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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과 해석학 - Husserl, Heidegger, Gadamer

교컴지기 | 2014.02.24 06:16 | 조회 1875 | 공감 0 | 비공감 0
현상학과 해석학 - Husserl, Heidegger, Gadamer 철학 

2005/08/03 11:35

http://blog.naver.com/soslll/140015728296

 현상학과 해석학 - Husserl, Heidegger, Gadamer


이 남 인 (서울대 철학과 교수)


목차 



1. 들어가는 말

2. Husserl의 정적 현상학의 이념과 방법

3. Heidegger의 Husserl 비판과 해석학적 현상학

1) Heidegger의 Husserl 비판의 성격

2) 지향성 개념에 대한 비판과 ぢ심려っ(Sorge) 구조의 발견

3) 현상학적 해석의 방법

4) 해석학적 현상학의 특성

5) Husserl과 Heidegger의 관계: 양자 사이의 대화의 필요성

4. Husserl, Heidegger와 Gadamer의 해석학

1) Husserl과 Heidegger의 영향과 Gadamer의 해석학의 과제

2) Gadamer의 해석학의 출발점

3) 해석학적 현상의 근본 구조

4) Gadamer의 해석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

5. 맺음 말: ぢ현상학적 해석학 논쟁っ의 성격 및 필요성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철학의 주제와 방법을 중심으로 Husserl에서 Heidegger를 거쳐 Gadamer로 이르는 현상학과 해석학의 흐름을 고찰하면서,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해명함을 그 목표로 한다.


1. Husserl의 정적 현상학의 방법적 토대인 ぢ반성적 직관っ, Heidegger의 해석학적 현상학의 방법적 토대인 ぢ해석학적 직관っ, 그리고 Gadamer의 해석학의 방법적 토대인 ぢ해석학적 의식っ은 모순.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각자는 서로 서로 도움을 통해서만 자신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유형의 철학이 각자 지니고 있는 나름대로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에 상호인정에 기초한 참다운 의미의 철학적 대화가 필요하다.


2. 이러한 철학적 대화와 관련해 유의해야 할 사실은 Gadamer의 해석학에는 Husserl과 Heidegger의 현상학의 생명인 철저한 방법론적 의식과 비판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법론적 의식과 비판 정신의 결여는 Gadamer의 해석학에 많은 문제를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의 직접.간접적인 영향하에서 전개된 1960년대 이후 현대철학이 - M. Frank의 표현을 빌면 - 극단적인 ぢ의사소통의 한계っ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극도로 혼미한 상황에 빠지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Gadamer의 해석학이 지닌 문제점 및 현대철학이 처한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작업은 Husserl과 Heidegger가 철두철미 견지하고자 한 철저한 방법론적 의식과 비판정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2. Husserl의 정적 현상학의 이념과 방법


Husserl이 그의 주저 {이념들 1}에서 밝히고 있듯이 ぢ전체 현상학을 포괄하는 주제는 지향성이다.っ({이념들 1}, 337) 그는 {논리연구}에서 {이념들}에 이르는 초기 저술에서 지향성을 ぢ자기 동일적 대상에 대한 자아의 의식적 관계っ로 규정하는데, 이러한 지향성 개념의 규정을 위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구성적 관점에서 ぢ객관화 작용っ(objektivierender Akt)이 ぢ비객관화 작용っ(nicht-objektivierender Akt)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지닌다는 다음과 같은 근본명제이다: ぢ모든 지향 체험은 객관화 작용이거나, 그러한 작용을 で토대と로서 가지고 있다.っ({논리연구 II/1}, 514) 인식론적 물음에서 출발한 그의 전기 현상학인 정적 현상학(statische Phanomenologie)의 과제는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따라 모든 선입견을 떨쳐 버리고 오직 ぢ사태 자체っ인 지향성에 육박하여 ぢ반성적 직관っ(reflexive Anschauung)의 방법을 사용해 다양한 유형의 지향성의 구조와 지향성 사이의 타당성 정초관계를 해명하는데 있다.


3. Heidegger의 Husserl 비판과 해석학적 현상학


1) Heidegger의 Husserl 비판의 성격


Heidegger에 의하면 Husserl의 정적 현상학의 구상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며, 이런 이유에서 그는 ぢで현상학의 근본 문제들と, 다시 말해 가장 큰 논쟁거리이고 결코 불식시킬 수 없는 가장 근원적이며 최종적인 현상학의 근본 문제는 현상학 그 자체이다っ(GA 58, 1)라고 지적한다. 이제 그는 Husserl 보다 더욱 더 철저히 현상학의 근본 이념에 충실하게 ぢ사태 자체っ로 육박해가면서 Husserl의 분석속에 들어있는 검토되지 않은 전제를 들쳐내고, 비판하면서 현상학의 근원적인 이념을 충실히 구현한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유형의 현상학, 즉 ぢ해석학적 현상학っ(hermeneutische Phanomenologie)을 발전시킨다. Heidegger의 Husserl 비판의 근본적인 성격은 현상학적이다.


2) 지향성 개념에 대한 비판과 ぢ심려っ(Sorge) 구조의 발견


Heidegger에 의하면 Husserl은 지향적 분석을 행함에 있어 대부분의 전통적인 인식론자들과 - 비록 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는 ぢ인식론적 선입견っ(GA 20, 40)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지향성을 ぢ사태 자체에っ 충실하게 올바로 규정하고 있지 못하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Husserl의 지향성 개념은 ぢ현상학이 하고자 하는 일을 직접적이며 어떤 선입견없이 받아들임을 방해하는 바로 그 장본인이다.っ(GA 20, 34)


우선 Husserl이 많은 전통적인 인식론자들과 더불어 타당하다고 간주하는 객관화 작용의 절대적 우위라는 명제는 결코 자명한 명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객관화 작용은 근원적인 실천적인 삶의 영역에서 기능하는 비객관화 작용들의 ぢ탈-생화っ(Ent-lebung)(GA 56/57, 91; GA 58, 75ff.)의 결과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것의 파생적 양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명제는 또 Heidegger가 ぢ이론적인 영역을 토대로 해서 실천적인 영역을 해석하려 함っ(GA 20, 61)이라고 지적하듯이 비객관화 작용의 지향적 구조, 그리고 더 나아가 객관화 작용의 지향적 구조를 올바로 파악할 가능성마저 차단한다.


Husserl의 지향성 개념이 이처럼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지향적 분석을 행함에 있어 일차적으로 인식론적 물음에서 출발하면서 지향성의 근원적인 존재 의미에 대한 ぢ존재 물음っ(Seinsfrage)을 소홀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자에 대한 모든 탐구는 그 탐구의 전제 역할을 담당하는 바, 그 존재자에 대한 특정의 존재론적 규정(ontologische Bestimmung)에서 출발하게되며, 이 점에서는 Husserl의 지향적 분석도 예외일 수 없다. Husserl에 의하면 지향성은 ぢ그것이 파악작용 속에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존재っ, ぢ절대적 소여성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존재っ, ぢ대상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구성적 존재っ, ぢ사실적 존재가 아니라, 이념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순수 존재っ(GA 20, 140ff.)등의 존재 규정을 지닌다. 그런데 Heidegger에 의하면 이러한 존재규정은 지향성이라는 ぢ존재자 자체를 토대로っ(GA 20, 149) 획득된 근원적인 규정이 아니라, 자의적인 규정에 불과하며, 이러한 자의성의 원천은 다름 아닌 Husserl 현상학의 방법적 토대인 반성적 직관이다. 이처럼 반성적 직관을 지향 체험에 대한 분석의 수단으로 선택하면서 Husserl은 바로 반성의 도식안에서 필연적으로 지향 체험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지향 체험은 어떻게 주어질 수 있는가, 지향 체험은 구성된 것인가, 혹은 구성하는 것인가, 지향 체험은 사실적 존재인가, 이념적 존재인가등의 네 가지 물음을 선행적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이러한 물음 속에 들어있는 일반적인 존재 규정이 다름 아닌 위에서 살펴본 지향 체험의 네 가지 존재 규정이다.


Heidegger에 의하면 지향성의 참된 존재 규정은 반성적 직관의 대상이 되기 이전의 지향체험을 토대로 획득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근원적인 지향 체험은 그 누구와도 치환될 수 없는 그때 그때 마다의 현존재에 의해 지금, 바로 여기에서 수행되는 개별적인 실존적 체험이며, 따라서 지향성의 근원적인 존재 규정은 바로 ぢ실존っ(Existenz)이다.


따라서 지향성의 정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ぢ실존범주っ의 하나인 ぢ내-존재っ(In-Sein)의 구조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실존 범주로서의 ぢ내-존재っ에서의 ぢ내っ는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두 개의 존재자 사이의 공간적인 포함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현존재가 친숙한 세계속에서 살아나가면서 거기서 만나는 다양한 존재자들과 실존적으로 교섭하는 방식을, 그리고 보다 더 근원적으로는 이러한 교섭을 가능케 해주는 토대인 현존재의 실존및 그와 등근원적인 그의 세계의 개시성(Erschlossenheit)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현존재의 실존 및 세계의 개시성은 Heidegger에 의하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등근원적인 세 가지 계기들, 즉 정황성(Befindlichkeit), 이해(Verstehen), 말(Rede)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정황성은 이미 앞서 주어진 실존 및 세계를 개시해주는 계기이며, 이해는 장차 기투되어야 할 실존 및 세계를 개시해주는 계기이고, 말은 정황성과 이해를 의미로 분절시키는 계기이다. 현존재는 이처럼 자신의 실존 및 세계에 대해 실존적인 정황적 이해를 선행적으로 가지면서, 그를 토대로 부단히 존재자들을 해석하면서 그들과 교섭하고 있다. 현존재가 만나는 존재자에 대한 모든 유형의 발견 과정은 이러한 선행적인 실존적인 정황적 이해를 토대로 수행되는 부단한 실존적 해석 과정이다. 실존 범주로서의 내-존재는 이처럼 실존적인 정황적 이해 및 그를 토대로 수행되는 해석작용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내존재의 전체적인 구조는 ぢ(내세계적으로 만나는 존재자들) 곁에 있음으로서의 (세계)속에 이미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っ(Sich-vorweg-schon-sein-in- (der-Welt) als Sein-bei (innerweltlich begegnendem Seienden))(SZ, 192)로 표현될 수 있는데, Heidegger는 이러한 내존재의 전체적인 구조를 ぢ심려っ(Sorge)라 부른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Husserl의 지향성의 정체가 밝혀진다. 지향성은 바로 심려의 한 계기인 ぢ존재자 곁에 있음っ(das Sein bei)(GA 20, 210ff., SZ, 54ff.)의 한 유형, 즉 그것이 탈생화한 파생적 양상이다. 그런데 ぢ존재자 곁에 있음っ은 다시 심려의 또 다른 계기인 ぢ세계속에 이미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있음っ으로서의 정황적 이해의 파생적 양상이다. 따라서 지향성은 정황적 이해의 ぢ파생적 양상의 파생적 양상っ에 불과하며,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대부분이 물밑에 잠겨 있는 심려라고 하는 빙산의 일각에 비유될 수 있다.


3) 현상학적 해석의 방법


현상학의 주제가 지향성에서 심려로 바뀜에 따라 그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도 변화하는데, 이는 Heidegger가 ぢ사태자체로부터 요청된 탐구방법을 통해서만 특정 학문 분과는 성립할 수 있다っ(SZ, 22)고 지적하듯이, 사태와 그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인 방법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그가 Husserl과({이념들 1}, 161) 공유하는 현상학적 확신에서 유래하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Husserl의 반성적 직관은 지향성은 주제화할 수 있으나, 혼자서는 지향성의 존재토대인 심려 현상을 이론적으로 주제화하기는 고사하고, 그러한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조차 없다. 따라서 심려를 현상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방법론적으로 두 가지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1) 심려 현상이 존재함을 선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방법과, 2) 그렇게 포착된 현상을 이론적으로 주제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1. 퇴락의 양상에서 살아가는 일상적 현존재는 개별적인 존재자에만 - 그것이 체험이든, 자연적 대상이든 - 관심을 집중시킨 채, 심려 현상으로부터 부단히 눈을 돌리며 회피하려는 근본적인 은폐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은폐 성향이 파괴될 때 심려 현상에 대한 선이론적 포착이 가능하다. 그런데 Heidegger에 의하면 이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반성적 직관과 같은 객관화적 작용이 아니라, 일종의 정서적 통일체인 ぢ근원적 기분っ(Grundstimmung)인데, 그 대표적인 예는 {존재와 시간}에서 분석되고 있는 ぢ불안っ(Angst)이다. 불안은 퇴락의 양상을 지닌 현존재로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의미를 지녀왔던 모든 존재자들의 의미를 송두리째 박탈함으로써, 그에게 그의 퇴락한 실존 및 퇴락한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더 나아가 그를 이러한 퇴락의 양상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도록 해 주면서, 그에게 심려 현상을 선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2. 이처럼 근원적 기분을 통해 자신의 실존 전체에 대해 눈을 뜬 본래적 현존재에게만 그에 대해 이론적인 분석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심려에 대한 이론적 분석은 이처럼 선이론적으로 포착된 심려에 대한 막연한 선개념적인 실존적 선이해를 개념적인 존재론적 선이해, 즉 실존론적 선이해로 바꾼 후, 이를 반복되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단계적으로 구체적인 이해로 바꾸어감으로써 가능한데, 이러한 작업이 바로 현상학적 해석이다. ぢ현상학적 기술의 방법론적 의미는 해석이다. 현존재의 현상학의 logos는 hermeneuein, 즉 해석이라는 성격을 지니는데, 그를 통해 현존재 자체에 속한 존재 이해로부터 현존재의 존재 의미 및 현존재에만 고유한 존재의 근본 구조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っ (SZ, 37)


4) 해석학적 현상학의 특성


실존론적 현상학은 이처럼 해석의 방법에 기초한 해석학적 현상학이 된다. 앞서 밝혀졌듯이 현존재는 실존적인 정황적 이해를 토대로 부단히 실존적 해석을 수행하는 존재자이며, 따라서 현존재의 실존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으로서의 현상학적 해석은 ぢ해석에 대한 해석っ임이 밝혀진다. ぢ해석에 대한 해석っ을 통해 수립되는 해석학적 현상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정적 현상학과 구별된다.


1. 실존론적 선이해 및 선구조 없이는 현상학적 해석은 불가능하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ぢ철학은 자신의 で전제들と을 떨쳐버리려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주어진 그대로 아무렇게나 받아들이려고 해서도 안된다. 철학은 전제들을 (올바로) 파악해서, 그것들과 더불어 그것에 대해 그것들이 전제인 바의 그것을 보다 더 철저하게 전개해 나간다.っ(SZ, 310) 정적 현상학이 무전제의 철학이고자 하는데 반해 이처럼 해석학적 현상학은 현존재가 처한 상황에 입각하여 획득된 전제에서 출발하여, 그 전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고자 하는 ぢ전제의 철학っ이다.


2. 현상학적 해석은 ぢ현존재의 존재가능성っ(SZ, 13)을 의미하며, 그러한 한에서 현존재의 실존의 수행, 혹은 운동성이라는 의미의 기투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Heidegger는 현상학적 해석속에 들어 있는 이러한 기투를 실존적 해석속에 들어있는 기투와 구별해 ぢ존재론적 기투들っ(ontologische Entwurfe)(SZ, 312)이라고 부르며, 이와 관련해 ぢ선구적 결단성っ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ぢ현존재를 그의 가장 극단적인 실존 가능성으로 해석하면서 해방시키는 작업っ(SZ, 303)으로, 그리고 존재사유의 최종 목표를 ぢ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로부터 현-존재로의 인간의 본질의 변화っ(GA 65, 3), ぢ자연및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변화っ로 규정한다. 이처럼 현존재의 가장 극단적인 실존 방식의 하나인 현상학적 해석에 기초한 해석학적 현상학은 현존재의 구체적인 실존적 삶을 도외시한 듯한, ぢ순수관조っ를 연상케 하는 정적 현상학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3. 근원적인 기분이 없이는 세계및 실존에 대한 실존적 선이해의 생성도, 더 나아가 실존론적 선이해의 확보및 현상학적 해석도 불가능하듯이, 불안등의 근원적 기분은 - 비록 Heidegger의 해석학적 현상학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지만 - ぢ실존론적 분석론을 위하여 원칙적인 방법적 기능っ(SZ, 190)을 지니고 있다. 불안은 해석학적 현상학의 분석 주제인 실존을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해석학적 현상학은 철두 철미 이러한 근원적 기분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근원적 기분은 특유한 직관적 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Heidegger는 이와 관련해 ぢ정황성이 지닌 명증っ(SZ, 136)이라 말하면서, 이러한 명증의 원천을 ぢ해석학적 직관っ(hermeneutische Intuition)(GA 56/57, 117)이라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해석학적 현상학이 사태 자체에 대한 직관에 기초해 이론을 구축하여야 한다는 현상학의 이념을 근원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철학임을 확인한다.


5) Husserl과 Heidegger의 관계


Heidegger는 이처럼 Husserl의 정적 현상학을 철저히 비판하고 ぢ현상학을 보다 더 근원적으로 사유하면서っ(GA 12, 91) 해석학적 현상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통해 양자의 관계는 극히 단편적으로만 해명되었을 뿐인데, 그 이유는 Husserl역시 1910년대 중반 이후 자신의 전기 현상학을 철저히 비판하면서 ぢ발생적 현상학っ(genetische Phanomenologie)을 전개시키고 있고, Heidegger도 다시 {존재와 시간}의 출간 이후 거기서 다루어진 문제를 비판적으로 심화시켜가면서 소위 ぢ존재사유っ(Seinsdenken)라 불리는 ぢ극단적으로 심화된 형태의 해석학적 현상학っ을 전개해 나갔기 때문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단절된 이 두 철학자 사이의 철학적 대화를 계속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게 될, 양자에 대한 총체적이며 내실있는 비교 연구는,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현상학을 체계적으로 비교.검토할때만 가능한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자 한다.


1. Husserl의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ぢ생っ, ぢ생활세계っ, ぢ지평っ, ぢ역사っ등의 문제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발생적 현상학은, Gadamer도 지적하고 있듯이(GW 1, 246ff.), - 비록 여러가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Heidegger의 해석학적 현상학, 그리고 더 나아가 Gadamer의 해석학과 유사하다.


2. Husserl과 Heidegger의 현상학의 핵심은 - 이 후자의 존재사유 역시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 철저한 ぢ책임의식っ에 기초한 비판 정신인데,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Husserl의 경우에는 반성적 직관이며, Heidegger의 경우에는 근원적 기분이다. 앞서 우리는 현상학의 이념이 근원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 Husserl의 반성적 직관은 Heidegger의 해석학적 직관의 도움이 필요함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 자체상 개념적으로 ぢ파악하지 못하고, 해명하지 못하고, 술어화하지 못하는っ({윤리학}, 69) 해석학적 직관 역시 반성적 직관의 도움이 없이는 참다운 의미의 비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해석학적 직관은 단지 불투명하며 막연한 양상속에서 실존 전체의 모습을 선이론적이며 예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론적인 실존론적 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줄 뿐이지, 그 어떤 다른 것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실존론적 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막연하게 주어진 실존의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적 분석을 통해 그의 구조를 분명한 형태로 밝혀내면서 실존에 대한 해석 작업을 마무리짓고, 이러한 해석 결과에 대해 모든 책임을 떠맏는 것은 실은 - 비록 Heidegger가 그 점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인정하고 있듯이 - 반성적인 직관이다. 반성적 직관이 지닌 이러한 고유한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 때, 해석학적 현상학은 무비판적인 철학으로 전락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후기의 존재사유는 ぢ신화っ(Mythologie), ぢ거짓 시"(Pseudopoesie)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4. Husserl, Heidegger와 Gadamer의 해석학


1) Husserl과 Heidegger의 영향과 Gadamer의 해석학의 과제


Husserl과 Heidegger의 결정적인 영향하에서 Gadamer는 이해, 해석, 번역, 통역등 ぢ해석학적 현상(hermeneutisches Phanomen)의 총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함っ(GW 1, 3)을 자신의 과제로 삼으면서 해석학을 전개해 나간다. Husserl의 지향성이 Heidegger에 의하여 수정.보완된 후 그의 해석학의 분석 주제로 수용된 것이 바로 그의 탐구 주제인 ぢ해석학적 현상っ이며, ぢ나는 근본적으로 Heidegger가 이미 초기 Freiburg 시절에 개척한 근본노선을 계속해서 추적하였을 뿐이다.っ(GW 2, 422)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는 Heidegger의 해석학적 현상학, 더 나아가 Husserl의 발생적 현상학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한다. 이 점과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ぢSchleiermacher에서 Dilthey를 거쳐 Husserl과 Heidegger로 이어지는 해석학적 문제의 전개っ(GW 1, 478)라고 말하듯이 그가 - Heidegger뿐 아니라 - Husserl 역시 - 무엇보다 ぢ생っ, ぢ생활세계っ, ぢ지평っ, ぢ역사っ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Husserl의 발생적 현상학 때문에 - 그의 해석학의 중요한 선구자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그는 방법적 의식 일반에 대해 거리를 취하긴 하지만 해석학적 현상을 분석하기 위하여 Husserl이 제시한 ぢ현상학적 기술っ(phanomenologische Deskription)의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의 해석학이 일종의 현상학, 즉 ぢ해석학적 현상에 대한 기술적 현상학っ임을 의미한다.


ぢ해석학적 현상의 총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함っ이라는 그의 해석학의 과제는 두 가지를 함축하는데, 그것은 첫째, ぢ사건っ(Geschehen)(GW 1, 488 ff.)으로서의 해석학적 현상의 발생적 구조를 밝히면서 ぢ이해가 발생하기 위한 조건들을 해명하고っ(GW 1, 300), 둘째, 해석학적 현상속에 들어있는 진리요구가 어떻게 ぢ철학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지っ(GW 1, 2)를 해명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실은 ぢ이해 현상속으로 뚫고 들어가야 그것의 정당성이 드러날 수 있다っ(GW 1, 2)고 밝히고 있듯이, 그가 타당성의 문제에 대한 해명은 발생의 문제에 대한 해명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2) Gadamer의 해석학의 출발점


Gadamer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론을 토대로 해석학적 현상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자신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해석학적 순환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이해및 해석은 어떤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그가 Heidegger의 っ선이해っ 개념에 기초해 발전시킨 ぢ선판단ぢ(Vorurteil)에 관한 이론, 2) 그 어떤 해석 대상, 즉 사태는 무수히 많은 의미 연관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관점이 다름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주어질 수 있다는, 그가 Husserl과 Heidegger로부터 물려받아 나름대로 발전시킨 의미론, 3) ぢ해석학적 경험っ(hermeneutische Erfahrung)(GW 1, 352ff.)에 대한 분석에 토대를 두고있는 바, ぢ유한한 인간의식에 대한 역사의 힘っ(GW 1, 306)때문에 특정의 역사적 상황에 속한 유한한 인간의 의식은 한 순간에 이 많은 관점에 대한 ぢ절대적 인식っ(absolutes Wissen)(GW 1, 306)을 획득할 수 없다는, ぢ해석학적 의식っ(hermeneutisches Bewußtsein)(GW 1, 348ff.)에 관한 이론.


3) 해석학적 현상의 근본 구조


Gadamer는 이러한 이론들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학적 현상의 구조를 분석한다: 그가 제시하는 현대예술에 대한 무수히 다양한 평가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해석학적 대상으로서의 그 어떤 ぢ사태っ(die Sache)가 처음으로 출현할 당시에는 유한한 인간의 의식은 어떤 선판단이 정당한지 ぢ사전에 혼자힘으로っ(von sich aus vorgangig)(GW1, 301) 확인할 길이 없으며, 따라서 역사의 제약속에 있는 해석자들의 다양한 해석학적 상황(hermeneutische Situation)(GW 1, 307ff.)때문에 정당성 여부를 ぢ검증할 수 없는 (많은) 선판단들っ(unkontrollierbare Vorurteile)(GW 1, 302)이 이 사태의 참된 의미를 해석해내기 위한 전제로서 등장하며, 나름대로의 권리를 주장한다. 참된 선판단과 그릇된 선판단에 대한 구별이 ぢ사전에っ 불가능하기 때문에 ぢ이러한 구별은 단지 (무한히 계속되는) 이해 과정 자체 내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다.っ(GW 1, 302) 따라서 각각의 선판단에 기초하여 ぢ전체와 부분의 순환 관계っ속에서 해석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며, 이처럼 해석이 진행되면서 각각의 선판단은 구체적으로 분절되면서 대상의 의미를 산출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분절되어 나타난 모든 의미가 대상의 참된 의미는 아니며, 오직 특정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의미만이 참된 의미가 되는데, 그 조건은 다름 아닌 ぢ모든 개별적인 것이 전체와 일치함っ(Einstimmung aller Einzelheiten zum Ganzen)(GW 1, 296)이라는 기준이다. 따라서 해석 과정에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말하자면 ぢ이해의 좌절っ(das Scheitern des Verstehens)(GW 1, 297)을 경험한 선판단들은 ぢ시간 간격っ(Zeitabstand)(GW 1, 296ff.)이 생김과 더불어 부당한 선판단임이 판명되면서 점차 걸러진다. 다른 한편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켜 ぢ여과 과정っ(die Filterung)(GW 1, 303)을 거친 선판단 역시 그때까지만 잠정적으로 타당한 선판단으로 간주될 뿐, 그것이 ぢ이해의 좌절っ을 경험하는지 계속해서 확인해보아야 한다. 충분한 ぢ시간 간격っ을 두고 이러한 확인 작업을 계속하였을 경우에도 계속하여 그 선판단(들)이 ぢ이해의 좌절っ을 경험하지 않을 경우, 이러한 선판단(들)은 정당한 선판단으로 간주되며, 권위를 지닌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물론 ぢ시간 간격っ이 지나면서 이렇게 형성된 전통(들) 이외에 그 전통들이 미치는 ぢ영향사っ(Wirkungsgeschichte)의 제약속에서 새로운 선판단이 출현할 수 있고, 그것에 기초한 이해및 해석이 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이해의 좌절을 경험하지 않을 경우 또 하나의 새로운 전통이 탄생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선판단이 전통속에 있는 선판단과 대비되면서 ぢ부각되어っ(zur Abhebung bringen)(GW 1, 304), 양자 모두에게 마치 상호인정에 기초한 참대운 ぢ대화っ(Gesprach)의 대화 상대자처럼 나름대로의 고유한 권리가 부여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다름 아닌 ぢ영향사적 반성っ(GW 1, 307)에 기초한 ぢ영향사적 의식っ(wirkungsgeschichtliches Bewußtsein)(GW 1, 306ff., 348ff.)이다. 이처럼 시간 간격은 영향사적 의식과 더불어 ぢ적극적이며 생산적인 이해 가능성っ(GW 1, 302)을 보장해주는 요소이며, 그를 통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의미들이 나타나는데, 바로 이러한 점에서 모든 참된 이해는 ぢ달리 이해함っ(anders verstehen)(GW 1, 302)이며, 동시에 ぢ더 잘 이해함っ(Besserverstehen)(GW 1, 301)을 의미한다. 시간 간격은 이처럼 결코 해석자와 해석대상을 갈라놓는 ぢ심연っ(Abgrund)(GW1, 302)이 아니며, 따라서 역사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ぢ자기 동일적인 객관적 의미っ로서의 ぢ대상의 참된 의미っ를 재구성하기 위하여 제거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대상의 참된 의미는 시간 간격의 너머에, 그리고 영향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양한 전통속에서 타당한 것으로 인정된 의미들의 ぢ통일체っ(GW 1, 305)이다. 이처럼 타당한 전통과 권위가 ぢ전체와 부분의 일치っ라는 기준에 근거하여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Gadamer는 이성을 통하여 획득된 권위있는 전통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전통 혹은 권위와 이성을 모순적이며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는 계몽주의 철학을 비판한다.


4) Gadamer의 해석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


Gadamer는 이러한 해석학적 근본노선을 토대로 {진리와 방법}에서 ぢ미학적 해석학っ, ぢ정신과학적 해석학っ, 그리고 ぢ존재론으로서의 보편적 해석학っ을 발전시키고 있다. 예술, 역사등의 몇몇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해석학적 현상에 대한 치밀한 발생적 분석, 계몽주의, 실증주의,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및 그를 통해 인문주의적 전통을 부활시키려는 시도, 상호 인정에 기초한 대화이론의 전개등은 그의 해석학이 이루어낸 커다란 공적이다. 다른 한편 그의 해석학은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 문제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그의 해석학은 방법론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 그는 방법을 거의 거부하면서 단지 ぢ현상학적 기술의 성실성っ(die Gewissenhaftigkeit phanomenologischer Deskription)(GW 1, 5)만은 철저히 견지하고자 하는데, 과연 그가 이러한 약속을 얼마나 이행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우리는 그가 예술, 역사등의 영역에 대한 기술적 분석을 토대로 그의 해석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인간의식의 유한성, 시간 간격, 영향사등의 몇몇 원리들을 발견해내고, 이러한 원리들로부터 거의 무차별적으로 모든 해석학적 현상의 구조를 ぢ연역해내면서っ ぢ존재론으로서의 보편적 해석학っ까지 일률적으로 ぢ구성해내고っ 있다는 인상을 씻을 수 없다. 만일 이러한 우리의 의심이 정당하다면 그는 그가 비판하고자 한 방법론적 일원론자들이 범한 오류와 - 다만 그 방향만 다를 뿐 - 거의 유사한 오류를 범하고있는 셈이다.


2. 그의 해석학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타당성의 문제와 발생의 문제가 명료히 구별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점과 관련해 타당성의 문제에 대한 해명은 발생의 문제에 대한 해명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그가 Nietzsche, Dilthey등과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근본 신념이 과연 어느 정도 타당한가 검토되어야 한다. 글쓴이는 적어도 해석학적 현상과 관련해 이 두 문제는 비록 밀접히 연결되어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명료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문제에 대한 명료한 구별의 부재는 - 다소 불명료한 서술 방식과 더불어 - 1960년대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와 E. Betti, K.-O. Apel, J. Habermas, J. Derrida 사이에 진행된 해석학 논쟁이 논쟁 당사자들 사이에 불필요한 많은 오해가 따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 그와 Derrida의 논쟁의 경우처럼 - 대화조차 이루어지지 못하는 등 비생산적인 논쟁으로 끝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3. 더 나아가 그의 해석학은 해석학적 현상의 타당성 구조 해명과 관련해 큰 난점을 지니고 있다. 그는 어떤 선판단이 ぢ전체와 부분의 일치っ라는 기준을 만족시키면 그것은 곧 ぢ옳은っ(richtig) 선판단이며, 따라서 이성과 전통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며, 이성적인 전통도 있다도 말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Habermas가 그와의 해석학 논쟁에서 주장하듯이 Gadamer가 전통이 모두 ぢ폭력없이っ 이성적으로 수립되며, 따라서 모든 전통이 권위를 지닌 정당한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Gadamer의 근본 입장은 폭력적이며 비이성적인 전통도 있으나, 그것들은 ぢ이성적っ이라는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므로 결국에는 ぢ권위상실っ, ぢ권위추락っ(GW 2, 244)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스스로 ぢ우리가 무엇 때문에 논쟁하는지 더 이상 모르겠다っ(GW 2, 245)고 실토하듯이 Habermas의 근본입장과 유사하다. 이와 관련하여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왜곡된 전통도 존재한다면 이의 극복이 철학의 과제로 등장하는데, Gadamer는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비합리적이며 왜곡된 전통의 정체 해명및 극복을 위해서는 해석학적 의식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른바 ぢ초해석학적 의식っ(metahermeneutisches Bewußtsein)이 필요한데, 그 예로는 Husserl의 반성적 직관, Heidegger의 정황적 직관뿐 아니라, Apel이 선험적 화용론 구축의 토대로 삼는 바, 그에 기초하여 토론자들이 ぢ무제약적으로 비판적인 의사소통집단이라는 전제っ를 언제나 선행적이며 암묵적으로 정립하고 인정하는 ぢ선험적 반성っ(transzendentale Reflexion), Habermas가 비판이론 구축의 토대로 삼는 바, ぢ비판적 관심っ과 연결된 대화 참여자들의 ぢ자기 반성っ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타당성 구조 해명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이성에 대한 그의 규정이 너무 불충분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이처럼 추상적이며 형식적으로 정의된 ぢ전체와 부분의 일치っ라는 의미의 ぢ옳음っ을 구체적 내용을 지닌 전통의 ぢ이성적임っ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인가, 따라서 ぢ전체와 부분っ이 한결같이 일치할 경우에도 전통이 ぢ비이성적일ぢ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등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앞서 이루어져야 할 작업은 치밀한 현상학적 분석을 토대로 다양한 유형의 해석학적 현상에서 기능하는 다양한 유형의 이성을 구별하는 일이다.


바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러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ぢ해석학적 현상의 총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함っ이라는 그의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해석학이 그의 주장처럼 ぢ모든 책임있는 철학함을 수반해온 하나의 새로운 비판적 의식っ(GW 1, 5)을 참으로 구현하고 있는 철학인지 아주 의심스럽다. 앞서 어떤 해석 대상이 출현하는 순간 ぢ무수히 많은 의미 연관っ과 인간 의식의 유한성 때문에 무수히 많은 ぢ검증 불가능한 선판단들っ이 출현함이 필연적이며, 충분한 시간 간격이 지나지 않으면 어떤 선판단이 타당한지 알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그의 해석학이 어떤 처방을 요구하는 절박한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어떤 진단조차 내리지 못하면서 속수 무책인 무비판적인 철학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ぢ나는 Heidegger의 근본 노선을 충실히 따르려고 하였다っ는 반복되는 -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Heidegger-Gadamer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 그의 주장이(GW 1, 258ff., 270ff., GW 2, 422)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ぢ해석학적 현상っ의 발생의 구조를 철저하게 분석하였고, 언어에 대한 Heidegger의 근본 통찰을 바탕으로 ぢ대화 이론っ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는 Heidegger의 해석학적 현상학의 - 더 나아가 Husserl의 발생적 현상학의 - 근본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Heidegger가 개척해놓은 ぢ깊고, 단단하고, 근원적인っ ぢ땅っ을 그가 ぢ도시화시켰다っ(urbanisieren)는 Habermas의 평가는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한편 그의 해석학의 전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그의 Heidegger 해석에 커다란 문제가 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아주 결정적인 점에서 Heidegger가 - 그리고 Husserl이 - 개척해놓은 ぢ깊고, 단단하고 근원적인 땅っ을 두루 살펴보지 않고 다른 길을 걷게 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Gadamer는 ぢ우리가 심려의 시간구조에서 어떤 특정의 실존 이념을 읽어내려 한다면, 이는 단적인 오해이다っ(GW 1, 267)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그의 견해는 정당하지 않다. 앞서 ぢ불안っ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심려의 한 계기인 정황성은 현존재에게 ぢ현사실성っ으로 ぢ던져진っ 그의 퇴락한 실존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자신을 ぢ기투해っ 나가야 할 목표인, 퇴락의 양상에서 해방된 근원적인 ぢ실존 이념っ(Existenzidee)(SZ, 232ff., 302, 313ff.)을 개시해주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 Gadamer의 견해와는 달리 - ぢ실존론적 해석의 모든 단계는 실존 이념을 통해 주도되는데っ(SZ, 302), 이는 후기의 존재 사유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바로 Heidegger의 해석학이 추구하고자 한 근원적인 이념을 이처럼 오해하기 때문에 그는 ぢ기투っ가 아니라, ぢ피투성っ(Geworfenheit)을 ぢ현사실성의 해석학의 핵심っ(die Pointe der Hermeneutik der Faktizitat)(GW1, 269)으로 간주하는데, 바로 이처럼 피투성을 현사실성의 해석학의 핵심으로 이해하면서 Gadamer가 발전시킨 것이 다름 아닌 그의 해석학의 근본 원리인 ぢ해석학적 의식っ이다. 따라서 Gadamer의 해석학에 Heidegger의 해석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ぢ근원적 기분っ에 대한 논의는 고사하고, 그에 대한 언급조차 나타나지 않는데, 이러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Husserl과 Heidegger의 철학을 대하면서 철저한 비판의식 없이 그들이 이루어놓은 ぢ전통っ을 ぢ도시화시켜가면서っ 단지 보존.발전시킴을 자신의 철학의 과제로 삼고, 거기에 나름대로의 ぢ선판단っ, 혹은 ぢ오해っ가 따르면서, 그가 결정적인 대목에서 이 둘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확인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Husserl과 Heidegger가 현대를 극단적인 ぢ위기っ({위기}), ぢ최고의 위험っ(GA 7, 37ff.)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면서 ぢ놀이 의식っ이 아닌, 오직 ぢ실존적 진지함っ에서 유래하는 철저한 방법론적 의식과 비판 의식을 통해 이를 극복함을 그들의 현상학의 과제로 삼고 있음과는 달리, 그는 역사를 っ사건이 스스로 일어남っ(ein Geschehen von der Sache)(GW 1, 489)으로서의 일종의 ぢ놀이っ(Spiel)(GW1, 489ff.)로 규정하면서, 현대가 처한 상황에 대해 그 어떤 진단조차 내리고 있지 않음을 보면 분명해진다.


5. 맺음 말: ぢ현상학적 해석학 논쟁っ의 성격및 필요성


이처럼 Husserl과 Heidegger가 철두철미 견지하고자 한 철저한 방법론적 의식과 비판 정신이 Gadamer의 해석학에서 퇴색하고 마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Gadamer가 ぢ해석학적 의식っ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것이 Husserl의 반성적 직관, Heidegger의 해석학적 직관과 필연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과 결합되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할 경우에만 그의 해석학에 들어있는 - 앞서 지적된 문제들 뿐 아니라, 그 이외의 - 많은 문제들이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간과는 단순히 그의 해석학에 문제를 안겨주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해석학 논쟁이 알려주듯이, 그의 직접적.간접적 영향하에서 전개되어온 196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철학의 전개과정에서도 - 무엇보다도 방법론적으로 -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오늘날의 철학이 앞서 지적되었듯이 극단적인 ぢ의사소통의 한계っ를 경험하면서 혼미한 상황에 빠지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오늘날 철학이 처한 이러한 혼미한 상황을 고려하면 ぢ현상학적 해석학 논쟁っ의 성격을 지닐 수 있는 Husserl-Heidegger-Gadamer에 대한 비교 연구는 이러한 혼미한 상황의 극복 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의 해석학 논쟁이 특정 몇몇 철학 분야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논쟁 참여자들의 서로 다른 철학적 배경 때문에 적지 않은 오해와 더불어 사태 해명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한 다소 성과없는 논쟁으로 끝나고 말았음과는 달리, 이러한 ぢ현상학적 해석학 논쟁っ은 반성적 직관, 해석학적 직관, 해석학적 의식의 문제등 보다 더 포괄적이며 근원적인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Husserl과 Heidegger가 견지하고자 한 철저한 방법론적 의식과 비판정신에 기초해 무엇보다도 방법론적으로 불필요한 오해을 극소화시키면서 진행되는 생산적인 논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a960926 (2007-03-11 18:12 작성, 2007-03-11 18:15 수정)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도형의 넓이나 선의 길이를 구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에우독소스(Eudoxus)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이 오늘날의 구분구적법에 가까운 ‘착출법’을 처음 사용하였다. 착출법이란 다음과 같다. 
  
임의의 어떤 양에서 반 이상을 없애고, 그 나머지에서 그 반 이상을 없애고, 이런 과정을 계속하면 결국에는 주어진 양에서 어떠한 작은 양보다도 더 작은 어떤 양이 남을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어떤 양 M이 주어져 있고 또 임의의 양 ε이 있다면 1/2≤r<1인 r일 때 적당한 자연수 N이 존재하여 그보다 큰 자연수 n에 대하여 M(1-r)^n < ε이 된다는 것이다. 곧 착출법은 이라는 극한에 해당한다. 에우독소스는 이러한 논리를 이용하여 원뿔의 부피가 원기둥 부피의 3분의 1이라는 것을 밝혀냈으며 기원전 3세기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는 원주율의 근사값을 소수점 이하 둘째 자리까지 구해냈다. 
  
오늘날의 구분구적법과 같은 방법을 처음 발전시킨 사람은 16세기 말 독일의 케플러(Kepler)이다. 비록 그 전의 사람들이 구분구적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케플러는 ‘무한소 해석’의 방법으로 그것을 더욱 정교화하였다. 이전에는 아무리 작은 값이라도 양을 갖는 것은 무시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생각이었음에 반해 케플러는 무한번의 계산 과정에서 점점 작아지는 아주 작은 양은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미적분학의 탄생과 해석학 
  
얼마 지나지 않아 17세기 초 프랑스의 데카르트(Descartes)에 의하여 수학의 모든 문제를 대수적 문제로 환원시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때부터 기하의 문제도 대수적인 문제로서 다루는 ‘해석기하’가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적분의 여러 가지 문제도 대수적인 문제로 환원되었다. 
  
17세기 말 영국의 뉴턴(Newton)과 독일의 라이프니츠(Leibniz)는 오늘날의 것에 가까운 미적분학을 창시하였다. 그들은 이전의 수학자들이 적분을 기하학적 문제로서 다룬 것과는 달리 그것을 산술적으로 다루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분과 적분의 관계를 밝혀내었고 미분과 적분의 관계를 밝혀냈다. 
  
뉴턴은 그의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무한급수도 유한 다항식과 거의 마찬가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무한급수에 의한 해석에는 동일한 내적 일관성이 있고 유한량의 대수학과 같은 일반법칙을 따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무한급수는 함수의 근사일 뿐만 아니라 함수와 동치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뉴턴은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711). 
  
항의 개수가 유한개인 방정식을 이용하여 일반적인 해석(곧, 대수)이 할 수 있는 어떠한 계산도 이 새로운 방법으로 무한 방정식을 써서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방법에도 ‘해석(analysis)’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에 포함되어 있는 논리는 다른 어떤 논리에 비해서 결코 불확실한 것이 아니고, 무한방정식도 부정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아주 한정된 논증 능력밖에 없는, 수명이 짧은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방정식의 모든 항을 쓰거나 구하는 양을 상상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중략)... 결론을 내리면 이 새로운 방법은 이른바 ‘해석술(analytic art)’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방법으로 도형의 넓이나 곡선의 길이 같은 것들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고 기하학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미분법의 역연산으로 적분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전에 배로(Barrow)나 그레고리(James Gregory)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뉴턴이야말로 본인이 발견한 새로운 무한해석으로 곡선의 기울기와 넓이 사이의 역관계를 해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적분법의 실질적인 창시자가 된 것이다. 뉴턴은 미적분뿐만 아니라 수학의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겼는데, 라이프니츠는 태초부터 뉴턴 시대까지의 수학시대에서 뉴턴이 이룩한 것은 수학사의 반, 그것도 훨씬 훌륭한 반쪽에 해당한다고 격찬하였다. 
  
라이프니츠는 뉴턴보다는 약간 늦게, 그러나 개별적으로 미적분을 발명하였다. 라이프니츠는 항상 적절한 기호의 사용은 사고를 돕는다는 것을 통감했고, 미적분 기호의 경우그가 선택한 기호는 특히 적절한 것이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뒤 비록 처음에는 차의 정도를 낮춘다는 의미로 x/d와 y/d를 사용했지만 x와 y에 대하여 생각할 수있는 최소의 차(미분)를 각각 dx와 dy로 나타내기로 하였다. 또 곡선 아래의 모든 세로선의 합에 대해서 처음에는 단지 omn.y(모든 y)를 섰으나 뒤에 ∫y로 바꾸고 나중에는 ∫ y dx로 바꿔 썼다. 여기서 적분의 기호로 사용되는 ∫ 는 sum의 첫 글자를길게 늘인 것이다. 그런데 접선을 구하는 데에는 calculus differentials(미소한 차의 계산)가 필요했고 구적에는 calculus summatorius(합의 계산) 또는 calculus integralis(통합하는 계산)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용어로부터 differential calculus(미분법)와 integral calculus(적분법)라는 이름이 생겼다. 
  
영국의 테일러(Tayler.B)는 18세기 초 미분법을 이용하여 함수를 무한 멱급수로 표현하는 방법을 소개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테일러 급수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멱급수로 표현된 함수의 미적분은 급수를 항별로 미분하거나 적분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며 급수의 항별 미적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평등수렴’이라는 조건이 필요함이 후에 19세기 초에 프랑스의 코시(Cauchy)에 의하여 밝혀졌다. 
  

해석학의 논리적 명료화 
  
코시 이전의 많은 수학자들은 무한소를 아주 작은 고정된 ‘수’로서 생각하였다. 그러나 코시는 무한소를 ‘변수’로서 명확히 정의하였다. 또한 오늘날의 것과 같은 극한 개념을 생각해냈으며 이를 이용하여 미적분학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다시 세웠다. 또한 급수의 수렴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여러 가지 급수 판정법을 발명했다. 코시는 연구 과정에서 발견한 내용을 알리기를 좋아했다. 오늘날 여러 가지 정리에 그의 이름이 붙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에 동시대 사람이었던 독일의 가우스(Gauss)는 완벽하게 확신이 서는 것만 발표하였다. 
  
코시보다 조금 앞서 태어난 프랑스의 푸리에(Fourier)는 18세기 말 미분 가능하지 않더라도 급수를 전개할 수 있는 푸리에 급수를 발명하였다. 푸리에는 자신의 이론을 발표한 초기에 다른 수학자들로부터 논리의 빈약성에 대한 비판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그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하여 다시 발표하였다. 또한 19세기 초 같은 나라의 디리끌레(Dirichlet)는 적절한 조건 아래에서는 푸리에 급수가 테일러 급수보다 훨씬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밝혔다. 
  
디리끌레는 처음으로 함수를 대응으로서 정의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전까지 직관적인 관점에서는 미분이나 적분을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함수의 예를 들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대표적인 함수는 유리수인 점에서 불연속이고 무리수인 점에서 연속인 함수이다. 이는 동시대에 수학자들이 미적분을 더욱 논리적으로 다듬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때부터 미적분학은 단순히 도형의 면적을 구하거나 그래프의 접선을 구하는 것이 아닌 함수의 특성을 분석하는 해석학으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디리끌레 이후로 영국의 해밀턴(Hamilton)은 벡터해석을 창시하였으며 독일의 바이에르슈트라스(Weierstrass)는 수학의 엄밀성을 강조하고 해석함수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또한 스토크스(Stokes)와 하이네(Heine)도 해석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독일의 리만(Riemann)은 어떤 구간의 무한히 많은 점에서 불연속이면서 적분이 존재하는 그리고 해당 구간의 무한개의 점에서 도함수를 갖지 않는 연속함수 F를 정의하는 f를 제시하였다. 이 함수의 적분에 대해서는 곡선의 아래쪽 넓이에 대하여 주로 기하학적 감각에 의해 유도되었던 코시의 정의보다도 더욱 주의 깊은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어떤 구간에서 상합과 하합으로 정의하는 오늘날의 정적분을 유계함수가 적분가능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제시한 리만을 기리어 리만 적분으로 부른다. 
  

실수의 정의와 무한의 산술화 
  
19세기 말 해석학을 기하학으로부터 탈피시켜 산술적 논리로서 명료하게 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실수의 정의였다. 즉 먼저 수열의 극한을 어떤 실수로 정의하고 나서 실수를 유리수열의 극한으로 정의하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전제에 기초를 두고 논점을 세우는 오류(petitio principii)’였다. 메레이(Méray)는 그의 저작 ‘무한소해석의 새 이론(Nouveau précis d'analyse infinitésimale)’에서 수렴이나 실수의 외적 조건에 호소하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무렵 데데킨트(Dedekind)는 실수가 선분 위의 점과 일대일 대응된다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선분은 그 위에 있는 한 점에 의해 두 부분으로 분할되며 역으로 선분이 두 부분으로 분할되면 그 사이의 점은 반드시 하나만이 존재하게 된다. 유리수 집합을 둘로 나누면 그 사이에는 반드시 한 점만이 존재하게 되는데 유리수 집합은 조밀하기 때문에 그 사이의 점은 유리수가 될 수도 있고 무리수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유리수의 분할된 한 집합은 다른 한 집합을 유일하게 결정하므로 결국 유리수의 한 부분집합만으로도 유리수와 무리수를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실수의 완비성 공리이다. 
  
실수의 정의 외에 또 다른 문제점은 무한의 산술화이다. 그때까지 많은 수학자들이 무한을 언급하고 사용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양이 매우 커지는 상태, 또는 임의의 수보다 더 큰 수 정도로 인식되었을 뿐 정확히 정의되지는 않았다. 데데킨트의 친구이자 후배였던 칸토르(Cantor)는 유한집합에서 사용하던 산술을 무한집합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집합론을 창시하였다. 그때까지 무한집합은 자기 자신의 진부분집합과 일대일 대응되기 때문에 무한집합의 존재는 모순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칸토르는 이것을 모순이 아닌 무한집합의 한 성질로 보고 그것을 무한집합의 정의로 삼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칸토르의 집합론을 무한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칸토르가 집합론에서 미적분과 무한급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무한에 대한 그의 접근 방법은 해석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해석학에서 다루는 수의 집합이 무한집합이기 때문에 칸토르의 집합론은 해석학의 이론을 다듬는 데에 중요한 이론적 기저가 되었다. 
  
물론 칸토르의 집합론이 수학자들에게 곧바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특히 그 당시 권위 있는 수학자였던 크로네커(Kronecker)는 칸토르를 심하게 비난하였고 실재하지 않는 무한을 다룬 칸토르의 집합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칸토르의 절친한 데데킨트는 그의 이론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뒤늦게 20세기 초에야 칸토르 이론은 수학자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힐베르트(Hilbert)는 ‘그 누구도 칸토르가 만든 이 낙원에서 우리를 추방할 수 없다’며 그를 칭찬하였다. 칸토르에 의하여 무한이 산술화되자 수학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칸토르가 집합론을 발표한 때를 현대 수학의 시점으로 본다. 
  

추상화된 공간에서의 해석 
  
실수를 적절히 정의하는 문제와 무한의 산술화 문제가 해결되자 수학자들은 더욱 추상적인 공간에 해석적 방법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르벡(Lebesgue)은 실수 집합이 아닌 일반적인 집합에서의 측도(measure)를 정의하고 이것을 이용한 적분을 생각하였다. 특히 실수집합 위에서의 측도는 일반적인 구간의 길이나 구간들의 합집합으로 표현되는 집합의 크기를 일반화한 것이 된다. 이렇게 집합에 측도가 주어진 공간을 해석적으로 다루는 수학의 분야를 측도론이라고 한다. 
  
힐베르트는 무한수열의 공간에서 각 수열을 하나의 원소로 하는 ‘힐베르트 공간’을 생각하였다. 그는 이 공간에 적절한 연산과 거리를 정의함으로써 실수집합 위에서 해석을 할 때처럼 힐베르트 공간 위에서 해석을 할 수 있었다.
  
이후 수학자들은 해석학의 이론을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거리공간의 개념을 만들었다. 거리공간은 임의의 집합에 적절한 거리함수를 정의한 것인데 여기서 거리함수란 실수의 절대값과 비슷한 개념이다. 힐베르트 공간뿐만 아니라 많은 함수공간에 거리가 정의될 수 있다. 또한 함수공간을 정의역으로 하는 함수를 정의할 수 있는데 이러한 함수를 범함수(functional)라고 한다. 그리고 함수공간을 해석적으로 다루는 수학의 분야를 함수해석학이라고 한다. 
  
수학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거리공간을 더욱 추상화하여 위상공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위상공간에 거리는 정의되지 않고 단지 개집합과 폐집합, 그리고 집합 사이의 함수만 존재할 뿐이다. 거리공간에서는 거리함수와 부등호에 의하여 개집합이 정의되지만 위상공간에서는 처음부터 개집합의 개념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http://www.math.snu.ac.kr/dept/Html/analysis.htm 
 

1. 해석학 개념

  일반적으로 해석학(Hermeneutik)이라는 용어는 17세기에 이 말이 처음 등장한 이래 주해(Auslegung)의 학문(혹은 技術), 다시말하면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다루는 학문(Lehre vom Verstehen und Auslegen von Texten)’으로 간주된다. 이때 현대 텍스트학에서 처럼 텍스트라는 개념이 문자와 구술의 구분없이 언어기호로 되어 있는 모든 언어구조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면 텍스트의 해석은 우리가 늘 경험하는 일상사와 다름없다. 해석은 문학 혹은 넓은 의미의 텍스트를 학문적으로나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매일 먹는 빵(das tägliche Brot)”과 같다.1)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상대방이 한 말을 파악하고 그것을 토대로 스스로 적절한 표현을 찾는 일상의 경험은 우리의 삶이 바로 해석을 통해 영위됨을 보여준다. 해석은 우리가 함께 행동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공유하는 데 필요한 기본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혹 해석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 되물어보거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오해가능성을 제거할 수 있다. 아무튼 이해에 근거를 둔 상호의사소통은 사회구성원으로써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중심된 축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이해의 문제는 사회적 일상사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나 문학 처럼 전승되어 온 가치를 이해하려 할 때에도 등장한다. 아마 텍스트이해로서의 해석 문제가 가장 예리하게 다가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성서해석과 법률해석일 것이다. 이 경우에 해석은 언제나 ‘주체에 의한 텍스트의 받아들임’이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옳음에 대한 요구에 직면할 경우에 해석학은 텍스트를 이해하는 기교론(Kunstlehre)으로 성격이 규정되며 해석은 해석자의 자의성과는 무관한 체계나 방법이된다. 이처럼 19세기 말까지 해석학이라는 용어는 주로 기교적(kunstmäßig) 해석의 규칙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의 형식을 지칭하였다. 즉 해석학이 지향하는 바는 규범적 혹은 技術的 특성을 지녔었다. 이때 해석학의 역할은 해석이 이루어지는 학문들에 방법적인 지침을 제공하여 해석자의 임의성이나 주관적 판단의 오류를 방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하면 해석학은 텍스트의 해석에 관여하는 기존 학문들의 보조학문 쯤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리하여 르네상스이래 신학적, 법률적, 철학적 해석학 등 영역해석학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해석의 기교라는 생각은 교부신학(敎父神學 Patristik)을 넘어 희랍의 음유시인, 더 나아가 알레고리적인 신화해석을 전개한 스토아철학으로 그슬러 올라간다. 방법적인 해석기술이 제공되는 모든 곳에서 해석학은 광범위하게 언급된다.

  어원상으로 볼 때 ‘해석학’이라는 말은 화자(話者), 사자(使者), 설명자(說明子), 중개자(仲介者) 등의 뜻을 지닌 희랍어명사 'hermeneus'와, '주해하다' '설명하다' '전달하다' '번역하다' 등을 의미하는 희랍어동사 'hermeneuein'에서 유래한다. 이 희랍용어에 상응하는 라틴어로서는 'interpres'와 'interpretari'가 있다. 이러한 용어들이 지닌 기본적인 뜻은 다음 두가지이다. 첫째, 나에게 알려져 있지 않던 것이 나에게 알려지다[=내가 어떤 것을 이해하다(verstehen)] 둘째, 내가 모르는 것을 누군가가 나에게 알게 해 주다[=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것을 설명해주다(erläutern)]. 해석(Interpretation)과 해석학(Hermeneutik)과의 차이는 전자가 대상인지에서 출발하여 이루어지는 이해의 실천행위를 의미하는 반면에 후자는 “메타차원에서 해석의 개념을 성찰하고 체계화한다.”2) 해석학의 개념이 독일 해석학의 게보 상에서 정의 내려진 것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슐라이어마허(Fr. Schleiermacher)의 정의: “어원을 통해 살펴 볼 때 해석학이라는 용어      는 아직 학문적으로 확립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가)자신의 생각을 올      바르게 진술하는 기술(Kunst) 나)어떤 이의 말을 제 3자에게 올바르게 전달해 주는 기      술 다)다른 이의 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기술 등이다. 이 용어의 학문적 개념은 다)에      해당된다[...].”3)

② 이해 개념에 대한 딜타이(W. Dilthey)의 정의: “이해는 인식이라는 용어의 일반개념이      다. 이때 인식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사람들이 보편적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과정      으로 간주된다. 명제 1: 우리는 영적 삶(seelisches Leben)이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표      현된 것(sinnlich gegebene Äußerungen)에서 그 영적 삶을 인식하는 과정을 '이해'라고      부른다. 명제 2: 영적 삶이 오감을 통해 파악가능하도록 표현되는 데에는 여러 방식이      있지만 이해는 인식방식의 주어진 조건들을 통해 동일한 공동의 특성을 지녀야 한다.       명제 3: 문자로 고정된 삶의 표현(Lebensäußerungen)을 기교적으로 이해하는 것(das        kunstmäßige Verstehen)을 우리는 주해(Auslegen) 혹은 해석(Interpretation)이라 부른      다.”4)

③ 하이데거(M. Heidegger)의 정의: “해석학은 정보에 순응하면서 정보를 주는 설명이다       (jenes Darlegen, das Kunde bringt, insofern es auf eine Botschaft zu hören vermag)”      5) 


  각각의 정의들을 살펴 보면 우선 슐라이어마허는 나중에 가다머가 그랬던 것 처럼 해석학과 수사학(Rhetorik)의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정의의 가)와 나)].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것은 수사학의 과제인데 이러한 과제까지 해석학이 포용하고 있다. 그러나 수사학에서는 ‘전달 자체’의 올바름만 중시될 뿐 ‘전달내용’의 올바름은 문제되지 않는다. 수사학은 간혹 조작이나 가식의 편에 서서 전달의 효과만 극대화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에 포함할 경우에는 해석학이 극단적인 기교성에 빠지게 된다. 딜타이는 우리삶의 표현(Lebensäußerungen)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을 해석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이해를 개인적 인지 차원에서 정당화하기 보다는 이해의 공통성에 무게를 둠로써 슐라이어마허처럼 여전히 이해의 기교론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방법’에 입각하여 정신과학의 독자적인 학문성을 정립하려고 한 딜타이는 “자연은 설명(erklären)되는데 비해 정신적 삶은 이해(verstehen)된다”6)고 규정함으로써 설명과 이해를 각각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에 고유한 인식방식으로 자리매김 한다. 한편 하이데거는 독자가 자신의 생산력을 가동시킬 때 비로소 완전한 이해가 가능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정보 스스로가 어떤 것 -과거사(過去事)이든 텍스트든- 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표현 속에는 정보에 대항하지 않고 정보의 요구에 따르고 순응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나중에 가다머에게 까지 연결되는 이러한 이해관은 해석학에 대한 비판의 불을 당긴다.


2. 학문영역의 해석학


  전체 학문체계 내에서 해석학은 기초학문(Basiswissenschaft)의 그룹에 속한다고 말한다. 해석학은 문헌학의 테두리[텍스트학, 문예학, 문학사, 언어학, 시학, 미학 등]에서 만이 아니라 신학, 역사학, 법학, 예술사 등에서도 필요하다. 해석학을 ‘이해에 관한 이론’으로 보고 이해를 인간이 행하는 보편적 활동으로 간주한다면 여러가지 특수한 해석학이 생길 수 있다. 예를들어 물리학자가 이론적 수리적 요소들을 실험데이타들과 결합하여 특수한 이해행위를 수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해석학적 물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외에도 해석학적 심리학이나 해석학적 교육학 등도 가능하다. 이때 하나의 학문영역을 특수화해 주는 ‘해석학적hermeneutisch)'이라는 용어는 '비판적', '변증법적', '실증적' 등과 대칭되는 위치에 서서 학문성과 先학문적 현상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해석학적 요소를 학문성과 대비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해석학적 요소는 학문적 실행의 성분(das Ingredienz wissenschaftlichen Vollzugs)으로서 학문내적인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7)

  해석학의 학문적 우산이라 할 수 있는 철학에서 해석학은 역사가 훨신 짧다. 물론 해석학에 대한 연구는 그 이전에도 이루어졌지만 이들은 거의 응집력있는 철학적 구상으로 간주되지 못하였다. 비록 해석학의 원조들인 슐라이어마허(Fr. Schleiermacher)나 드로이젠(J.G. Droysen)이나 딜타이(W. Dilthey)가 철학에 있어서 해석학적 문제의식에 결정적으로 지평을 넓혀 놓기는 하였지만 그들도 해석학 철학이라는 타이틀 아래에 자신의 해석학을 정립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가다머의 스승인 하이데거도 마찬가지다. 후기의 하이데거는 “해석학철학은 가다머의 몫이다”라고8) 말함으로써 자신이 선 위치를 제자에게 넘겨 준다. 가다머는 해석학에서 기존의 입장을 전복시키는 사고의 전환을 구축하면서 하바마스의 이데올로기비판 측과 논쟁을 벌린다. 특히 가다머는 하이데거적 사고로부터 결정적인 연구의 단초를 얻었다. 그래서 가다머는 “초기 하이데거에 의해 전개된 어법과 연관하여 설정한 자신의 관점을 ‘해석학적(hermeneutisch)'이라고 지칭한다”9)고 말한다. 그러나 가다머해석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 이전의 해석학 전통을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해석학의 역사를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과 낭만주의를 거쳐 해석학철학으로 정립되어 가는 목적론적 과정으로 기술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고대와 교부신학에서는 단편적인 해석학적 규칙들 만이 있었는데 루터의 종교개혁은 처음으로 체계적 해석학의 전개를 위한 계기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발전은 슐라이어마하에 이르러 이해의 일반적 기교론(Kunstlehre)으로 보편화되어지며 딜타이에서는 해석학이 비로소 정신과학의 일반적 방법론으로 자리매김된다. 그리고 하이데거에 이르러서는 해석학이 처음으로 존재론의 기반 위에 서게 된다. 그는 인간의 실재성을 토대로 해석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들 경험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과 언어성(Sprachlichkeit)에 주목한 그의 해석학은 가다머에 이르러 철학적 해석학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존재론의 기반 위에서 해석학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가다머 해석학은 곧 이데올로기비판측에 의해 새로운 도전을 받게된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구상에는 하이데거의 실사해석학(實事 Hermeneutik der Faktizität)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는 특히 ‘해석학적’이라는 말을 하이데거의 어법(Sprechweise) 개념에 의거하여 사용하면서 자신의 주저『진리와 방법』을 실사해석학의 후계자로 만든다. 이런 면에서 보면 가다머에 더욱 큰 영향을 준 것은 후기하이데거를 대표하는『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이 아니라 그의 실사해석학이다. 사실 후기의 하이데거는 해석학철학과 거리를 두면서 해석학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존적 사고에 집중하는 후기의 하이데거에도 해석학적 통찰은 여러 곳에서 관측된다. 후기의 하이데거는 그 당시 철학이 형이상학에 종속되어 있는 상황을 역사성을 통해 존재론적으로 재편하는 것을 해석학적 통찰과 동일시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해석학적 전환에 관한 인식을 초기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문제제기와 연결시킨 것은 순전히 가다머의 공적이다. 그는 하이데거와 더불어 하이데거에 반대한다. 다시말하면 해석학적 사고를 부차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역사적 실사성(實事性)의 해석학을 실행하는 데에는 찬성한다. 가다머는 존재사(Seinsgeschichte)의 구상이 역사의식의 자기관과 이러한 자기관을 표현하는 정신과학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파악하려 한다.

  현대 철학의 복잡한 현상들 속에서 큰 줄기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줄기를 잡으려는 시도들은 끊임없이 행해졌다. 20여년 전 아펠(K.-O. Apel)은 3가지 큰 방향으로서 맑스주의(der Marxismus), 분석철학(die analytische Philosophie), 현상학적/실존적/해석학적 사고(das phänomenologisch-existentialistisch-hermeneutische Denken)를 언급하였다. 이 세 큰 줄기 가운데 철학적 맑스주의는 활동력을 상실하였다. 맑스와 루카치를 이은 비판적 사회이론이 남겨 놓은 자산들은 오늘날 역사적 맑스주의로서 대변되지 않는다. 아펠이 3분법을 제안한 60년대에 이미 맑스이론은 대륙철학을 이끌어가는 독일과 프랑스철학계에서 시대사적 이유로 폐기되기 시작하였다. 예를들어 하버마스의 경우 70년대에는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 관심을 보였던 반면에 오늘날에는 자신의 비판이론을 위해 해석학이나 분석적 언어화용론에서 논점을 끌어들이려 한다. 압펠 역시 오늘날에는 선험해석학(Transzendentalhermeneutik) 혹은 선험화용론(Transzendentalpragmatik)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규범적 이론들을 전개한다.         

  반면에 분석적 전통과 현상학적/실존적/해석학적 전통은 지금까지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때 후자의 전통이 세자리로 특성화되어 있는 것은 역사적 발전에서 파악될 수 있다. 대륙철학은 맨먼저 스스로를 현상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고(Husserl, Scheler, Lipps, Heidegger) 전후 초기에는 현상학적 관점의 구체화를 표방하면서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Jaspers, Heidegger, Merleau-Ponty, Sartre). 그러다가 그 자리를 넓은 의미의 해석학철학이 차지한다(Heidegger, Gadamer, Habermas와 Apel의 선험해석학). 지금은 해석학이라는 개념 하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시도들이 언급된다: 가다머의 철학, 가다머의 영향 하에 이루어진 실천철학의 복권(H. Arendt, J. Ritter, M. Riedel, R. Bubner =Neoaristotelismus), 학문이론 내에서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경향(Kuhn, Feyerabend), 언어철학 내의 상대주의(Rorty, Davidson), 니체에서 시발된 신구조주의적 아방가르드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이 모든 것이 오늘날 해석학적 자산으로 간주된다.

  주로 앵글로색슨 국가들에서 나타난 분석철학도 대륙적-해석학적 철학과 더불어 널리 자리를 잡았다. 현재 분석철학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자기관의 수정을 가져왔다. 후기 비트겐슈타인(Wittgestein), 굿맨(Goodman), 데이비슨(Davidson)등을 통해 화용론적 전통(Peirce, James, Dewey)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분석철학은 점차 논리적 언어비판이라는 초기강령에서 이탈하고,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하여 구속력있는 진리 혹은 책임감있는 행위와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일반적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한다. 오늘날 분석철학에는 정확한 강령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의 전통이 제도적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분석철학은 대륙적인 선험철학적 사고에 큰 자극을 준 역사의식 속에 휘말리게 된다. 선험해석학과 분석철학은 모두 유한성의 화용철학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이러한 현상은 그들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안겨 준다. 그리하여 본석철학 진영의 자기해체 혹은 분석철학과 해석철학의 결합 등이 운위된다. 물론 아직 양자의 접근을 통해 새로운 철학영역이 형성된 것은 없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 즉 역사의식을 고려하면서 철학의 고전적 보편성요구를 이행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해석학 철학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해석학이 오늘날의 철학에 기여 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보편성’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사실 이해는 보편적(universal) 현상이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이해를 행한다. 이러한 점은 순수한 텍스트이해에서는 간과되었던 사실, 즉 이해는 생활실천적 관심(lebenspraktische Interessen)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이해는 삶의 세계에 편재하는(lebensweltlich) 과정이며 해석학은 이러한 과정을 이론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이해는 실천적 삶의 관심 속에서 자라난다. 또한 그는 사람은 서로 접촉하면서 살아가기에 서로서로를 이해시켜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의도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해를 사람과 사람 간 의사소통의 문제로 한정하는 것은 이해 개념의 영역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수긍하기 어렵다. 주체간 소통은 이해의 한 부분일 뿐이다.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는 필연적으로 사상(事象 Sache)이10) 언급되는데, 이러한 사상(事象)도 분명히 이해의 대상이다,

  여러 사람의 입에 회자하고 있지만 ‘보편성요구(Universalitätsanspruch)’ 개념은 대단히 불확실하다. 보편성이 언어와 역사성과 자신의 철학에 적용되는 것으로 본 가다머에 있어서도 하버마스나 데리다와의 논쟁에 있어서도 보편성요구는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보편성과 더불어 진술의 보편타당성에대한 요구가 의미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해석학적 보편성요구를 재구성하여 이것이 '모든 것은 역사적으로 조건화되어 있다'는 보편타당한 명제 속에서 정점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이 명제가 일반적으로 통용된다면 이것은 역사적으로 제한되며 보편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이 명제 자신의 요구에도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해석학의 보편성요구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이러한 논점은 역사의식의 일반화가 근거가 희박한 모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사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모든 것이 역사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보편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이미 말한 바처럼, 그러한 형식논리적인 논점들은 논리성의 도움으로 자신의 역사성을 기만하는 일종의 “형식적 변증법적 기습공격시도(die formalen dialektischen Überrumpelungsversuche)”11)와 같다. 하이데거의 생각을 계속 이어 가면서 가다머는 객관적인 진리를 스쳐 지나가는 형식적 겉치레를 치료한다.

  이해의 타당성에 대한 요구는 전승된 가치의 이해[예 문학]에서도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성숙한 독자는 비판(Kritik)을 통해 자신의 이해에 최대한의 타당성을 부여하려 한다. 이해는 근본적으로 이해대상을 타당성요구(Geltungsanspruch)의 준거에서 바라보는 속성을 지닌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학문들은 이해대상에대한 해석의 타당도에 의거하여 학문구조를 유지하기위하여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이해준거들을 확립하여 왔다. 예를들어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이해할 때 역사는 역사대로 문학은 문학 대로 스스로 설정한 준거에 따라 그 사건을 이해한다.  비록 예술은 준거의 획일화에서 벗어나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예술비판도 다양한 대상을 체험하면서 의식적이든 비의식적이든 미적판단을 위한 많은 전범들을 만들어 왔다. 하버마스는 해석학의 보편성요구를 반박하는 데 이때 그는 보편성에 대한 플라톤적/아우구스티누스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는다. 또한 해석학은 상대주의라는 비난을 받는다. 상황맥락으로부터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상대주의적이다. 왜냐하면 실제적 언어사용을 둘러 싸고 있는 상황맥락이나 의미지평을 고려하는 것은 진리탐색에 대한 장애가 아니라 촉매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장을 상황맥락에서 파악하고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과 자신의 해석가능성을 대비시키지 않으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의미설정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수많은 해석가능성을 한정지어 간다. 만약에 이러한 해석가능성에 대한 제한이 없으면 비록 해석절차가 아무리 논증적이고 논리적으로 진행되더라도 우리는 오해가 일어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해석을 위해 논증의 외피를 씌우는 것은 쉬운 일이다.  철학의 과제는 단지 논증규칙을 올바르게 활용해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임무는 사상(事象) 자체에 대한 시각에 의해 유도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독특한 진리의미와 다른 사람이 추구하는 사상(事象)에 참여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어떤 표현이 이루어졌을 때 이 진리의미와 사상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은 해석학의 보편적 문제이다. 언어 자체는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오늘날 해석학이 철학의 중심영역으로 떠오르게된 것은 해석하는 현상이 우리 주변에 실제로 산재한 데 있다. 니체의 보편적 관점주의 이래(Es gibt gar keine Fakten, sondern nur Interpretationen)12) 해석은 철학이 뛰어 다니는 가장 넓은 마당이다. 니체는 우리들의 세계경험이 기본적으로 해석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한 최초의 현대인이다. 성경해석이나 문헌학처럼 순수하게 해석지향적인 학문을 차치하고서라도 해석의 문제는 모든 학문영역에 두루 제기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도 자주 해석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학문의 경험적 귀납적 자기관이 학문이론적 입장조율을 통해 수정되면서 이제 현상과 물자체(Ding an sich)를 구분한 칸트 철학으로부터 해석학의 중요성이 도출된다. 지식은 우리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사물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의 도식화이며 동기화된 재구성이다. 칸트에 있어서 이러한 재구성은 객관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언어적인 인식은 언제나 역사적 문화적 개인적 관점주의(Perspektivismus)를 따르기 때문에 객관성은 사물의 완벽한 재현 보다는 시간성의 상대주의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관점주의도 최종적 합의점이 아니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관점은 권력의지의 의미에서 세계의 준비(ein Sichzurechtlegen der Welt)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심을 받는다.           

  니체의 범해석주의(Panhermeneutismus)는 일종의 실용주의로 나아가면서 분석철학과 해석학철학에서 실천적 사고의 확장을 예고해 준다. 모든 관점이 지닌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관점이 삶에 대한 가치이며 관점이 권력의지의 안정화에 기여한다는 점에 따른다. 이러한 관점주의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허무주의나 숙명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관점이 모두 동일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없다. 어떤 관점은 다른 관점 보다 더욱 풍요롭기 때문에 이런 관점을 사상의 존재자체(Ansichsein)와 동일시하면 잘못된 판단을 낳을 수 있다. 보편적인 관점주의는 극단적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현대적 세계상의 근본적인 특성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면 현대적 세계관은 성찰성(Reflexivität)을 특징으로 한다. 우리의 지식이란 세계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지식이다. 지식은 세계 자체와 동일하지 않으며 지식은 세계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신화적인 세계관은 세계의 해석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세계자체와 동일하다. 이러한 성찰성의 결핍(Reflexionsmangel)을 하버마스는 세계상의 구체화(Reifikation des Weltbildes)13)라는 도식으로 표현한다. 탈신화적인 현재적 세계상에서는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해석으로서 등장하면서 사물 자체보다는 그 사물에대한 해석이 더욱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된다. 우리의 세계상이 원칙적으로 해석학적 지평을 지닌 것으로 보는 데 있어서 하버마스와 니체는 일치한다. 둘다 결론 도출은 다르지만 해석학적 문제의 보편성을 확신한다. 철저한 관점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는 하버마스는 우리가 관점으로 의식되는 각각의 세계관에 대해 논의를 거친 후 의견합일성에 이른 관(觀)들을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적 의견합일성은 인위적으로 -예를 들면 권력의 개입 등- 도출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실제적 의견합일성과 진실된 의견합일성을 동일시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진리이념은 하나의 이상적 의견합일성에대한 선취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상성(理想性)에 대한 연결은 간혹 비판적 잣대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진실되고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문제시 되기도 한다.

  반면에 니체는 처음부터 형이상학적 이상성은 포기한 채, 권력지향적이기에 원칙적으로 이질적인 관점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관점주의는 그 자체로 관점주의에 모순될 수 있다. 왜냐하면 관점주의는 스스로 하나의 관점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관점주의에 대한 의심은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세계관은 권력관심에 의해 조건화된 관점이 아니냐 하는 의구심은 모든 구상에 대해 비판적이게 한다. 관점주의에 의구심을 갖는 태도로 인하여 관점은 하나의 일방적인 관점이 더 이상 아니다.  관점주의의 관점은 무조건 적합성의 포기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관점은 비판철학 혹은 해석학철학의 관점으로서 그것의 과제는 불완전한 인식요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오늘날의 스펙트럼에서 보면 니체는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k des Verdachtes)’을 대변한다. 이 용어는 파울 리꾀르(Paul Ricoeur)가 직접적인 의미를 불신하고 의미를 무의식적인 권력의지와 연관시키는 해석전략을 특징지우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리꾀르가 볼 때에는 니체 외에도 의미를 무의식적 충동과 연관시킨 프로이드나 의미를 계급관심에서 찾는 마르크스도 '의심의 해석학(Verdachtshermeneutik)'의 대표자들이다. 리꾀르는 '신뢰의 해석학 (Hermeneutik des Vertrauens)'을 여기에 대비시킨다. 신뢰의 해석학은 의미를 있는 그대로 현상학적으로 받아들인다. '의심의 해석학'이 시선을 뒤로 향하게 하면서 의미를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에너지로 환원시키는데 비해 신뢰의 해석학은 시선을 전면으로 향하게 하면서 의미가 우리에게 열어주는 세계 자체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신뢰의 해석학은 직접적인 의미의 유혹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해석학은 우선은 의심의 해석학이 주는 교훈을 따른다. 즉 신뢰의 해석학은 잘못된 의식의 환상을 파괴하려는 의심의 해석학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는 의미의 문제가 완전히 열려있게 한다.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식은 언제나 지향성(Orientierung)을 추구한다. 탈환상적 의식은 비판적 신뢰 속에서 진리요구의 의미해명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의미신뢰는 보편성에 대한 요구를 제기한다. 진실된 의식과 관련하여 파괴가 항상 전개된다는 점에 있어서 의심의 해석학은 보편성의 요구에 종속되어 있다. 해석학적 의식의 보편성 차원은 이러한 문제지평에서 표명된다. 해석에대한 성찰은 오늘날의 철학에 보편성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요구한다. 우리들의 세계연관이 지닌 해석학적 기본성격을 테마로 다룬다고 볼 때 해석학은 철학적 보편주의(philosophischer Universalismus)와 무관할 수 없다. 해석학은 철학적 보편주의를 실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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