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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류학 소식

교컴지기 | 2014.02.24 06:20 | 조회 1153 | 공감 0 | 비공감 0

제13권 제2호(통권 제50호) 2007. 6.

 

교육인류학소식

Anthropology of Education Newsletter

 

실천 현상학: 의미와 이해의 공명학

 

이근호(교육과정평가원)

 

일반적으로 현상학은 어렵다고들 말한다. 그 기본 개념이 어렵고, 논리 전개가 복잡하며, 우리의 삶과 그것 사이의 구체적 관련을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이 발전되어 온 양상을 보면, 그러한 불만은 오히려 약소한 것이었다고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이는 근․ 현대 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현상학이 우리나라의 교육 연구에서 크게 기여하지 못했던 까닭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자신도 석사 과정 시절에 두세 권의 개론서를 읽다 지쳐 포기했던 것이 현상학이었다. 난해함보다는 공허함이 그 때 내가 받았던 인상이었다.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내가 내린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접근하기 어려웠던 현상학을 내 평생의 학문적 반려로 맞게 도와준 분이 내 스승 반 매넌(van Manen) 교수이시다. 그는 난해한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을 교육 연구의 실천적 방법론으로서 정립하고자 평생을 노력한 분이며, 그와 같은 전환적 발상은 교육 연구의 지평을 한층 확대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따라서 내가 하는 것으로서의 현상학의 뿌리는 응당 그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반 매넌의 교육 현상학은 실천 현상학을 표방한다. 정통 철학으로서 현상학을 추구하는 일은 그 자체의 목적과 의의가 있다. 그러나 교육실천가로서 우리가 현상학에 대해 갖는 관심은 철학자의 그것과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육 현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현상학의 관점과 태도를 바탕으로 교육 현상을 연구한다. 그래서 가끔 주어지는 “정통이 아닌 응용현상학”이라는 비아냥거림에도 흔들림이 없다. 우리의 노력이 교육의 실제를 이해하고 개선하는 일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한, 정통과 이단의 논쟁은 우리에게 부질없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실천 현상학이 지향하는 현상학적 관점과 태도란 무엇인가? 우선 현실 세계 혹은 생활 세계(life world)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들 수 있다. 오랫동안 교육 연구의 흐름과 관행은 우리가 실제로 먹고, 마시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부대끼는 것으로서의 삶의 세계가 아니라 이론적 세계에 고착되어 왔다. 예컨대, 전통적인 연구 체제에서의 연구 관행을 살펴보자. 의례히 상당한 정도의 선행 연구들, 기존의 이론들이 조사되고(문헌연구, survey), 그러한 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연구 문제를 형성하고, 구체적 변인들을 설정하며, 연구 설계와 가설이 마련된다. 이미 문제 형성을 포함한 연구 과정의 대부분이 우리의 실제적 관심을 반영하거나 혹은 우리가 일상에서 당면하는 삶의 문제들로부터 벗어나 있다(보통은 기존에 연구되지 않은 변인들이 무엇인가에 의하여 연구문제가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관행은 기존의 이론 체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불러오기도 한다. 기존의 이론적 틀 속에 함몰 되어서 교육 현실을 외면하고, 교육의 실제적 과정을 무시하고, 교육의 실천 양상을 도외시하는 경우도 생긴다. 혹은 공허한 이론적 논의 속에 갇혀서 엄연한 삶의 사실을 들여다보지 못하며, 기존의 논리를 벗어나는 어떠한 것도 반 지식의, 반 진리의 멍에를 씌워 배척하는 태도로 일관하기도 한다.

반면에 현상학은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모든 종류의 이론화 작업은 필연적으로 삶으로부터 한 걸음 비켜나는 일을 포함한다. 그러나 현상학은 이렇게 잠시 비켜서는 일을 통해서 얻어진 이해를 다시금 삶으로 환원시켜 가는 과정을 통해서 연구와 삶의 연속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기존의 이론에 함몰되고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제적 삶의 세계를 바탕으로 연구 문제를 형성하고, 그러한 실제적 관심이 사실상 연구과정을 인도하도록 요구한다.

이렇게 연구와 삶의 연속성이라는 중요한 지향은 실천 현상학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여준다. 현상학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 세계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의 의미를 드러내고, 그렇게 드러난 의미들을 이해하고 전유하는 일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신념한다. 그것은 최상의 삶의 형식을 처방하고, 우리의 삶을 그 형식에 인위적으로 맞추어 가는 것과는 다르다. 현상학은 궁극적인 삶의 형식은 있을 수도 혹은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고 파악한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 자체이며,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나가기 위한 초석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반성(reflection)을 통해서 인도된다.

따라서 반성은 실천 현상학의 중요한 도구이자 방법론적인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이다. 실천 현상학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세계는 일상적 삶의 세계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세계는, 일상적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이, 우리의 특별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것으로서 또는 루틴(routine)으로서 살아내는 세계이기도 하다. 아무런 의미도 발견할 수 없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하게 어제처럼 오늘을 살아내는 세계이다. 그러나 실천 현상학은 그 당연한 세계를 되짚어보고, 다시 생각해보자고 주장한다. 우리가 묻어 버리는 삶의 진실과 의미가 사실상 앞으로의 우리 삶의 소중한 자원이자 원천이라고 파악한다.

또한 실천 현상학은 반성과 사고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과 사고의 대상과 내용이 제한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즉, 생활 세계의 일상성을 깨뜨리려는 노력이 반성이요 사고라고 한다면, 관성적 무사고의 또 다른 형태인 독단과 편견과 아집을 해체하고 제거하려는 노력 역시 반성과 사고의 개입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독단과 편견과 아집은 한 개인의 심리적 성향에서만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기존의 이론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나 함몰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독단과 아집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실천 현상학이 제기하는 반성과 사고는 일체의 예외도 허용치 않으며, 영역과 대상과 내용과 정도가 제한된 반성과 사고가 아니라 우리의 힘이 닿는 범위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된다. 어렵게 설명이 되었지만, 한 마디로 말하자면, 결국 열심히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실천적 현상학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열심히 생각하는 일,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통해서 얻어진 통찰은 보통 글쓰기 작업을 통해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글쓰기는 연구 과정의 일부분으로서 간주되어 왔고, 따라서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실천 현상학은 글쓰기의 가치는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글쓰기는 전체 연구 과정의 한 부면(phase)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글쓰기 자체가 연구의 전부라고 주장한다.

첫째, 글쓰기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반성과 사고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일반적인 대화나 말하기의 경우와는 다른 태도와 자세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와 자세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으로서의 사고과정과 다르지 않다.

둘째, 글쓰기는 우리가 생각을 통해서 직관하고 통찰한 내용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실천 현상학이 추구하는 형태의 교육 연구는 자신만의 깨달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이 그 깨달음을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의 결과로 그들의 실천이 개선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러므로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실천 현상학은 반성(사고)과 글쓰기라는 두 축에 의하여 지지되고 있다. 물론 반성과 글쓰기의 과정은 제각각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선형적 순환과정을 통해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생각이 글로 표현되고, 다시 그 글은 더 깊은 사고와 반성적 검토를 통해서 보다 정련된 형태로 성장한다.

실천 현상학은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독특한 글쓰기의 형식마저도 제안하고 있다. 질적 연구의 글쓰기가 보통 기술과 해석이라는 이원적인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천 현상학도 일화와 해석이라는 두 가지 장치를 함께 활용한다. 일반적으로 일화는 짧은 이야기, 그러면서도 나름대로의 교훈과 의미를 담고 있는 이야기를 뜻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연구자가 연구하는 현상이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가 어떻게 전유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따라서 일화는 다양하고 풍부하게 의미가 적재된 것이어야 하며, 그 맥락과 상황을 얼마나 생생하게 전달하는가가 관건이 되는 이야기 형식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생생하다’는 것이 단지 ‘상세하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 진부한 일상사의 나열은 독자들에게 식상함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해석이란 일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의미들을 연구자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풀어내는 글이다. 해석은 연구자 자신의 주관적 해석의 틀에 입각하여 그가 발견한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연구자의 독창성과 사고의 깊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가가 관건이 되는 글의 형식이다. 여기서도 주의해야 할 점은 연구자의 해석이 독창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상대적인(독단적인) 견지에서 글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연구자의 해석이 객관적이어야 한다거나 혹은 읽는 독자들 모두가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간주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글, 다시 말해서 상당한 정도의 개연성과 보편성을 확보한 글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말하건대, 현상학은 독특성(uniqueness)과 보편성(universality) 사이의 변증법적 탐구 양식을 일컫는다. 일차적으로 실천 현상학은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것들 사이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연구 대상의 고유하고 독특한 측면을 관심의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작위적이고 독단적인 해석을 배격하며,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연구 대상에 관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을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또한 현상학은 연구자 자신의 주관적이고 독창적인 통찰을 강조하되, 그 통찰을 상호주관적인 이해의 범주 내에서 소통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 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실제로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편을 소개하기로 한다.

 

광녀 영은

 

저녁나절 들려오는 영은의 울부짖음은 이제 그 마을에서는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 해질 무렵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까요.

해가 서산마루에 걸칠 무렵이면, 광녀 영은은 그녀의 작은 집 처마에 걸터앉아, 적어도 15분간은 그렇게 외쳐대곤 했답니다.

“소연아, 소연아, 제발 소연아······.”

 

이제 더 이상 어떤 사람도 그 목소리에 담긴 상심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작은 연민조차도 아까워합니다.

너무 오랜 세월동안 영은은 그렇게 부르짖는 일을 해왔으니까요.

오히려 늑대의 울음소리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 신기한 일처럼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아이들이나 잠깐 이 마을에 다니러 온 사람들은 그 연유를 묻곤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아, 글쎄, 아주 오래 전에, 저 미친 영은이가 아이를 가졌다지 몹니까?

생각해봐요, 영은이와 아이라니.

누가 보더라도 터무니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어느 날 사회복지사와 경찰관들이 영은이의 아이인 소연이를 데려갔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모두를 위한 결정이었지요.

어느 누구도 그날 순찰차가 어디로 갔는지를 영은에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것 역시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고.

 

각자 자신의 아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수많은 엄마들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에서

영은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해질 무렵 이름 하나를 외쳐대는 것이었습니다.

수년 동안이나

그리고 그것도 헛되이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외쳐대던 지난 20여 년 동안

그 누구도 그녀의 작은 집까지 와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름 저녁에, 어떤 노신사가 그녀의 처마 밑에 슬며시 붙어 앉아서는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뭅니다.

영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태껏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나지막이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영은에게는 그 어떤 동화보다도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그런 종류의 일을 하다보니 당신 딸 소연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요.

소연이는 먹을 것도 충분하고 입을 것도 풍족하고 잠자리도 안락한 곳에서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느 날 병에 걸렸고, 이제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는 않지만,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닙니다.

“참 잘 되었어!”, 마치 어떤 커다란 선물이라도 받은 양 영은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참 잘 되었어!”, 다시 한 번 영은이 되뇝니다.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오랜 고독의 벽이 무너질 때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평안 속에 자신을 깊이 파묻은 채로

 

그날 저녁 이후, 마을에는 영은이 점점 더 미쳐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녀는 더 이상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 그건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너 그거 알아, 이제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그녀는 무엇이 좋은지 구름에다 손 흔들고

하늘 보고 희죽이고 있다니까.

 

이 짧은 이야기는 네델란드의 스틸마(Stilma)라는 분이 실제로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일화의 형태로 정리한 책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제재도 다르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에 있어서도 구구각색이지만, 한결같이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마음의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가(해석되는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위의 이야기를 통해서 누군가는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에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노신사의 친절한 행위를 칭송할는지도 모른다. 혹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와 딸 사이의 천륜을 갈라놓은 사회복지사와 경찰당국자들의 결정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 할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짧은 글 속에 여러 가지의 인간적인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의미들에 대한 서로 다른 통찰은, 설령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이해의 범주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실천 현상학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움직이게 만드는 의미 있는 부분들을 포착해내고, 그 의미에 대해서 타인(독자)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하려 시도하며, 다시 그러한 공유를 통해서 타인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움직이게 만드는 일을 추구한다. 그런 맥락에서의 실천 현상학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결국 의미와 이해의 공명학이다.

 

 

낯설음과 익숙함

 

황인정(숙명여자대학교 박사과정)

 

 

 

 

 

 

 

 

 

 

“까마득한 날에 세상이 열리고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더라. 세상의 온갖 것이 다 채워지고 그것을 다스리고 관리할 그 무엇이 필요하였다. 창조주는 그가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더라’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니 그가 바로 인간이었다.”라는 창세신화가 성서의 맨 앞부분을 장식하며 태고의 신비를 아름답게 그려 놓는다.

그래서일까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수식어를 붙이라 하면 우리는 쉽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이 수식어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까지 아우를 수 있는 말로 세상을 보는 눈에 대해 등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할 수 있는 자”, “창조주가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세 구절을 포괄 할 수 있는 인간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경우, 우리는 앞 다투어 서로 “나야 나”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그 곳에 익숙한 우리의 한 모습을 열어 본다.

 

 

3월의 마지막 날, 토요일 오후 6시

봄볕이 가시지 않은 열기가 전철 안에 가득하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났던 많은 인파 중 헐렁한 남방과 줄무늬 커플티를 입은 늦깎이 부부가 내 앞에 앉아 「아이 기르기」를 몸소 시연한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아기 손에 꼭 맞게 자른 바나나와 식빵 그리고 보온병에서 엷은 보리차가 연신 아이 손과 입으로 오간다. 남자는 아기 새가 입을 딱 벌리기가 무섭게 먹이를 나르는 수컷의 역할을, 여자는 아기 새의 몸이 음식물로 더럽혀지지나 않을까 가제 손수건으로 턱 밑을 바치는 암컷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한다. 이들의 「아이 기르기」는 말없이 맞춰가는 한편의 공연이다.

많은 인파 속, 공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몸을 비트는 아기의 모양새가 울음이 나올 듯하다. 잽싸게 남자는 핸드폰으로 아이의 관심을 돌린다. 그 와중에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의지하여 눈가의 피곤함을 잊으려한다. 살며시 감싸 안은 여자의 품속에서 순간 아기의 손가락이 입속으로 쏙 들어간다. 그리고 네 개의 하얀 이를 드러낸다. 문득 나는 버릇처럼 추측해 본다.

‘4개월 정도 됐나?(참고로 우리 집 큰 애가 4개월에 이가 4개 났었다) 어, 그런데 노련하게 바나나와 식빵을 먹는다? 그럼 몇 개월이란 말이지.’

애 셋을 키우고 있는 내가 이 앞에 앉아 있는 아기가 몇 개월인지 알 수 없다.

“아기가 몇 개월이나 됐어요?”

“14개월이요” 남자의 말이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와 여자는 너무도 정확하게 이 아이에 대해 안다. 그들은 자기들을 꼭 닮은 이 아이의 엄마․아빠였기 때문이다.

잠시 멈춰 섰던 전철은 커다란 기계음을 내며 또 한 정거장을 향해 달려간다. 내 마음도 “엄마다”라고 반겨 부를 나의 세 아이들에게 이미 달려간다.

-「아이 기르기」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

인간은 타인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Levinas의 말처럼 홀로 가치롭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가치는 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타인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와 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사소한 이치를 말한다.

한 생명이 따뜻하고 캄캄한 곳, 초침 없는 시간, 세상의 전부, 단 하나로 이어진 생명의 끈, 끊임없는 마음의 대화,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는 자궁의 익숙함을 깨고 낯선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닌 우연과 필연의 경계 사이, 그 무엇에 의함이다. 어찌되었든 아기는 그러한 익숙함을 깨고 세상이라는 낯설음에 직면하게 된다. 세상에 대한 첫 번째 낯설음을 말해주듯이 산부인과 병원 분만실은 세상을 향한 아기들의 외마디 치는 호흡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아기들은 세상과의 낯설음과 익숙함의 긴 여정에 들어선다. 아기들의 낯설음과 익숙함의 긴 여정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건,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건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 위한 우리들의 안간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류의 존귀함을 이어가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는 엄마·아빠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곳에 또 다른 낯설음에 당황해하는 한 이야기가 있다.

 

부모로서 선택에 대한 책임론은 내게 세상에 태어나 가장 놀랐고 떨렸던 일로부터 시작된다. 바로 큰 애가 네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던 날이다. 감기 기운에 춥다고 하는 아이를 위해 난방을 올려 달라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해열제를 먹이고 피곤한 친정 나들이에 잠이 들었는데 엄마의 직감이 느껴졌다. 아이 눈이 흰자만 남고 몸은 뻣뻣해지면서 경련을 일으켰고 입에선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곁에 있던 수건을 검지 손가락에 감고 입으로 들여보냈다. 놀랍고 떨리는 상황 속에서 친정어머니는 한걸음에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시골길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별 신통한 방법을 찾지 못했으나 다행히 119를 생각해 냈고 나와 친정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다.

검은 밤이 하얗게 되어버린 마음으로 병원에 도착해서야 내 손가락은 큰 애 입에서 뺄 수 있었고 그곳엔 깊은 이빨 자국이 검푸르게 새겨져 있었다.

나의 「아이 기르기」는 지금도 가슴 쓸어내릴 일들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을 머릿속에 되새겨 본다.

-「아이 기르기」가 낯설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

 

불혹의 나이를 넘기며 세상을 뒤돌아 더듬어 보니 세상살이 뭐 별거 있겠느냐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을 가끔 본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낯설음에 대해 담대하게 대처 할 수 있다는 말로 들려진다. 하지만 무참하게도 실제라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이 호언장담은 익숙하지 않음으로 인해 두렵고 떨리고 부끄럽고 당황해 하는 모습으로 자리한다. 특히 인류의 존재와 번영으로 이어지는 「나의 흔적 남기기」인 ‘자녀출산’과 ‘아이 기르기’ 과업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과업은 생물학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구성주의에서 말하는 「되어가는 것」에 대해 낯설음과 익숙함의 바톤 터치가 어떻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느냐의 문제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낯설음과 익숙함의 바톤 터치가 자연스럽게 될 수 있는 윤활유는 과연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앞서 언급한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할 수 있는 자”, “창조주가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말을 끌어들인다. 이는 가능성과 잠재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세상이라는 낯설음으로 가득한 공간과 시간 안에 세 가지를 충족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윤활유가 될 수 있다. 그 곳에는 호언장담하는 무모함은 있지 않다. 우리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책임, 그리고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인간”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낯설음과 익숙함의 스펙트럼 안에서 현재를 살아낸다.

 

승희조와 조승희

서근원(청주교대 연구교수)

 

2007년 4월 16일 저녁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고 컴퓨터를 켰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해서 30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화면에 떴다. 또 다시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총기 사건이 발생했나보다 했다. 이번에는 사망자가 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은 아시아계이며, 중국계인 것 같다는 말도 들였다. 아시아계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중국 사람들 곤혹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섰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한국인 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다는 점을 강조해서 방영했다.

다음 날 다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열었다.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 조승희라는 기사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 한국인이라니. LA 흑인 폭동이 떠올랐다. 9·11 사건 이후로 한동안 아랍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겪은 일을 한국인들이 겪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그 점을 연이어 강조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의 안전과 우리 수출품의 판로 등을 염려했다. 미국으로의 국제전화 통화량이 평소보다 30퍼센트 증가했다고 알려주기도 하고, 서울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그리고 거리 곳곳에서 한국인들이 성조기를 꽂고 촛불을 켠 채 애도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CNN에서는 그런 한국인들의 반응을 방영하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미국의 버지니아 공대에 조문 사절단을 보낼 것을 고려한다는 말도 들렸다.

하루가 더 지났다. CNN에서는 조승희를 승희조로 고쳐서 불렀다. 그는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인 조승희가 미국인을 향해 벌인 학살(massacre)이 아닌 미국인 승희조가 저지른 총기 사건으로 사태를 규정해갔다. 미국내 총기소유법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점점 더 부각되었다. 그와 동시에 한국인에게 이 사건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여주지 말 것을 요청했다. 미국 정부는 우리나라 정부의 조문사절을 사절(謝絶)했다. 버지니아 공대 교정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장소가 마련되었고, 거기에는 승희조에게 바치는 꽃과 편지도 놓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는 동안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서 우리나라 교민과 우리나라 상품이 미국에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와 함께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 점점 더 옅어졌다. 지금은 그 사건이 발생한지 불과 20일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우리나라 텔레비전이나 신문 어디에서도 그와 관련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몇 일 전에 어느 대학의 교내 방송에서 그와 관련된 언급을 들을 수 있었다. 조승희 사건과 미선이와 효순이 사건을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에서는 한국인이 개인의 문제 때문에 수십 명의 미국인을 의도적으로 살해했음에도 자국의 문제로 규정하고 한국을 문제삼지 않은 데 비해서, 우리는 미군이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두 명의 한국인을 죽게 한 사건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과민 반응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 방송의 여자 아나운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도 미국의 그러한 대범한 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사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우리 언론이 보이는 한층 진전된 태도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그 사건을 여전히 우리 처지에서 피상적이고 규범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인의 반응을 보면서 그들이 우리를 배려한다기보다는 자신의 문제에 충실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이 문제를 인종의 문제로 몰고 가지 않았다. 그들이 만일 그 사건을 한국인 또는 아시아인이 저지른 사건으로 규정하게 되면, 가해자 집단은 자의건 타의건 미국 내부에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고, 그런 집단의 형성은 또 다른 집단의 형성을 촉발하게 된다. 아시아계, 라틴계, 아랍계, 유럽계, 흑인계 등등 다양한 집단이 자기들끼리 강력히 연대하게 된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Melting Pot”이라고 불리는 미국 사회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그 각각의 인종이나 집단과 관련되어 있는 세계 각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일이 된다. 그 사건을 인종의 문제로 규정하는 순간 미국은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도 스스로 적을 만드는 셈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이유에서 미국이 조승희 사건을 인종의 문제로 규정하는 것을 꺼려했다. 한국인이 이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꺼려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을 달리 말하면, 미국은 다인종 국가이지만 언제든지 각 인종 국가 또는 집단으로 분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사회며, 미국은 그런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USA(United State of America)가 DSA(Divided States of America)로 바뀌게 되는 사태를 말이다. 그 점에 비추어 보면 흑인 인권 운동가인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왜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대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에 충실한 것이다. 우리가 조승희 사건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자신의 문제에 충실하는 것.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많은 이론들은 외국으로부터 수입되었고, 그 이론들은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배태되었다. 그들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가 동일하지 않은 이상 그들의 이론이 우리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것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이론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문제로부터 우리 이론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우리 문제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국의 해답과 외국의 문제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고 우리 문제를 살펴볼 틈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승희 사건을 둘러싸고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너무 엉뚱한 발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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