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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의무 -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사유의 의무 -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앞 선 책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 중 추천된 책이다.
책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본다.
본인 스스로 나치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평생 화두는 나치즘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었다. (.....)
아렌트의 결론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악의에 가득 차 있는 잔혹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히만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이 관여했던 유대인 학살이란 전대미문의 악은 어디로부터 유래한 것일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숙고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문제였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 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베버Max Weber, 1864~1920 가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 사회는 분업화와 전문화의 과정을 통해 구조화된 사회이다. 분업화와 전문화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조직에 속해 있어도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며,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모든 일들이 너무나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있어서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성격의 일인지 반성할 틈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렌트가 지적했던 것처럼 언제든지 아이히만이 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히만처럼 무사유의 상태에 빠져있다면,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인한 악은 도처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 '악의 평범성banality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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