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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컴지기 칼럼
교육의 주체가 그들의 언어로 미래교육을 상상하는 이야기
일중독자의 탄생
몇일 동안 열이 오르고 몸살감기가 덮쳤다. 어제 조퇴하고 병원에 가니 독감은 아니라고 하면서 약을 듬뿍 처방해주길래 두 번 먹으니 열은 좀 내려갔다. 지금은 목소리가 안 나온다. 일중독자의 최후를 맞기 전에 꾀를 좀 부리고 있다. 벗들께서도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길.
폰을 새로 바꾼지 일년도 되지 않아 배터리 성능이 떨어졌다. 공장 초기화로 가기 전에 지금 자체 초기화 단행 중이다. 데이터 백업하면서 보니 연락처 5000개에, 사진, 영상은 수십 기가에, 이런 저런 앱데이터 까지 곧 메모리가 꽉 찰 태세다. 연락처와 문자, 통화기록만 남기고 나머진 시원하고 과감하게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텔레그램과 카톡을 설치하고 있다.
때로 기억을 리셋하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리셋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선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감수성의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그래서 껴안고 평생을 견디면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다. 내 삶을 버티게 하는 것은 '서사적 상상력과 사회적 참여'라고 생각한다. 누스바움의 '인간성 수업'과 '시적 정의'에 나온 말이다.
일중독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자만심, 거절하지 못하는 마음 상태, 다른 것으로는 만족을 취할 수 없는 심리 등 여러가지를 꼽는다. 내게도 조금씩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업무에 치어 사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생황맥락적인 이유다.
가령 어떤 회의가 있다.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TF라고 하자. 그러면 위원을 모으는 일이 시작된다. "이번에 부장님을 꼭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그분'의 지시가 있었습니다"로 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번엔 좀 빼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냥 회의 몇 번 나온다 생각하시고 가볍게 참여해주세요..." 이 상황에서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첫 회의에 참여하면 어떤 일이 있을까.
당연히 정책이나 교육에 대하여 그동안 일을 해 왔거나, 글을 쓴 적이 있거나 말을 한 적이 있거나 뭔가 실천을 한 일이 있는 경우 자주 발언을 요청받는다. 성심성의껏 이야기를 한다. 참고로 사람들이 회의에서 왜 발언을 많이 하지 않고 투명인간으로 남거나 다른 사람이 잘 할만한 과제에 적극 동의하는지 생각해 보셨는가. 그래야 회의 후 역할분담에서 배제되거나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 잘못이 아니다. 담당자에게 책임을 묻는 관료제 방식의 문제이고 행정의 논리가 그러하다.
전문직은 일정 시기가 지나면 현장으로 돌아간다. 장학관/연구관들은 아무리 길어도 2년을 넘지 않는다. 2년 후에는 다시 교장으로 가거나, 정년을 맞는다. 이런 짧은 근무기간은 중장기적 업무에 대하여 관심이 적거나, 맡으면 힘들어 하는 이유가 된다. 연구관->장학관->다시 연구관을 맡으면서 관급 전문직 5년차에 들어선 나는 설계한 정책이 많고, 조직내 정보를 다른 전문직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알고 있으며, 앞으로도 4년 정도는 더 전문직에서 일을 해야 한다. 이같은 배경은 은연중 내게로 일이 집중하는 결과로 돌아온다.
회의가 끝날 때쯤 자연스레 역할분담을 한다. 누가 했을 때 가장 효과적인지 판단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마감 시간을 지킬 수 있느냐의 여부다. 서로에게 체화된 경험은 자연스러운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래서 일이 중복하여 맡겨진다. 거부하면 다른 사람에게 일이 돌아가기보다 회의 자체가 공전된다. 회의가 공전하면 피곤을 느끼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 그 사람이 일을 맡는다. 요컨대 회의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 일을 맡겼을 때 합리적인가를 판단하는 과정쯤으로 된다. 참여자들은 이를 민주적 의사결정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런 방식이었다.
최근 중요한 심사를 의뢰받은 적이 있었으나 거절했다. 부탁하신 분은 당황해 한다. 수락할 줄 알았던 거다. 사실 이건 부탁이라기보다 당연직 같은 거였다. 그러나 2박3일 제주 일정을 소화하고 주말의 온 일정을 투여하는 일에 나 자신을 몰아 넣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열을 동반한 감기가 오고 있는데, 나로서는 당연한 거절이었지만, 작년에도 했고, 나로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하니 의뢰한 자와 의뢰받는 자가 서로 당황해 하면서 전화를 종료하는 일이 생겼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 때문에 내가 힘들다는 말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사실인즉슨 그 일에 함께 가담하는 분들은 다 그만큼의 정신적 육체적 시간 투여를 한다. 다만 서로 모르는, 공표할 수 없는 일에 투여하는 시간들은 모두 다르다. 난 그것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 뿐이다. 교육부나 타시도/타기관에서 의뢰하는 일이 있다. 거절하는 것이 더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경우가 있다. 사람의 일이란 그동안 어떤 경험과 말과 글을 써 왔으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 판단되면 정중하게 거절한다. 거절하는 일이 수락하는 일보다 훨씬 많다는 말만 하겠다.
나도 한 부서를 맡고 있다. 지금은 자격연수 철이라 부서원 모두 초긴장 상태이다. 특히 올해는 연수과정 전반을 큰 폭으로 혁신하는 과정에서 서로 힘든 일이 많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평가방식'이다. 이 힘든 일을 해소하기 위해 교육부와 중앙교육연수원, 타시도 교육연수원을 직접 돌면서 자격연수 성적 반영과 관련한 승진규정 개정을 공론화시켰다. 힘든 시간이었다. 검토단계에 들어갔지만 얼마나 또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친구들은 '교육사유' 이후 책을 안 쓰고 있다고 연일 조른다. 안 쓰지 않는다. 요즘은 주말을 온전히 책 쓰는 일에 투여하고 있다. 공들여서 쓰고 있으니 아마 연말 쯤엔 최소 2권이 빛을 볼 수 있을 거다. 이것도 조르는 사람이 있으니 진도를 빼는 것이다. 아마 아무 말도 없으면 더 게을러졌을지도 모른다. 이번 학기부터 맡은 대학강의도 그 준비와 진행이 만만치 않다. 특히 과제가 모두 글쓰기여서 검토와 피드백 시간이 꽤 걸린다. 안 맡으면 적어도 이 부분은 아무 일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수원으로 근무처를 옮기면서 몇 군데 요청을 받고 한 군데를 수락하는 과정에서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다는 말만 전한다.
집필한 책의 추천사를 써달라고 하는 의뢰도 가끔 있다. 성격상 읽어보지 않고는 추천사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온 추천사 중 한 권은 정말 대충 읽고 썼다. 저자도 이해했지만 양해해주셔서 그럴수 있었다. 월 1회 벗들과 모여서 공부를 한다. 즐거운 일이고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매일 한 번씩 이런 저런 회의가 있다. 그중 상당 수는 진행과 결과처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저런 사적인 모임이 있다. 음주를 동반한 모임을 한 차례 겪으면 그 다음 날이 힘들다. 그러니 아예 안 나가고 욕을 먹은 다음 그 시간에 일을 하는 것이 나로서는 더 유익한 선택이다.
일중독자는 이렇게 탄생한다. 대부분 일중독의 원인은 일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심이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이 아니다. 대개의 일중독자는 이렇듯 상황논리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탄생한다. 일중독자들에게 왜 '노'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뭐라 해명할 말도 없이 억울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극심한 감기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어제와 오늘도 교육청에서, 출판사에서, 방송국에서, 타시도 연수원에서, 여름에 열릴 컨퍼런스 사무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뭉개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정중하게 받는다. 이건 내 성격이다.
이런 저런 충고나 처방같은 것은 사양한다. 오늘은 그저 공감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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