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고태진 기자]며칠 전이 아내의 생일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엄마의 생일 선물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의논을 하더군요. 아내는 애들에게 돈 들여서 선물 사올 거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애들이 돈 드는 것 아니라면서 컴퓨터만 좀 쓰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내 생일날 우리 아이들이 내민 선물은 \'쿠폰 선물세트\'였습니다. 이 쿠폰들을 엄마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 쓸 때마다 쿠폰 하나 위에 스티커를 붙인다고 합니다.
쿠폰을 보니 나름대로 엄마에게 효도 좀 해보겠다는 갸륵한 마음이 보이기도 합니다.
먼저 중학생인 큰 녀석의 쿠폰을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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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들이 아내에게 선물한 쿠폰선물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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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고태진 |
| 큰아들답게 평소에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많이 넣었습니다. 큰마음 먹고 \'쓰레기 버리기(재활용)\'와 \'쓰레기 버리기(일반)\' 쿠폰을 두 개나 넣었네요. 그래도 정말 싫어하는 심부름인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는 역시 넣지 않았네요.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싫어하는 마음이 엄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이겼습니다. 그래도 일단 집에 들어오면 밖에 나가기를 싫어하는 녀석이 \'심부름 하기(실외)\'도 두개나 넣은 것이 기특합니다.
형 말 잘 안듣는 \'동생 공부 도와주기\'나 \'전신 안마\'를 넣은 것도 애교로 봐줄 만 하네요. 그런데 자기가 당연히 해야되는 \'방 청소(내 방)\'를 네개나 넣은 것은 녀석이 머리를 좀 쓴 듯하지만 그냥 넘어갈 만 합니다.
이제 9살 둘째 녀석의 쿠폰을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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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아들이 아내에게 선물한 쿠폰선물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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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고태진 |
| 일단 숫자가 많네요. 큰아들이 25개인데 둘째는 쿠폰이 35개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잔머리\'를 쓴 것이 농후해 보입니다. \'높임말 쓰기\'가 다섯 개나 되는데, 지금도 항상 높임말 쓰고 있거든요. 이걸 왜 넣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엄마오기 전까지 숙제하기\'나 \'책상 청소하기\'나 \'방 청소하기\'도 평소에 시키는 건데 이걸 선물이랍시고 쿠폰에 넣었네요.
둘째 녀석의 \'잔머리\'는 그 다음에 확연히 드러납니다. 도대체 \'공부하기(15분)\'나 \'공부하기(30분)\'는 뭐란 말입니까? 참 어이가 없네요. 그럼 쿠폰 안쓰면 공부 안하겠다는 걸까요? \'공부하기(1시간)\'는 쓸 만 하겠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1시간씩 하는 게임시간을 줄이는 쿠폰은 도저히 쓸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안마하고 발 씻겨드리는 \'노력 봉사\'도 사실 받는 사람이 더 귀찮을 때가 있지만 갸륵한 정성으로 생각해야겠지요. \'등 두들겨드리기 등 두들겨드리기\'라고 두번 쓴 것은 뭐냐고 둘째에게 물었더니 그것은 \"따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정작 쿠폰의 내용을 실행하는 것보다 쿠폰에다 스티커 붙이는데 더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습니다. 스티커 판을 만지작거리면서 쿠폰 위에다 스티커를 붙이고 싶어서 몸살이 났습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엄마오기 전까지 숙제하기\' 쿠폰을 자진해서 쓰겠다면서 스티커 붙이는데만 정신을 팔더니, 정작 숙제하는 건 까맣게 까먹고 놀기만 하다가 저녁에 엄마한테 호되게 혼났습니다. 아무래도 둘째 녀석의 쿠폰은 믿을 게 못되나 봅니다.
그런데 아내가 애들에게는 \'쿠폰 선물세트\'를 받더니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은 뭐 내게 주는 쿠폰 선물세트 없어?\" 저는 진심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야 항상 당신의 자유이용권 아니겠어?\"
/고태진 기자
출처 : 오마이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