을 일도 순조로와져 녹천이라 불린데서 유래됨.

월 계
(인덕대학)

이 지역의 동쪽으로 중랑천이 흐르고 동북쪽에서 서쪽으로 북한산의 지맥이 이어진데다가 지형이 반달처럼 생겨 월계라는 지명이 생성되었음.

성 북
(광운대앞)

이 지역이 한양성의 북쪽에 있다 하여 유래됨.

석 계

석관동(石串洞)과 월계동(月溪洞)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여 석관동의 첫글자인 石자와 월계동의 두 번째 글자인 溪자를 조합하여 제정됨.

신이문

조선시대때 이문밖으로 도둑이 많아 포졸들의 방범초소를 이문에 설치함으로써 그 이후로 이문이라는 지명이 유래됨.

외대앞

인근에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있어 유래됨.

회 기
(경희대앞)

산 5번지에 있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소가 있는데에서 유래되었다.

청량리

청량리는 청량1동 61번지에 있는 사찰 청량사와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찍부터 도성사람들의 성외 피서 및 교외로 나가던곳이며 이때부터 청량동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제기동

제기동은 조선6대 왕인 성종이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이마을에 친경대를 만들고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던 자리라는 데에서 동명의 기원을 두고 있다.

신설동

신설동은 조선중기 동부 숭신방(성외)에 새로 설치된 마을이므로 신설 계좌 한테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즉 영조 27년(1751년)의 기록에 처음으로 신설계가 나타나고 있다.

동대문

동대문은 흥인지문의 속칭으로 도성 4대문의 하나이다. 보물 제 1호로 지정된 동대문은 조선초 태조때에 세워졌지만 조선말 고종때에 완전히 해체하여바닥을 높인 다음에 건축한 것이다. 이 문을 특별히 옹성으로 쌓은 것은 이곳의 지대가 낮아 외적을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종로5가

종로는 조선 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였다.

종로3가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였다.

종 각

종각은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었는데 보신각이라는 편액을달면서 보신각으로 유래하였고, 현재는 종각이라고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3.1절, 광복절, 새해를 알리는 제야에 종을 쳐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종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시 청

시청역에 위치한 태평로는1914년에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사신을 맞던 태평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명(明)의 사신이 오면 이 길을 거쳐 태평관에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서울역

광무4년(1900년)에 남대문역으로 출발한 서울역은 우리나라 철도의 대표적인역으로 주요 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1923년 경성역으로 개칭되었으나 광복후 1947년에 서울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서울역사는 1925년에 지어진 건물로 서울의 관문이다

남 영

광복 후 동명을 제정할 때 서울 남쪽에 군영이 있다하여 남영동으로 명명하였기에 남영역으로 지정함.

용 산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름을 본따서 용산역이라 명명함.

왕십리

조선초 국사였던 무학대사가 도읍지터를 물색하던 중 지금의 왕십리 지역에서 만난 한 노인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응 봉

응봉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옥 수

마을에 옥정수(玉井水)라는 우물이 있어 옥정숫골이라 불리다가 옥수동이 되었다

한 남
(단국대앞)

한남동 동명을 따서 한남역으로 명칭

서빙고

조선시대(영조 17년) 서쪽에 위치한 얼음창고라 해서 서빙고라 했고, 1910년 10월 15일 경원선 개통, 영업개시와 함께 서빙고역이라 불리움

이 촌

이촌동은 옛날부터 중지도와 상변에 살던 사람들이 큰 비만 오면 대피했기 때문에 이촌동 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한 1914년에 신촌리, 사촌리의 두 마을을 합쳤기 때문에 이촌동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노량진

노량진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노들나루라 하여 맞은편 용산나루를 잇는 큰나루터였다, 이 노들나루에 노량진-제물포간에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놓이면서 노량진역이 세워짐.

대 방

조선시대 높은 절과 번댕이 두마을로 이루어진 곳이었는데, 일제 때 번대방리라 하다가 광복 후 대방으로 개칭됨.

신 길

새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데서 유래함.

영등포

이 지역의 포구에서 선박이 출하하여 유래

신도림

도림동은 산형국이 마을뒤로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 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있다고 해서 "도야미리"가 "도림"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구 로

이 마을에 현명한 9명의 노인이 살았다고 하여 유래.

가리봉

이 마을의 작은 산봉우리가 이루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데서 붙여졌다는 유래와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또는 갈라졌다는 뜻인 "가리"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독 산
(하안동입구)

마을 산봉우리에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산이 있어 대머리 독(禿)자를 붙여 독산동이라 함.

시 흥

고구려시대때 잉벌로라는 지명으로 불렸으며,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6대 성종때 고을 별호를 시흥으로 했다는 데서 유래

석 수

이 마을에 석공들이 많이 살아 석수동이라 한데서 유래됨.

관 악

주변에 관악산이 있어 대표적인 명칭으로 명명.

안 양

인근에 안양사 라는 사찰이 있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

명 학
(성결대앞)

옛날 이곳에 주변에 두루미가 많이 서식하여 두루미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 이 이름을 따서 명학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금 정

벌판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어느곳이나 파기만 하면 물이 잘 나와 물긷는 여인들의 옷을 적신다 하여 금정리(衿井里)라 한데서 유래.

군 포
(한세대앞)

임진왜란때 후퇴 중이던 관군에게 마을사람들이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시켜 왜병을 크게 무찌르게 되었다. 그 후부터 이 지역을 굶주린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군포"라 명명하게 되었다 한다.

의 왕
(철도대학)

조선중엽 남양부사가 부곡변씨촌을 지나던 중 마을이름을 묻자 이마을은 대문, 울타리 등 없는것이 12가지나 되어 貧谷이라 한다는 말을 듣고서 남양부사가 안되어 富谷이라 부르는게 낫지 않겠느냐 했다 하는 설. 2004년 6월 25일 역명을 "부곡"에서 "의왕"으로 변경 시행.

성균관대

인근에 성균관대가 있어 명명

화 서

수원성곽 4개관문 중에 화서문이라는 웅장하고 화려한 문의 명칭을 따서 화서동이라는 행정상의 동명이 생기고, 그 권내에 위치하게 된 당역의 역사명칭도 화서역이라 명명케 되었음.

수 원

수원은 부족국가 때 \'벌물, \'牟水(모수)\'라 하던 것이, 고구려 시대에는 \'물벌\' 또는 \'물골\'리라 불리며 한자로 \'買忽郡(매홀군)\'이라 표기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경덕왕 16년(757)에 순수한 우리말의 뜻에 해당하는 한자로 맞추어, ?루은 \'水(수)\'로 , 골은 \'城(성)\'으로 바꾸어 \'물골\' 또는 \'水城(수성)\'으로 고치는 일대 개혁이 있었다. 즉 말로는 \'물골\'이라 하면서, 행정상 지명은 \'水城郡(수성군)\'으로 표기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 23년(940)에 주·부·군·현의 이름을 당나라 식으로 고치게 되어 \'물골\'이?\'水州(수주)\'로 바뀌게 되었다. 충선왕 2년(1310)에 여러 곳의 牧(목)을 도태시킬 때에 강등되어 水原府(수원부)로 한 것이, 지명에 수원이 등장하는 최초다. \'原(원)\'은 \'벌\' 또는 \'골\'의 뜻이다.

그러다가 정조 17년(1793) 1월 12일 수원부의 호칭을 \'華城(화성)\'으로 바꾸고, 御筆(어필)로 현판을 써서 壯南軒(장남헌)에 걸었으며, 府使(부사)를 留守(유수)로 승격시키는 지명의 변화가 있었다. 정조께서 왕 13년(1789)에 현재의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 안녕리 일대에 살던 수원 백성을 현재의 수원시 팔달산 동쪽으로 집단 이주시키고, 그곳에 思悼世子(사도세자)의 능침을 옮겨 모시고 顯隆園(현륭원)이라 하였다. 정조 14년에 부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용주사를 건립한 것이 지명 변경의 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 류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다 하여 "버드내"라고 불렸다 한데서 유래

병  점

옛부터 삼남으로 통하는 큰 길목이어서 고려시대부터 행인들이 쉬었다가 가는 길목으로 떡을 파는 떡장수들이 많았다고 한데서 유래

구 일
(동양공전앞)

 

개봉

현재 경인선과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남쪽에 있는 개웅산의 (개)자와 양천구 신정동과 경계를 이루는 매봉산의 (봉)자를 합하여 이름 붙이게 되었음.

오류동

"오류"는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 이름 붙여진 오류골에서 비롯되었음

온 수
(성공회대입구)

조선왕조 1438년경 서울 양천구와 부천 소사구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이곳 부평도호보 일대에서 더운물이 솟아나온 기록이 있어 온수골(옷수골)이라 칭하다가 1963년 서울 시조례 제276호에 의거 온수동으로 개칭하였으며 이를 인용하여 온수역이라 명명됨.

역 곡
(카톨릭대)

조선시대에는 40리마다 역원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한양과 제물포사이 40리 지점에도 역원이 있었다. 이곳을 일명 역마골로 불리우다가 시승격과 함께 역곡으로 명명 되었다.

소 사
(서울신대)

소사라는 이름은 소새 또는 소쇠라고도 불리워졌으며 \'흰 모래\'라는 뜻의 한자말이다. 소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금이 있는 석별토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서 소사동은 "물이 잘 빠지는 조리터라는 의미이다." 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부천
(부천대입구)

부평군의 (부)자와 인천부의 (천)자를 따서 부천을 만들었으며 지역명에 부합한 부천역으로 명명함.

중 동

부천시의 가운데에 위치한다 하여 중동이 됨

송 내

솔안말로, 언덕산과 이 마을 초입에 해묵은 소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글자 그대로 소나무로 둘러쌓인 안동네였다.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소나무(松), 안은(內). 말은 마을의 준말로(洞). 이렇게 해서 송내동이 된 것이며, 지역명을 따라 송내역이라 하였음.

부 개

1924년 경기도 부천군 부내면 마분리로 편입된 이후, 1985년 인천시 조례에 의거, 부개동으로 개칭된 지역명을 따 역명을 제정함.

부 평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부평부라고 불려진데서 비롯된 이름으로, 원래 부평지역은 현 계산동이 그 중심지였으나 부평역이 생기면서 그 주변과 시정 지역을 부평이라 불리게 되었음.

벡 운

이곳에 역을 만들 때 지역 주민들이 역이름을 공모하여 백운이라 지음

동 암

지리적으로 이 지역에서 구리가 많이나와서 동암이라 불린데서 유래됨.

간 석

신설당시 염전지역으로 가칭 염빙역으로 하였으나 산업화의 변동으로 염전이 서서히 사라지고 간석동에 위치하고 있어 간석역으로 확정됨.

주 안
(인하대학교)

석바위 뒷산의 이름이 주안산이며, 이 산의 흙색이 붉고 산형태가 마치 기러기가 내려앉은 것 같다하여 주안산이 된데서 유래하였음

도 화

인근의 동명에서 유래했으며, 도마다리말(말이 지나는 다리마을)과 화동(벼마을)의 마을을 따서 정해진 이름이다.

제물포
(인천대앞)

조선조 초 이곳 인천 해안에 설치하였던 포구 이름이 제물포인데서 유래하였음.

도 원

옛날에 이곳에 복숭아밭이 많이 있었다고 한데서 유래됨.

동인천

1899년 유현(杻峴)역으로 영업개시 1926년 상인천(上仁川)역으로 역명개칭 1955년 동인천(東仁川)역으로 역명개칭

인 천

삼국시대때 미추홀이라 불렸으며, 고구려때 매소홀, 통일신라때 소성현, 고려때 경원군으로 불리다 조선시대 태종 13년에 인천이라는 지명을 사용한데서 유래하였음.

 

 
 

역 명

지 명 유 래

시 청

시청역에 위치한 태평로는1914년에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 사신을 맞던 태평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명(明)의 사신이 오면 이 길을 거쳐 태평관에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을지로입구

을지로입구역은 우리나라의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우던 이길은 1941년부터 황금정으로 고친적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입구에 위치하였기에 을지로입구로 명명되었다

을지로3가

을지로3가역은 우리나라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것이다.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적도 있다. 옛날 이길은 종로만큼 번화하지는 않았으나 관공서와 시전(市廛)이 들어서 있고 가내수공업이 성한 곳이었다.

을지로4가

을지로4가역은 우리나라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것이다.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적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중심부인4가에 위치하기에 을지로 4가역으로 명명되었다.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역은 1926년에 육상경기장, 야구장, 정구장을 완공하면서 경성운동장으로 불리어 졌다. 원래 육상경기장은 조선 500년간 장병들의 선발과무술 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다. 또한 야구장은 훈련도감의 군영인 하도감이 있었는데 개방후에는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가 훈련을 받았다.

신 당

신당동은 조선시대 신당리계(新堂里契)에서 비롯된 동명으로 신당(新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을가지고 있다. 신당이란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집을 말한다. 이일대에는 신당을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광희문 밖에 살았다고 한다.

상왕십리

상왕십리동명의 유래는 조선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라 전해오고 있다. 왕십리 윗쪽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상왕십리로 칭한 것이다.

왕십리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송도의 고려 도읍지를 옮기고자 당시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보라고 명하여 무학대사는 도읍지를 찾아 남으로 내려와 왕십리에서 지형을 살피던 중 때마침 도선대사의 변신인 노인이 "십리"를 더가서 도읍지를 찾으라는 가르침을 받아 그 노인 의 말대로 현재의 왕십리에서 10리를 더가 경복궁자리에 궁궐터를 잡았다는데 그뒤부터 무학 대사가 10리를 더갔다하여 왕십리라 불렀다함.

한양대

행당동의 동명은 갑오개혁(1894년)때부터 불러오고 있으며 현재의 행당국민학교 동쪽산 일대에 살구나무,은행나무가 많이심어져 있어서 행당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인근에 한양대학교가 있어 한양대로 명명하였다.

뚝 섬

성수동의 지명은 한성부(漢城腐)때 살꽃이들이라고 고지도(古地圖)에나타났다. 뚝섬이라 불리어오던 이곳은 옛부터 독도, 살꽃이벌이라 불리어졌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에서 오는 한강이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북쪽은 중량천이 서쪽에서 흐르는 한강과 합하는 중간에 있으므로 자연히 중앙으로 형성되어 졌다

성 수

전래에 의하면 성수라는 이름은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또한 마을사람들이 그 물을 마실 수가 있었으며 이곳에 성덕정이라는 큰 정자가 있었는데 이곳 정자에서 선비들이 흐르는 물을 마시며 풍류를 읊으며 노닐었다는 성스러운 물 즉聖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건대입구

화양동의 동(洞)명은 70년전까지 110번지 32호에 화양정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정자가 세워진 때는 세종14년(1432년)인데 이때부터 전해 내려오며 인근에 건국대학교가 있어서 건대입구역으로 명명되었다.

구 의

(광진구청)

구의동의동명은 1914년 4월1일 경기도 양주군의 아홉개의 우물이 있다고 해서 구정동이라 불리던 구정동과 산의동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구\'자와  \'의\'자를 따서 구의동이 된것이다.

강 변

(동서울터미널)

강변역은 한강제방 축조시 조성된 공한지 위에 세워진 역사로써 삼환기업(주)이 1978년 3월9일에 착공하여 2년 7개월 22일에걸친 공사끝에 1980년 10월 31일을 기하여 영업 개시하게 되었으며 한강변에 위치한다하여 "강변역"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성 내

송파구 신천동 1번지에 위치한 성내역은 역사 인근을 흐르는 성내천의 이름을 따서 성내역으로 명명 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잠 실

(송파구청)

잠실은 조선초에 이곳에 잠실을 두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잠실은 잠실도회의 준말로 조선초의 국립 양잠소였다.

신 천

신천역은 행정구역이 변경되기전에 신천동의 이름을따서 명명되었으며 송파구 잠실동에 위치하고 있다.

종합운동장

종합운동장역은 인근에 주경기장과실내체육관, 야구장, 수영장, 학생체육관등이 있어 종합운동장역으로 명명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송파구 잠실1동에 위치하고 있다.

삼 성

(무역센터)

삼성동은 신라성왕 10년(794년)에 창건된 사찰인 봉은사, 삼성동 동쪽 한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남쪽에 어린아이와 같이 생긴 바위와 무릉도,당나무를 파는 상점이 많은 닥점의 세마을이 합하여져 지어진 명칭이다.

선 릉

선정릉은 삼성동 135-4번지 65만평 부지에 조선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인 선릉과 제11대 중종을모신 정릉이 있어 흔히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리는데 능의 봉분이 세곳에 따로 떨어져 있다하여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역 삼

역촌의 세마을인 말죽거리,하방하교,상방하교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역삼리라 하였고, 도시개발및 인구증가로 역삼동이 되었다.

강 남

역삼동은역촌(驛村)의 세마을인 말죽거리,하방하교, 상방하교를 병합하여 역삼리 (驛三里)라 하였고 그 뜻을 따서 동리명칭으로 삼았다. 강남역은 강남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강남 으로 명명되었다.

교 대

(법원·검찰청)

교대역은인근에 서울교육대학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역이 위치한 瑞草洞은 예전에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했기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또한 법원, 검찰청이 있어 병기하여 부르고 있다.

서 초

서초역이위치한 정곡(鄭谷)과 왕촌(王村)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정씨와 왕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방 배

방배동 동명의 유래는 관악구와 서초구와의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의 방배라 한데서 유래한다. 또 일설에는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背) 모서리(方)란 뜻으로 방배동으로 불리어 졌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사 당

사당동은 옛날 이곳에 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 이곳 관악산기슭에는 사적 제247호로 지정된 백제 요지가 있다. 즉 이곳은 백제 중기 이후의 토기 생산지로 한강변의 백제 요지로는 유일한 곳이다.

낙성대

고려시대의 공신 강감찬장군의 출생지로 큰별이 떨어지던날 밤 태어났다는 전설에 따라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낙성대라 칭하였다.

서울대입구

(관악구청)

봉천동(奉天洞)은이 지역이 관악산 근처의 마을로서 산이 험하고 높다하여 생긴것이다. 경기도 시흥군동면 봉천리였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봉천동이라 불리웠다. 인근에 서울대학교와 관악구청이 있어 서울대입구(관악구청)역으로 명명되었다.

봉 천

봉천동(奉天洞)은 관악산 근처의 마을로 산이 험하고 높다하여 생긴 이름으로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 였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봉천동이라 하였다

신 림

지금의 신림4거리 일대는 옛날 \'서원말\'이 있던 마을로 서원말의 유래는 이곳에 서원정이라 는 정자가 있어 강감찬장군이 송도9개성을 왕래할때 자주 들렸다는 고사에서 유래 하였다. 지금의 신림동은 본시 서원리, 신림리, 난곡리로 나뉘어 있다가 1911년 4월 27일 경기도의 관내 동,리 통폐합의 신림리로 통합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신림동이 되었다.

신대방

신대방동은 360년전에 \'높은절\'과 번뎅이(번당리라고하는데 낙천군과 연령군의 묘를 모신 계동궁 연못이 있던곳)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로 편입되 면서 당시의 신갈리와 번대방리를 합하여 신대방으로 하였다.

구로공단

구로동은 옛부터 불리어오던 동명으로 나이많은 노인9명이 오래도록 장수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한국 수출산업공단이 인접하고 있어 구로공단역으로 명명되었다.

대림(구로구청)

1949. 8. 13 대통령령 159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편입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구로 리, 도림리, 전대방리를 편입, 구로동, 신대방동, 신도림동등으로 명칭변경 신대방동의 \'대\' 자와 신도림동의 \'림\'자를 따서 대림동으로 명하였고 1984. 5. 22 2호선 서측간 개통에 따라 대림역으로 명하였다.

신도림

도림동은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城)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設)이 있다. 또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 래

문래동은 광복후 문익점의 목화 전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이라고 하였다는 해석이 있고 또 일설은 학교와 관공서등이 들어서 자글이 온다는 뜻에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영등포구청

당산동은 이마을 언덕에 당(堂)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설에는마을 한가운데 에우뚝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를 보호 하였고 또 동제당(洞祭當)이 있어 당산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영등포구청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영등포구청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당 산

당산동은 이마을언덕에 당(堂)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를 보호 하였고 또 동제당(洞祭當)이 있어 당산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합 정

합정이라는 명칭은 옛날 양화나루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보통 양화도로 호칭한다. 조개우물로 불리워지는 우물이 있으므로 합정동의 이름이 생겼는데 후에 합정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홍대입구

동교동이란 동명은 세교라는 이름이 \'잔다리\'라고 하는데서 생겼으며 지형이 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윗잔다리\'라고 불렸던 것인데 인근에 홍익대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홍익대학교로 명명되었다.

신촌(지하)

신촌동의 명칭은처음 \'새터말\'이라고 부르던 곳인데 육전소례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 신촌리 계가 나타났다. 이곳은 조선초기에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지를 찾을 때 모악을 주산으로 해서 이곳을 서울로 삼자는 주장과 신하들의 여론에 따라 몸소 신촌동 일대를 돌아보고 갔다고 한다.

이 대

대흥동은 독은 구워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곳이라는 의미에서 독막 또는 독마을로 불리워 지던지방이었다. 1936년 4월 경성부의 지역을 확대하면서 대흥정으로 되니 이것이 대흥 이라는동명의 시초가 되었다. 인근에 이화여자대학교가 있어 이대역으로 명명되었다.

아 현

아현동은 조선 고종 31년 갑오경장때부터 기록으로 전해오며 남쪽에 만리현과 서북쪽의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을 잇는 이 고개가 작기때문에 \'애고개\' 즉 아현으로 부르던 것이 아(兒)가 아(阿)로 변하여 아현(阿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충정로
(경기대입구)

충정로란 지명은순국열사 중 최초이며 대표적인 인물인 민충정공(閔忠正公)의 이름을 영원히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충정로는 1946년 10월 11일부터부르게 된 동명이다.

용 답

용답동 동명은 용두동 지역과 답십리동 지역 일부가1975년 10월1일에 통합되어 이루어졌기때문에 머리글자인 용·답을 따서용답동이 되었다.

신 답

도림동은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城)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設)이 있다. 또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림천

도림동은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城)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設)이 있다. 또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천구청

양천 옛지명은 제차파의(구멍바위)로 서부한강변 가양동에 있는 암굴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려 충선왕2년에 비로서 양천(陽川)이라는 지명이 명명되어 작은 암초의 땅이름에서 보다 넓은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 전환되었다.

신정네거리

자연마을이었던 신기(新機:신트리)의 \'신\'(新)자와 은행정의 \'정\'(亭)자를 따서 신정리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에 속하였던 것을 갑오개혁시 양천현이 양천군으로 승격됨에 따라 오금리, 단산, 충청촌, 신기리, 은행정리등 여러 부락들을 합하여 양천군 장군소 면 은행리와 신시리로 하였다.

역 명

지 명 유 래

지 축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은 조선시대 종이를 만들던 마을인 지정리와 싸리나무가 많이 자생하 던 마을인 축리로 되어 있었던바, 일제시대를 접어들면서 양주군 신혈면으로 편입 되었다. 이것이 해방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 지정리의 \'지\'와 축리의 \'축\'을 합쳐 지축리로 되었던 것이다.

구파발

구파발이란 지명은 조선중기부터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파발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지역은 옛부터 경의가도의 덕수원이란 국립여관외에 주막과 대장간이 많았다.

연신내

옛날 이곳은 산골 이었지만 한성부의 관할구역으로서 연서역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연서역은 조선초에 영서역이라고 칭하였는데 인조반정때 상단부사 이서가 이곳에 늦게 합류했다하여 영서역이 연서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흔히 이곳을 연신내라고 하는 것은 연서천을 이처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불 광

불광동이란 지명은 이 근처에 바위와 절이 많았는데 그중 부처의 서광이 어린 불광사가 위치함으로 유래되었으며 이곳은 조선왕조때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수리봉 산밑에는 산돼지가 많이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입은 저서현이라는 고개도 있다.

녹 번

녹번이란 지명은 녹번이 고개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곳에서 홍제동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에서 약용으로 쓰이는 자연동인 <산골>이 나오므로 녹반현으로 부르게 되었다. 녹반현은 변음되어 녹번이 고개로 칭하게 되었는데 이 고개가 워낙 높고 험한데다가 숲이 우거져 혼자 넘어 다니기를 꺼렸다고 한다.

홍 제

홍제라는 지명은 고려때부터 이곳에 홍제원이 있었기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홍제원은 서울 근교의 국립여관일뿐 아니라 조선말까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그 규모가 컸다고 전해온다.

무악재

한양천도에 주요역할을 한 무학대사와 관련하여 무악현, 무악재라 칭하였으며 태조 3년 태조가 몸소 이곳에서 한양의 자세를 관찰한후 천도를 결심하였으며 또한 인왕산에 산세가 험준하여 호랑이가 많아 한양으로 입성할때 여러사람이 모여서 재를 넘었다 하여 모아재 라고도 하였다.

독립문

독립문역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이 세워져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문은 1897년 서재필 박사의 노력으로 영은문 대신 세운것으로 현재 사적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을 영천이라 부르게 된것은 악박골 약수가 유명했기 때문에 유래된것이다.

경복궁
(정부중앙청사)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한후 새왕조를 상징하는 궁전을 1395년 창건했던 초기에는 비교적 소규모였으나 태종, 세종때에 이르러 증축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250년 후인 1869년 고종때 이르러서야 왕권확립 차원에서 오늘날의 규모로 재건립되었다.

안 국

안국동은 조선초부터 이 일대를 안국방(安國坊)으로 정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이곳은 전일에 북촌(北村), 또는 \'웃대\'로 불리던 \'서울 중의 서울\'이었다. 조선초 성종때 월산대군의 풍월정이 있었으며, 조선말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식을 올린 안동별궁이 인근에 있었다.

종로3가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人定),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개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鐘樓)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 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 였다.

을지로3가

을지로는 우리나라 위인중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 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 적도 있다. 옛날 이 길은 종로 만큼 변화하지는 않았으나 관공서와 시전(市廛)이 들어서 있고 가내 수공업이 성한 곳이었다.

충무로

충무로는 임진왜란때 명장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건천동 즉 현재의 인현동1가 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로 지었다. 이곳은 남촌 또는 아랫대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사육신의 힌사람인 박팽년 외에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

동대입구

동대입구역이 위치한 장충동(奬忠洞)은 광무 4년(1900) 을미사변때 순국한 사람들을 위하여 단을 꾸며놓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에 설치된 장춘단은 일제가 폐지하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약 수

약수역은 1970년까지 약수동이란 행정구역 명칭이 있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약수동은 신당 3동 지역에 위장병에 특효가 있는 약수가 있어서 유래된 것이다. 전에는 이곳에서 한남동 으로 가려면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고개 이름을 버티고개라 칭했다.

금 호

금호동은 옛부터 대장간이 많았으므로 "무수막"또는 한자음으로 수철리( 水鐵里)라고 칭하 던것이 1936년부터 금호동이 되었다. 이곳은 지형관계로 농경지는 별로 없지만 옛부터 주민 들이 대장간, 복숭아 재배, 나루터 일에 종사하는 등 근검절약으로 생활수준이 높았던 곳이다.

옥 수

옥수동은 이곳에 \'옥정수\'라는 우물이 유명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바위틈에서 나온 이 우물은 그맛이 뛰어나 왕에게 바치기도 했는데 1960년 도로공사때 매몰되었다.

압구정

압구정역은 조선조 세조,성종때 권신 한명회가 세상일을 잊기 위해 강가의 갈매기를 벗삼아 지내겠다는 정자 이름이다. 전일의 이곳은 돛단배 떠있는 "동호"와 강북의 원근 풍경 그리고 닥나무가 무성한 저자도 등이 펼쳐져 한 폭의 그림같은 절경이었다고 한다.

신 사

신사동은 1914년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두 마을을 합칠때 각각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광주군 언주면에 속해 있을 당시에는 모래 벌판에 "새말" 나루터가 있던 한적한 곳이었으나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된 후 크게 변했다.

잠 원

잠원동은 조선초 잠실을 이곳에 두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며, 원래 이곳은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였는데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될때 강동구 잠실동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잠원동 이라한 것이다. 잠실은 잠실도회의 준말로서 조선초의 국립 양잠소였다.

고속터미널

반포동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들어선 것은 1976년 9월 1일로 이곳은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이곳을 반포동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개울이 구불구불 흐르기 때문에 서릿개 또는 蟠浦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盤浦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교 대
(법원·검찰청)

교대역은 인근에 서울교육대학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역이 위치한 서초동은 예전에 서리풀이 무성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남부터미널
(예술의 전당)

서초동에 위치한 화물터미널로 인해 화물터미널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물터미널이 이전하 고 이전장소에 남부시외버스 터미널이 들어와 남부터미널역으로 개명하였다. 서초동에는 정곡과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정씨와 왕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양 재

(서초구청)

양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교통, 우체역할을 하던 양재역이 이곳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이곳을 말죽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을 지나 가다 유생들이 팥죽을 급히 쑤어 바치자 말위에 탄채로 팥죽을 들었다는 것으로부터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매 봉

이곳은 본래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으나, 1963년 서울시에 편입 되었으며 독구리(지금의 도곡) 마을 사이에 약 95m정도의 매봉산이 위치하고 있다.

도 곡

도곡의 유래는 마을뒤에 매봉산이 둘러있고 물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돌부리라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곡이 되어, 지금의 도곡이라 명명하였다.

대 치

대치동 동명의 유래는 당시 자연부락 7,8개 마을중 큰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학여울

학여울이란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지점인 한강 갈대밭 부근의 옛지명이 대동여지도에는 鶴灘으로 \'탄\'을 한글로 풀어서 학여울이라 제정하였다.(여울:강이나 바다에서 얕거나 좁아 물살이 빠르고 세찬곳)

대 청

현지 일원동 677번지 일대로서 일제때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 확정때에 이지역에 있던 대청마을이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원리와 합병되었던 곳 으로 대청역은 합병되기전 옛고을 지명으로 명명되었다.

일 원

일원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이 있었으므로 일원이 변하여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또한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 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대모산에 가리워져 숨겨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일원동이라 불리어 졌으며 \'일원역\'은 이러한 유래가 있는 법적 동명을 사용했다.

수 서

이지역의 서쪽에 한강물이흐른다하여 수서리라 하였다하며 예전부터 일원동과 같이 변천 해 왔다. 또한 이곳은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방번)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와 전주 이씨 장의 공파 묘소 700여기가 있어 궁말 또는궁촌이라 불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지방 유형 문화재 제 48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역 명

지 명 유 래

당고개

예로부터 당고개(일명:덕능고개)는 산짐승이 많아 나그네들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돌을 들고 넘었으며 그돌을 쌓아둔 서낭당 터가 이곳에 있어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서낭제를 지낸다.

상 계

불암산과 수락산의 골짜기에서 생겨난 \'한천\'이 중랑천으로 이어지고 이 한천의 계곡 윗부분을 상계라 일컫고 하부를 하계라 한데서 유래됨

노 원

노원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의 국립여관격인 원(院)터가 있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하며, 서울 근교에서는 이와같은 홍제원, 이태원등이 있었다고 한다.

창 동

창동이라는 지명은 본래 이지역 일대가 넓은 들판으로서 조선시대에 임금님께 곡식을 진상하던 곡물창고가 있었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쌍 문

쌍문이란 지명유래는 쌍갈래길에 이문이란 일종의 방범초소가 있어 \'쌍갈무늬\'라고 불리던 것이 변음된 것이라고 한다.

수 유

수유리라는 지명은 인근의 우이천이 장마철이되면 흔히 물이 넘쳐 물결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여 수유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미 아

\'미아\'라는 지명은 고려말기부터 부근 야산의 언덕에 있던 마을의 모습을 넓을 미(彌)와 언덕을 뜻하는 아(阿)를 합하여 부르던 것으로 원래는 삼각산 끝의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삼양동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미아삼거리

\'미아삼거리\'라는 명칭은 장위동과 종암동 그리고 돈암동으로 갈라지는 세갈래 길이 나뉘어 지는 지형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밤나무숲이 많아 밤나무골 월곡 (月谷)이라는 지명이 전해지기도 한다.

길 음

길음(吉音)이라는 지명은 일명 기레미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말은 본래 이 지역을 통과하는 정릉천이 흐르는 계곡마다 그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좋은 노래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지금은 그 음을 따서 길음동으로 불려지고 있다.

성신여대입구
(돈암)

돈암동이란 지명은 되너머고개 즉 돈암현(敦岩峴)이 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현재는 미아리 고개라고 불리고 있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되놈\'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기 때문에 되너미고개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한성대입구
(삼선교)

삼선교(三仙橋)라는 지명은 이 지역 남쪽의 옥녀봉 봉우리에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와 옥녀가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오늘에까지 전래되고 있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혜 화

혜화라는 지명은 근세 조선의 도성8대문중의 하나로서 혜화문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혜화문이 위치했던 숲의 무성한 고개를 \'동소문고개\'라 했다 해서 동소문으로 불리어 졌었다고 한다.

동대문

동대문은 흥인지문의 속칭으로 도성 4대문 중의 하나이다. 보물 1호로 지정된 동대문은 조선초 태조때 세워졌지만 조선말 고종때에 완전히 해체하여 바닥을 높인다음에 건축한 것이다. 이 문을 특별히 옹성으로 쌓은것은 이곳의 지대가 낮아 외적을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대문운동장

조선시대 군졸들이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고 일제때는 육상경기장, 야구장,정구장이 완공되어 경성운동장으로 불리어졌고 해방후 경마장의 시초가 된 곳이며 또한 광희문 (시구 문)이 인접해있다.

충무로

충무로는 임진왜란때 명장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건천동 즉 현재의 인현동1가 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로 지었다. 이곳은 남촌 또는 아랫대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사육신의 힌사람인 박팽년 외에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

명 동

명동은 갑오개혁(1894년)때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조선초부터 이곳을 명례방이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유행의 1번지로 일컫는 이곳은 한때 다방을 중심으로 \'예술의 거리\'로 알려져 있다.

회 현
(남대문시장)

회현동은 조선말 고종때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전일의 호현동(好賢洞)이 반음되어 유래된 것으로 이곳에는 조선왕조때 정광필, 김상헌 형제등의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회현동(會賢洞)이라 불리어진 것이다.

서울역

광무4년(1900년)에 남대문역으로 출발한 서울역은 우리나라 철도의 대표적인 역으로 주요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1923년 경성역으로 개칭되었으나 광복후 1947년에 서울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서울역사는 1925년에 지어진 건물로 서울의 관문이다

숙대입구
(갈월)

숙대입구역이 위치한 갈월동은 갑오개혁때 붙여진 명칭으로 칡이 무성하여 유래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산줄기가 불룩하게 나와 있어 \'부룩배기\'라고도 불린다.

삼각지

현재 삼각지역이 세워진 곳은 옛날 한강, 이태원, 서울역방면으로 도로가 나있어 땅모양이 세모졌다고 하여 삼각지로 불리운 것이다. 이곳은 한강로1가 지역이지만 조선 중기 이후 에는 둔지방이라 칭해왔다.

신용산

용산의 지명은 백제 기루왕때 한강에서 두마리 용이 나타나 유래되었다는 설과 산줄기가 마치 용처럼 구불구불 뻗어 나갔기 때문에 불리어 졌다는 설도 있다. 서울의 경우 무악에서 부터 시작된 산줄기는 남쪽의 약현과 만리현을 지나 한강변에 와서 머리를 든 용과 같은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촌

이촌동은 옛날부터 중지도와 상변에 살던 사람들이 큰 비만 오면 대피했기 때문에 이촌동 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한 1914년에 신촌리, 사촌리의 두 마을을 합쳤기 때문에 이촌동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동 작

조선 왕조때 서울과 수원이남 지방을 잇던 동재기 나루 즉, 동작진에서 유래됨.

총신대입구
(이수)

총신대입구(이수)역은 이곳에 이수교가 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이수교는 배물다리를 한자음으로 고친 것으로 이 다리 남쪽에 배나무골이 있고 동쪽에는 한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사 당

사당동은 옛날 이곳에 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 즉 이곳은 백제 중기 이후의 토기 생산지로 한강변의 백제요지로는 유일한 곳이다.

남태령

남태령은 서울과 삼남(호남,영남,충남)을 잇는 길목이었다. 관악산의 북동쪽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개의 남서울쪽에는 우면산 정상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남태령의 이름이 \'여우고개\'로 불리고 있을때 조선시대 정조는 이 고개를 넘어 수원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 했다고 함. 정조가 이 고개를 넘을때 시종들에게 이 고개 이름을 물었을때 남태령이라고 답했었다고 함. 그후 이 고개를 남태령이라고 불렀다.

 

 

 

역 명

지 명 유 래

방 화

산의 형국이 꽃피는 모습과 같은 개화산 옆에 발달한 동네라는 뜻으로 생겨난 동명 에서 유래

개화산

산의 모양이 꽃피는 형국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개화동의 면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높이 132m의 개화산의 영향으로 유래됨

김포공항

김포공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송 정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울창했고 이곳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소나무로 된 정자가 있으므로 그 정자 이름을 송정이라 하고 일대를 송정리라 부른데서 유래

마 곡

옛날에 이 동네에 삼(麻)을 많이 심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발 산

내·외발산동이 경계를 이루는 해발 72.3m로 수명산이 마치 밥주발을 엎어놓은 모습이라 하여 발산이라 불림

우장산

우장산은 내발산동과 화곡 제5동에 걸쳐 있는 높이 98m의 산으로 옛날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산으로도 유명하다. 우장산이란 이름은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즉시 비가 내리므로 반드시 우장을 준비하여 기우제에 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 곡

예로부터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계곡에서 황금물결치는 풍경을 이루었다고 하여 유래됨

까치산

봉제산(매봉산) 일대에는 예로부터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으나 화곡동 개발계획에따라 봉제산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봉제산 일대의 까치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비교적 늦게 개발된 이곳 까치산(해발 73.5m)으로 몰려들게 되어 까치산이라는 산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신 정

자연마을이었던 신기(新幾 : 신트리)의 신(新)자와 은행정의 정(亭)자를 따서 신정리라 한데서 유래

목 동

목동의 동명은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에서 비롯되었으며 양천군 남산면의 작은 부락인 달기리, 엄지리, 남아리, 모새미, 마장안을 합쳐 외목동, 내목동, 월촌리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牧洞(목동)이라 하였고 점차 표기가 달라져木洞(목동)으로 불려졌다

오목교

조선초 한강의 3대 나루터에 속했던 양화나루를 건너 경인지역으로 통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했던 안양천 위에 세워졌던 다리이며, 당시 오목내라 불리던 지금의 안양천 위에 다리가 세워지면서 오목교(梧木橋)라 불리게 됨

양 평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설치되어 서민들의 한강도강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 근처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불리어진 것으로 楊花津의 楊자와 벌坪자를 따서 "양평"이라 명명됨

영등포구청

영등포구청역은 인근에 영등포구청이 있어 명명되었고, 영등포란 명칭은 조선시대에 있는 성황당에서 영등포굿을 했던 관계로 영등포라는 이름이 불리어지게 되었다.

영등포시장

1936년 일제칙령에 의거 영등포시장이 형성되었고, 1967년 당시 시장의 명에 의거 현대화 상설시장으로 변모한 이래 현재에 이름

신 길

샛강을 경계로 여의도와 마주보고 있는 신길동은 조선시대에 서울로 들어오는 영등포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신길동의 이름은 조선시대 포구로서 신기라고 불려진 마을이 새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여의도

예로부터 라의주로 불렸던 섬으로 홍수에 잠길 때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에 양말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어 부근 사람들이 그것을 "나의 섬", "너의 섬"하고 지칭하던 데에서 이것이 한자말 여의도(汝矣島)로 호칭됨

여의나루

옛날 마포와 여의도를 잇는 나루터가 마포와 여의도 동쪽에 형성되어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나 한강다리 건설로 없어졌던 여의나루터에 1986년 유람선 선착장이 개장되었다. 여의나루 역명은 여의나루터 옛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 포

우리말 삼개로 불리어지는 포구 이름 마포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삼(麻)개(浦)의 한자음에서 따옴

공 덕

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덕",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 "큰덕이", "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

애오개

애오개는 "작은 고개" 또는 어린애와 관련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사이에 있는 작은 고개라는 의미에서 아기고개, 아이고개, 애고개, 애우개로 호칭되었음

충정로

충정로는 순국선열의 대표인물인 충정공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하여 붙였던 것으로 충정로는 1946년 10월 1일부터 부르게 되었다.

서대문

중국과 통하는 의주로의 관문으로 도성 서쪽의 정문이다. 서대문의 정식명칭은 돈의문이며 새로운 문이란 뜻으로 새 문, 신문이라고도 불림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정문으로써 당초 1359년(태조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7년)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바꾸었다.

종로3가

조선시대에 인정과 파루라고하여 아침, 저녁 사대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종소리로 알렸는데 그 종루가 있는 거리의 뜻으로 종로라 불림

을지로4가

을지로는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 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 길은 1914년부터는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 적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중심부로 을지로4가 명명되었다.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東大門運動場)은 1926년에 육상경기장, 야구장, 정구장을 완공하면서 경성운동장으로 불려졌다. 원래 육상경기장은 조선 500년간 정병들의 선발과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고 또한 야구장은 훈련도감의 군영인 하도감이 있었는데 개항 후에는 이곳에서 별기군이란 신식군대가 훈련을 받았다.

청 구

청구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하철 역명을 제정

신금호

금호의 옛말은 무쇠막(무수막)으로 조선시대 한자음으로 수철리로 불리다 금호동이라 바뀌었다.

행 당

행당동 동명은 갑오개혁(1894)부터 행당리동으로 칭하여 내려온 것으로, 행당초등학교 동쪽산 일대에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행당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왕십리

왕십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往十里)라 전해오고 있다.

마 장

조선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이곳에 있어서 마장동이라 불리게 됨

답십리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이 곳을 밟았다 하여 답십리라 했다는 구전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동대문에서 걸어서 십리에 위치한 곳에서 유래됨

장한평

신라시대에 장한성(長漢城)이 축조되어 인근지역이 장한벌 또는 장한평으로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장안평으로 잘못 불려져 왔던것을 삼국시대부터 불리워진 이 지역의 옛 지명으로 다시 찾은 것임

군 자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리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차산

광진구 능동 일대에 있는 아차산을 고유지명으로 아차산과 아차성은 예로부터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과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광나루

도선장으로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너분나루라고 불려졌다. 옛부터 강원·충청 등지의 광물, 목재 등의 주요 운송로로 이용되었고 행인과 상인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충지로 고려조에는 이곳에 수참을 설치하였음. 1936년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의 기능을 잃게 됨

천 호

원래 지명은 곡교리로 옛날부터 이 곳이 인가 수 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동명을 따온 것이다.

강 동

강동역의 유래는 인근에 강동구청이 자리하는 관계로 구를 대표하는 의미에서 쓰여졌다. 강동구는 1979년 10월 강남구가 분구되면서 신설되었다.

길 동

마을로부터 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사태 등의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은 길한 곳이라 하여 길동이라 불렸다는 설과 마을의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하여 기리울이라 불리던 마을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굽은다리

당말이란 마을과 벽동이란 마을을 잇는 다리가 굽어있어 굽은다리라 불렀다. 두 마을을 합하여 굽은다리의 이름을 따서 곡교리라 하였다.

명 일

고려 성종 11년(994년)에 이곳에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서 명일원을 두어 여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해 주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명일원, 원텃골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고 덕

려말 형조참의 이양중이 태조의 조선건국을 반대하고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벼슬도 거절하는 등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 받아 고덕리 또는 고덕마을로 불려지게 되었다.

상일동

상일동과 하일동의 사이를 흐르는 내(川)의 위쪽이므로 이름을 따서 상일동이라 칭함

둔촌동

광주 이씨의 시조이며 고려말의 은사인 이집이 일시 거주한 사실이 있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둔촌동이라 하였다.

올림픽공원

88올림픽을 계기로 형성된 올림픽공원과 올림픽기자촌 및 선수촌 아파트를 배경으로 역사가 위치함으로써 명명됨

방 이

마을의 지형이 아늑하고 개나리꽃이 많이 핀다고 하여 방잇골로 불리다가 한자음으로 방이동이라 고쳐진 것이다.

오 금

일찍이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곳의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 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후부터 오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설이 있다.

개 롱

조선조 이조때 임경업장군이 갑박산에서 고리궤짝을 주어와서 현재 가락2동 개롱 근린공원 위치에서 고리궤짝을 열어보니 투구와 갑옷이 나왔다하여 개롱이라 전해옴

거 여

이 지역이 본래 경기도 광주군 중래면의 일부로서 거암이란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검이, 겜리라 불리다가 경기도 구역행정에 따라 잔버드리, 개롱리, 뒷말을 병합하여 거여라 부름

마 천

이 지역에 있는 마산의 이름을 따서 마천리라 하였던 데서 유래된다는 설과 조선조 임경업 장군이 마산(천마산)을 가는 도중 백마를 얻어 거여동을 지나다가 백마에 물을 먹여 백마물이란 곳이 있고, 아무리 가뭄이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여 馬川이라 하였다는 설이있음

 

 

 

역 명

지 명 유 래

응 암

마을 뒤 백련산 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매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매바위골이라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 곳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장막을 치고 포수들이 기거하던 곳이 여러 곳 있었으며 궁중에서 나와 사냥터로 삼았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역 촌

역촌동은 조선조 신하들이 장거리 여행시 말이 쉬어 갈 수 있는 역(延曙驛)이 있어 역말이라 불리어 여기서 역촌이 유래되었고, 옛 지명으로는 마방촌, 토정리라 불리었다.

불 광

불광이라는 지명은 글자 그대로 이 근처에 바위와 대소사찰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독바위

독박굴은 독바위굴의 줄임말로 독바위굴의 바위가 독(항아리)과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과, 유달리 바위가 많아 숨기 편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인조반정 당시 일등공신이었던 원두표 장군이 거사 직전까지 숨어 지내던 덕바위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신내

연신내라는 말은 연(延)시내(川) 즉, 延川(延曙川)의 우리말 풀이가 변한 것이라 전하여지고 일설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반정 당시 능양군(인조)이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라 하여 연신내(延臣川)라 부르게 되었다.

구 산

경기도와 도경계를 이루는 뒷산의 산 모양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 옛부터 그 아래 마을을 구산동이라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

새 절

새절은 신사의 한글 명칭으로 새절은 언제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새절이 있었으므로 해서 유래된 명칭이다.

증 산

증산동 뒤에 있는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같이 생겼으므로 시루메라 하며, 시루는 물이 새어 좋지 않다하여 아름다운 비단의 뜻을 빌어서 증산(繒山)이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 색

지역적으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수색동은 예로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으로 물치, 무르치라는 우리말에서 음이 변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수색, 수생리로 표기하였다.

성 산

부근에 산들이 성처럼 둘러져 있어 우리말로 "성메" 또는 "성미"라 부르던 성산(城山)이 있는데서 연유되었다.

마포구청

마포는 우리말 "삼개"로 불리워지는 포구이름 麻浦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사 인근에 마포구청이 위치하고 있어 마포구청역이라 명명

망 원

망원동은 효령대군이 지은 정자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장이었으며, 성종5년(1484년) 월산대군이 이름지은 한강변의 명소 망원정이 있었던 데서 유래됨.

합 정

합정동은 옛날 양화나루 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 보통 양화도라고 호칭하였고, 조개우물로 불리어지는 우물이 있다하여 합정(蛤井)이라 하다가 후에 합정(合井)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음.

상 수

상수동의 옛 지명은 서강방 수일리계였는데 한일합방 후 서강면 상수일리가 되었다가 상수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상수동이란 동명은 강가의 마을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흥창

조선시대 경기와 3남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수미를 쌓아 두었었다가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하던 곳으로 그 규모는 1년에 쌀 19,000석, 대두 18,000석을 보관할 정도의 대규모 창고가 있었다 하여 광흥창이라 하였다.

대 흥

대흥동은 "동막하리"라 하여 인접한 용강동과 함께 독을 구워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지역으로 "독마을"로 불려졌다. 일제시대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들어가게 되면서 옹막, 옹리의 지명이 동막리로 변경되기도 했다. 1936년 경성부의 대흥정이 되었으며 그 후 몇 차례 행정구역의 통폐합을 거쳐 1946년10월 오늘의 대흥동이 되었다.

공 덕

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덕",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 "큰덕이", "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

효창공원

백범로와 효창공원 길의 교차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역은 인근에 효창공원(문화재 사적 지정 330호)이 자리잡고 있으며 공원 내에는 김구 선생묘, 삼의사 묘(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및 임정요인 묘(이동녕, 차이석, 조성환)가 있어 사적지로 유서가 깃들인 곳이다.

삼각지

한강, 이태원, 서울역 방면으로 나있는 도로의 모양이 세모졌다는데서 유래되었다.

녹사평

조선시대 고종까지만 하더라도 수림과 잡초가 무성하여 인가가 희소하던 곳이라 해서 녹사평(綠莎坪)이라 불리어진 것에서 유래.

이태원

조선시대 때 이태원(梨泰院)이란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는데 역원으로서의 이태원은 오래 전에 없어지고 그 명칭을 가진 동네가 용산구 동북쪽에 자리잡아 현재의 이태원동이 되었다.

한강진

한강진터가 있던 곳에서 유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제천정(濟川亭)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싸운 곳.

버티고개

한남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다산로(茶山路)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하는데 옛날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 하며, 도둑을 쫓았으므로 번티(番峙)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약 수

버티고개에 있는 약수(藥水 : 위장병에 특효가 있음)의 이름을 딴 약수동의 지명에서 유래.

청 구

청구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하철 역명으로 제정.

신 당

조선 영조27년(1751년)에 반포된 수성책자『도성 3군무 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 신당리계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 남서 두모방(성외)왕십리계의 신당리동으로 되었는데 신당동은 神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과 함께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 집을 말하며 광희문 밖에 위치한 이곳은 많은 무당들이 모여 살아 무당촌을 이루어 新堂이라는 명칭이 유래됨.

동묘앞

중국의 고전인 삼국지에 나오는 명장 관우의 사당(보물 제142호)으로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이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가 꿈에 관우를 현몽한 후 왜병을 격퇴했다고 하여 명의 신종이 난(亂) 후에 비용과 친필로 쓴 현액을 보내와 선조때(1601년) 창건하였는데 그 후 영조15년(1736년)에 중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 신

창신동은 조선초(태조5년 1396년)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5부 52방 가운데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부터 "창신동"이라 하였고, 1943년 구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경성부 동부출장소 관할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에 동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음.

보 문

보문동3가 168번지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동은 1949년 8월 대통령 제159호로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할 때 신설동의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설치된 것으로 당시 관내에 있는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을 제정한 것이다.

안 암

큰 바위가 있어 편히 쉴만하고 그 바위 이름을 "앉일바위"라 하였으며, 그것을 한자로 안암(安岩)으로 옮겨 쓴 것에서 유래됨.

고려대

고려대학교위 부지위에 역이 위치하여 대학명을 역명으로 사용. 종암동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鼓)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자로 종암(鍾岩)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월 곡

하월곡동에 있는 산의 형세가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그 산에 연해 있는 마을을 다릿굴(골) 월곡(月谷)이라 부른데서 연유되었다.

상월곡

상월곡동은 천장산의 형세가 마치 반달과 같다하여 그 산에 접해있는 마을을 "다릿굴(골)"이라 부르는데서 유래, 이중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역을 "웃다릿골(上月谷里), 아래 지역을 아랫다릿골(下月谷里)"이라 불렀는데 1894년 갑오개혁때 월곡상리로 명명. 이후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상월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름.

돌곶이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의 한맥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팥떡 경단을 꼬지에 꿰어 놓은 것 같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른데서 유래하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석관동(石串洞)이라 함.

석 계

석계역은 석관동(石串洞)과 월계동(月溪洞)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여 석관동의 첫 글자인 석(石)자와 월계동의 두 번째 글자인 계(溪)자를 조합하여 제정.

태릉입구

태릉은 불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적 201호로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임.(그 북쪽에는 조선 명종과 원순왕후의 능침인 태강릉이 있음)

화랑대

인근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를 상징하는 화랑대를 역명으로 제정(국철 경춘선 화랑대역이 있음)

봉화산

봉화산은 일명 봉우재라고 불리는데 1963.1.1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됨. 봉화산이라는 이름에서 봉화와 관련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이 곳은 북쪽의 한이산으로부터 목멱산(남산)으로 전달하는 아차산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지난 1994.11월 봉수대를 복원하였음.

 

 

 

 

역 명

지 명 유 래

장 암

장암동은 원래 둔야면 장자리(長者理), 오암리(烏岩理), 동막리(東幕理)를 1965년에 시둔면 장암리로 부르다가 1964년에 장암동으로 개칭되면서 오늘날까지 동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봉산

도봉산역은 서울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위치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가 1914년 4월 우리나라의 부, 군, 면을 폐합할 당시 도봉산 아래의 다락원, 서말원, 무수원 등 마을을 합하면서부터 도봉 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했다.

수락산

상계동의 북쪽으로 의정부시와 경기도 남양주시 경계에 있는 수락산은 도봉산과 마주하며 서울 북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산은 사암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해발 638m로 수목은 울창하지 않으나 산세가 웅장할 뿐아니라 계곡이 깊고 수려하며 산 전체가 석벽과 암반으로 도처에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마 들

예전 상계동에 역참기지가 있어 말들을 들에 놓아 키웠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상계동 일대가 삼밭이어서 순우리말인 마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노 원

조선시대 육상교통의 수단인 역점으로서 노원역이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갈대만 무성하고 인가가 없어서 행인이 몹시 곤란을 당하여 나라에서 원을 세워 노원이라 하였다.

중 계

자연부락들이 도봉구의 중앙을 흐르는 한내(漢川)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가운데 中자와 시내 溪자를 붙여 중계라 했음.

하 계

하계동은 자연부락들이 도봉구의 중앙을 흐르는 한내(漢川)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공 릉

1963.1.1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 서쪽에 공덕리, 동쪽에 태릉, 강릉이 있었는데 주민들의 합의에 의하여 공덕리의 孔자와 태릉의 陵자를 따서 공릉동이라는 지명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태릉입구

태릉은 조선 제 11대왕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능으로서 사적 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먹 골

먹골은 조선시대 먹을 제조하여 붙여진 묵동이라는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표기한 것이라고도 하며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을 이 마을의 이름으로 붙여야 학문이 발달할 것이라는 필기설에 따라 정해졌다는 설이 있다.

중 화

중화동은 예로부터 봉화산 아래 자연부락의 하나인 가운데 마을(中里)과 아랫마을(下里)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로 칭하였는데 1963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 주민의 건의로 "下"자 대신 화목을 도모한다는 의미로 "和"자를 넣자는 뜻에 따라 중화동으로 명명되었다.

상 봉

상봉동은 조선시대부터 유래하는 上里와 鳳凰洞의 자연부락을 통합하여 上里의 上자와 鳳凰洞의 鳳자를 따서 上鳳里라고 붙인데서 유래한다.

면 목

면목은 조선시대 이곳에 말목장이 위치한다하여 지명되었으며 1945년 8월 15일부터 중계, 하계, 면목리 등이 합해져 면목동이 되었다.

사가정

아차산 벌판에 거주했던 조선시대의 학자인 서거정(세종 2년∼성종19년)의 호를 따서 사가정길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용마산

용마산(348M)은 경기도 남양주군의 구리시와의 경계를 이루는 아차산의 최고봉이다. 북쪽의 북한산, 서쪽의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과 함께 서울의 외사산을 형성하고 있는 이산은 예전에 용마가 나왔다하여 용마산이라 불리워졌다.

중 곡

동네가 능말(능동)과 면목동의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므로 "가운데말", "간데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이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군 자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리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린이대공원

인근에 어린이 대자연 공원인 어린이대공원(\'73.5.5)이 자리하고 있어 어린이대공원이라 지칭되었다.

건대입구

역사 인근에 건국대학교가 위치함.

뚝섬유원지

옛날 살곶이들이라고 하였으나 80년대 한강종합개발계획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연면적 547,000㎡(16만6천여평), 연인원 200만명의 시민이 이용하고 있는 뚝섬유원지가 있어 명명되었다.

청 담

한강연안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현재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 맑은 못이 있었으며 현 134번지 일대의 한강변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때 청담리라 불리어졌고 이후 서울시에 편입되어 청담동으로 지칭.

강남구청

청담·논현·삼성 등 3개동의 경계부근(삼성동 8번지)에 위치하고 인근 강남구청으로 인하여 강남구청역으로 명명.

학 동

학동은 마을모양이 학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학실, 학곡, 학곡동으로 지칭되었다.

논 현

논고개라는 고개의 지명을 본떠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현재 논현동에 위치하고 있는 천주교회 위치가 마루턱이 높은 고개였으며, 또한 강남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로 벌판이 펼쳐져 논밭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논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반 포

반포라는 지명은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 즉 반포(蟠浦)라 하다가 변음되어 반포(盤浦)로 칭함. 일설에는 이곳이 상습 침수지역이므로 반포라고도 함.

고속터미널

1976.9.1일 강북에서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이 이전하였고 3호선 고속버스터미널과 환승역으로 동일 역명 제정.

내 방

방배동은 관악구와 서초구의 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의 방배(方背)라 한데서 연유하며, 일설에는 동네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背) 모서리(方)란 뜻으로 방배동으로 불리워 짐. 현재 운영중인 지하철 2호선 방배역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방배동 안쪽에(內) 자리한다고 하여 내방이라 제정.

이 수

이수(梨水)란 옛날 배나무를 많이 재배하던 마을 동쪽에 한강물이 흐른다고 하여 유래되었음.

남 성

남성동의 유래는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이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 능행시 행차길인 현재의 사당동 일대가 예전에 여시고개, 살피재 등으로 불리었으나 임금의 행차길이 이물스러운 지명이라 하여 여시고개를 남쪽의 큰 재라하여 남태령으로 고쳐부를 때 태령의 재 성(城)자를 따서 남성동이라 일컬었음.

숭실대입구
(살피재)

살피재 고개는 상도동과 봉천동 고개로서,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지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짐.

상 도

옛날 이곳에 상여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상투골 이라고 칭하던 것에서 유래됨.

장승배기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리(理)수를 적어 10리나 1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 역할을 하는 기능도 수행했고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의 샤머니즘이기도 했다. 흔히 장승이 서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유래는 조선중기 정조가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수원의 묘소를 참배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당시 나무숲이 우거진 이 곳에서 쉬기란 적적하기 그지없어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고 함.

신대방삼거리

조선시대는 경기도 금천현 하북면 번대방리(樊大方理)였고 \'50.3.15일 신대방동으로 개명. 신대방은 대방동 접경의 새로 생긴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신대방동, 대방동, 상도3동의 삼거리에 위치하고 널리 알려진 지역명칭임.

보라매

보라매란 순우리말로 생후 일년이내의 사냥을 위해 길들여진 매를 말하는데, 공군사관학교의 상징새가 보라매임. 보라매공원은 공군사관학교가 자리잡고 있던 곳으로 공군사관학교가 청주로 이전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면서 공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을 보라매공원으로 하였음.

신 풍

샛강을 경계로 여의도와 마주보고 있는 신길동은 조선시대에 영등포 나룻터가 있던 곳으로 신풍은 수원가도 이서(以西)의 지역을 관할하는 옛 동명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 림

신대방동의 "대"자와 신도림동의 "림"자를 따서 대림동으로 명함.

남구로

본래 구루지 마을과 각만이 마을, 새말, 주막거리, 옻우물약수터 등의 마을이 모여 형성되었으며, 옛날에 이곳에 아홉명의 노인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에서 구로라는 지명이 유래함.

가리봉

이 마을 주위 작은 산봉우리가 이루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데서 붙여졌다는 유래와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또는 갈라졌다는 뜻인 "가리"에서 유래가 있다.

철 산

뒷산이 쇠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리(牛頭里)라고 불리다가 쇠와 철은 소리는 다르게 나지만 같은 뜻이기 때문에 철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광 명

광명시는 경기도의 남서부 중앙에 위치한 수도 서울의 인접도시로 광명이라는 명칭은 다른 곳 보다 해와 달이 잘 비추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천 왕

인근 주산이 굴봉이고 굴봉산 골짜기에 천왕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 아래 마을이라는 뜻에서 천왕골로 불려진데서 역명이 유래됨.

온 수

조선왕조 세종20년(1438년)경 서울 양천구와 부천 소사구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이곳 부평도호부 일대에서 더운물이 솟아 나온 기록이 있어 온수골이라 칭하다가 1963년 서울시 조례 제276호에 의거 온수동으로 개칭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음.

역 명

지 명 유 래

암 사

암사동 산 23번지 일대에 신라시대에 절이 9개나 있어 구암사라 하였고 속칭 바위절이라 하였으므로 그 한자명으로 암사리라 한데서 연유하였음.

천 호

원래 지명은 곡교리로 이곳이 인가 수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동명을 따온 것이다.

강동구청

조선시대 고종32년 풍납토성 안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성안말, 안말 또는 성내처로 부렸던 곳으로 현재의 이름은 강동구청이 역세권에 위치하고 있어 결정됨.

몽촌토성

고대 삼한 때부터 이곳을 곰말이라고 했는데 곰말은 고어로 큰마을을 뜻하며 한자음으로 고쳐서 몽촌이 되었고 3세기경부터 5세기말까지 북쪽으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해 자연 구릉 상에 방어용 토성을 축성하여 현재까지 올림픽공원 내에 사적 제297호로 보존되고 있으며 역세권 인근에 위치하여 몽촌토성역이라 명명됨.

잠 실

조선초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실이라 불리어졌다.

석 촌

병자호란때 조선을 침입한 청군이 진지를 만들기 위해 돌을 옮겨다 놓아 이곳에 돌이 많게 되어 주민들은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돌마리」라고 불렀다. 이것이 한자음으로 「석촌」으로 표기되고 현재의 석촌동이 되었다.

송 파

예로부터 삼남(三南)에서 올라오는 물산의 집산지로 조선조 5대향시중의 하나로 교통의 요충지였던 송파는 언덕 위에 소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산 좋고 물 맑은 강변마을이었으며 이로부터"소나무가 푸르른 언덕"이라는 뜻의 松坡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가락시장

가락동은 조선시대 가락골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마을이 있어 자연부락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을축년(1925년) 대홍수때 한강이 범람하여 송파동 일대가 침수되자 그곳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가히 살 만한 땅」즉 좋은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농수산물 종합도매시장이 1985.6.1 개장되어 서울시민에 신선한 야채와 과일, 어물, 축산물을 공급하고 있다.

문 정

조선 중기 병자호란때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가시다가 이곳 우물에서 물을 드시고 물맛이 매우 좋고 文씨가 많이 산다고 하여 문씨의 文자와 우물의 井자를 합하여 文井이라 하였다.

장 지

장지동은 잔버들이 많은 지역이라 잔버드리라는 설과 또는 마을이 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복 정

복정동의 명칭은 복우물(福井)에서 유래한다. 구전에 의하면 큰 우물이 있었던 곳은 현 정수장 뒤인데 안골로 가는 길, 또는 길과 밭 사이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영장산 복정동쪽 상봉에 있는 칠성대의 감로천이 우물이라고 한다.

산 성

남한산성은 백제시조 온조왕부터 13대 근초고왕 26년까지 도읍지였으며 광범위한 성곽은 이조 광해군 13년 외부침입에 대비하여 증축, 인조 4년에 완공하였으며, 인조대왕이 피신 45일간 병자호란을 겪은 곳이다. \'98. 10.1 "남한산성"에서 "산성"으로 역명 변경.

남한산성입구

남한산성은 백제시조 온조왕부터 13대 근초고왕 26년까지 도읍지였으며 광범위한 성곽은 이조 광해군 13년 외부침입에 대비하여 증축, 인조 4년에 완공하였으며, 인조대왕이 피신 45일간 병자호란을 겪은 곳이다. 역세권 내에 수원지법 성남지원 및 검찰청사가 있어 이용승객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1998.10.1부로 남한산성입구(성남법원, 검찰청)역으로 병기하게 됨.

단대오거리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초면 단대동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은행정이 논골, 금광리를 병합하여 단대리라 하고 중부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시 승격 당시 탄리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그 붉은 고개 밑이 되므로 단대골, 또는 던데, 단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 흥

백제시대(기원 18년) 시조 온조왕이 도읍지로 정한 하남위례성의 옛터로 통일신라시대(서기 660년)에는 한산주 또는 남한주로 개칭하였고 1973.7.1 시승격과 동시에 신개발지로서 새롭게 발전을 도모하자는 뜻으로 신흥동으로 명하여 전래되고 있다.

수 진

세종대왕의 7째 아들 평원대군이 사망하자 영장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수진궁을 지었으므로 수진리라 불러왔는데 1973년 7월 성남시로 되면서 수진동으로 바뀌었다.

모 란

이북평양이 고향인 김창숙이 월남하여 예편하고 광주군수를 지낸후 1970년 당시의 광주군 들마면 하대원리에서 황무지 개간사업을 시작하여 동네가 형성되자 이북에 두고 온 어머님을 그리는 뜻에서 "모란"이란 지명을 사용하였다

 

 

 

역 명

지 명 유 래

선 릉

선정릉은 삼성동 135-4번지 65만평 부지에 조선제9대 성종과 계비정현왕후 윤씨의능인 선릉과 제11대 중종을모신 정릉이 있어 흔히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리는데 능의 봉분이 세곳에 따로떨어져 있다하여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한 티

대치동의 옛이름. 조선시대의 이곳에 한티를 비롯해 움말, 음달짝, 새말, 능안말, 중간말, 세촌, 아랫말 등 8개의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마을인 한티로 명명되었다가 한자로 풀이하면 ‘대치(大峙)’가 되므로 현재 대치동이 되었다.

도 곡

도곡의 유래는 마을뒤에 매봉산이 둘러있고 물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돌부리라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곡이 되어, 지금의 도곡이라 명명하였다.

개포동

개포동은 옛날 이지역에 개펄이 있다하여 "개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 또는 한자명 開浦라 하였으며 지금도 개패, 개포의 옛지명이 전하여지고 있다.

대모산입구

대모산은 산 모습이 늙은 할미와 같다하여 할미산 또는 대고산이라 불렸으나, 세종때 헌릉을 정한 후 대모산이라 고쳐졌다고 한다.

수 서

이지역의 서쪽에 한강물이흐른다하여 수서리라 하였다하며 예전부터 일원동과 같이 변천 해 왔다. 또한 이곳은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방번)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와 전주 이씨 장의 공파 묘소 700여기가 있어 궁말 또는궁촌이라 불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지방 유형 문화재 제 48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경원대

경원대학교와 경원전문대학이 인근에 있어 역명 제정

태 평

1973년 성남시에서 동을 새로 만들때 근심걱정이 없는 태평한 지역을 만들자는 뜻으로 지은 동명.

모 란

이북평양이 고향인 김창숙이 월남하여 예편하고 광주군수를 지낸후 1970년 당시의 광주군 들마면 하대원리에서 황무지 개간사업을 시작하여 동네가 형성되자 이북에 두고 온 어머님을 그리는 뜻에서 "모란"이란 지명을 사용하였다.

야 탑

오야소(梧野所)의 "야" 자와 상탑·하탑의 "탑" 자를 취한 것에서 유래됨.

이 매

"이매"의 지명유래는 다양하다. 1) 이곳 물방아거리 마을 앞의 탄천사이에 있는 들판을 ‘이무슬들’이라 하는데, 이 마을이 풍수지리상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 곧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길지이므로 ‘이무슬’과 매화낙지’를 취하여 이매동이라 하였다는 설. 2) 동쪽의 영장산(413.5m)을 ‘매지봉’이라고도 하는데, 이 줄기에 큰 매지봉과 작은 매지봉의 두 매지봉(梅址峰)이 있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 3) 옛날 탄천변의 구렛들에 물막이 방죽이 있어서, 주민들이 이곳에서 천렵을 즐기다가 한 아름되는 큰 물고기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그 물고기는 천년만에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려던 이무기였다. 그 이무기가 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서 “저주를 받으리라” 하면서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를 내고 사라졌다. 이에 이무기의 저주를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이 상의한 후 이무기의 위령 승천제를 구렛들에서 지냈는데, 이때 제상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다시 그날 밤 주민들 꿈에 이무기의 화신인 백발노인이 나타나 동민들의 정성에 보답하여 저주를 풀었다고 하며 그후 승천제를 지냈던 자리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자라났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데서 유래 4)마지막으로 〈진주 유씨 세보〉에는 ‘임의곡(任意谷)’또는 이매곡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임의술’로 불리웠다는 데서 유래

서 현

돈서리의 서자와 양현리의 현자를 취하여 이루어졌다는 설과, 300여년전 배고개 넘어 서당이 있는 마을의 이름이었다는 설이 있다.

수 내

탄천에서 유래된 것으로, 순내천, 숯내천, 수내천으로 불리운데서 유래, 수내동이 되었음.

정 자

조선 중기의 이천부사 겸 광주병마진관 등을 역임한 이경인이 이곳 탄천 상류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한 후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정자리라 부른데서 유래

미 금

역사 주변의 구미동과 금곡동에서 음을 따 미금역이라 제정함.

오 리

구미동의 오리뜰(성남시 남단의 마을로, 예전에 마을앞에 오리나무를 심어 방풍림으로 이용하였다 하여 오리뜰이라 부르게 됨), 오리마을 이라는 자연취락명을 따서 오리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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