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전통적 관점에서 교사의 주요한 능력이었던 '수업기술'에 대응하는 관점을
'수업이해'라고 한다면 수업 이해의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교컴 수련회에서 서근원 교수께서 맛 보여주었던 것, 즉 수업을 왜 하지?에서
밝히는 관점을 질적 수업 보기라고 한다면 단순히 수업 기술을 강조하지 않는 제안들,
예컨대 통합적 수업전문성의 추구랄지, 내러티브적 수업담화랄지, 반성적 실천 등
같은 맥락 속에서 얘기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나는 책과 강의를 통하여 교사 일반이 받아 들이는 방식과 관련하여
머쓱이 샘이 지적하시는 '커다란 바위 하나를 얹어 놓은 느낌'을(교단일기 참조)
우려했었다. 그것이 성장을 위한 충격이면 능히 소화를 해야 하는 것이되,
다소간의 불친절한 접근방식으로 인해 오는 것이라면? 이렇게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즉, 강의와 책에서 언급되는 모든 부분들은 현장 실제, 그리고 그 실제를 해석하는
저자의 의견 순으로 돼 있다. 물론 해석은 '질적 수업 보기'라는 하나의
저자가 구축하고 있는 '조망틀'이고 아이즈너 교수가 언급한 바 있는 '감식안'이다.
감식안은 아무나 갖추기 힘든 전문가적 식견이다.
마치도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전문가의 안목 같은 것이다.
물론 교사들의 수업 실제를 조명하고 부정하며, 해체와 통합, 변증법적 합일의 과정을 거쳐
그로 인해 새로움을 창출하는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한 의도가 읽힌다. 따라서 이 부분은
나 역시 불만이 없고... 탁월한 글쓰기 방식에 대하여 놀라고, 존경의 마음이 생긴다.
문제는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현장 실제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좀더 친절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일단 자신이 해 왔던 그동안의 경험을 '부정'해야 한다.
(잘못된) 경험의 세월이 길면 길수록 자기 부정의 강도는 좀더 강할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듯 '마음에 커다란 바위를 얹어 놓은 듯한 기분'을 만들어 낸다.
물론 이것은 담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에게는 언젠가는 치워지면서 새로운 에너지로
변환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마음 속 바위는 꽤 긴세월 교사에게 부담을 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아무리 열심해 해 보려해도 전문가적 안목에서 보는 내 수업은 형편없는 것이겠지...'
라는 자괴감 같은 것이다. 현실은 냉혹하여 한 번에 실천을 바꾸는 것을 용이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사의 경험을 그것대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그로부터 이해에 터한
대안을 이끌어 내는 좀더 친절한 접근이 아쉬웠다는 말씀이다.
어떤 하나의 제안이 있을 때 그것이 과녁으로 삼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당신이 해 온 실천에서 발견되는 수업에 대한 몰이해'에 집중하게 되면
그로 인해 우리도 모르게 증발하는 것이 있다.
그 교사의 실천에 영향을 미쳤던 여러 제도와 관행, 교육과정, 교실환경, 관료성 등등
또 성과와 형식을 요구하는 시스템 등이 그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가리고
교사의 개인적 실천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은 때로 다소간 무책임하거나
불친절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해 '수업이해' 관점으로의 전환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사 주변에 너무 많다는 것이다.
교사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너무 뚜렷한 한계가 보인다. 그러므로 미시적 주장의
한 켠에는 꼭 실천을 위하여 걷혀져야 할 '장막'을 함께 제시해 주어야 한다.
여기서 장막이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제도, 관행, 교실환경, 교육과정, 관료성, 성과와
형식 위주의 교육 현실 등이다...
나도 책과 강의를 통한 전반적 철학에 대하여 적극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어떤 이론(그것이 새로운 것일수록 더욱)이 실제를 만나 충분히 공명하지 못할 때
생길 수 있는 불편함과 막막함에 대해... 연구자들은 때로 배려하지 않거나 불친절하다.
수업현실을 날카롭게 짚었으되, 따스한 시선을 결여하여 '멋지지만, 결국은 타인의 삶'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교사들이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학자들도 정말 '교사의 처지'가 되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교컴지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