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교컴
<투명사회> 한병철
몇 년 전 <피로사회>로 관심을 모았던
독일에서 활동 중인 문화비평가 한병철 선생님의 신작 <투명사회>
그 한국어판 서문 만으로도
깊이 있게 읽어 봐야할 필요를 느낀다.
다음은 한국어판 서문.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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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투명성"이란 단어는 마치 유령처럼 모든 삶의 영역을 떠돌고 있다. 정치에서는 물론이고 경제에서도 투명성이 강조된다. 투명성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고 잇다. 투명성이 신뢰를 낳는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믿음이다. 이 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하필이면 신뢰가 급격하게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단히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는 신뢰에서 통제로의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난다.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다.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된다면, 정치는 불가피하게 호흡이 짧아지고 즉흥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정치는 잡담처럼 얄팍해진다.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에 일정한 시간의 굴레를 씌우는데, 그 속에서 천천히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지향적 비전은 점점 더 희소해진다. 천천히 무르익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배려는 점점 더 줄어든다.
전면적 커뮤니케이션과 전면적 네트워크화의 흐름 속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튀는 견해를 밝히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려워졌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하여,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한다. 투명성은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고 이로써 지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한다.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다. 투명성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밖으로 표출시킨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정보로 전환된다. 오늘날처럼 비물질적인 생산 방식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증가가 곧 생산성의 증대와 가속화를 의미하게 된다. 반면 비밀스러운 것, 낮선 것, 다른 것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런 것들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투명성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인간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투명성의 폭력이 있다. 무제한의 자유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미디어 또한 점점 더 사회적인 삶을 감시하고 착취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가까워진다.
규율사회의 파놉티콘은 더 효과적인 감시를 위해 수감자들을 격리하고 서로 대화도 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열심히 소통하며 그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이로써 그들은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집중적으로 활용한다.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훤희 비추고 노출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디지털 통제사회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빨아먹고 산다. 이러한 사회가 완성되는 것은 그 주민들이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내인적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에 대해 밝히기 시작할 때, 즉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이 드러나게 될까 꺼림칙해하는 마음보다 뻔뻔하게 그런 부분까지 내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게 될 때이다.
투명성은 이데올로기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이 투명성의 이데올로기 또한 긍정적인 핵심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핵심이 신화화되고 절대화된다는 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이 있다ㅣ 전제적 지배자가 된 투명성은 테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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