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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현대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학습자료

함영기 | 2006.05.17 19:39 | 조회 9283 | 공감 0 | 비공감 0
5.18 광주 민중항쟁 관련자료입니다. 5.18재단에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귀한 자료입니다. 수업에 적절하게 활용하십시오.
  • 광주 민중항쟁 상황일지
  • 광주 민중항쟁 발생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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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 > 5·18역사 > 5·18민주화운동정의

    \'80년 5월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타오르던 광주민중항쟁의 불꽃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함께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면서 그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로 지켜주고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이었으며, 오욕의 역사가 아니라 긍지의 역사였다. 광주시민들의 자랑과 긍지는 단순한 향토애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쟁기간을 가장 뜨겁게 살았던 시민들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따라서 권력의 탄압이나 각종 언론의 왜곡선전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광주시민들이 체험한 \'광주의 진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항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은 한 두 명의 영웅적인 항쟁이 아닌, 시민 전체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에 저항했으며, 결국은 승리하였다. 당국에 의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되면서도 광주시민들은 비인간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길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 길을 걸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항쟁의 전 기간 동안 광주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위기를 가장 인간다운 삶의 협동으로 대처했다는 점이다. 광주시가 계엄군에 포위된 채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대중매체와 군 정보요원을 통한 교란작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광주시민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살았다.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피가 부족한 부상자에게는 피를 나누어 주었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는 시민들 누구나가 달려들어 그 일을 해주었다. 항쟁지도부가 수습의 방법을 두고 고심할 때 일반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나갔던 것이다.
    그 기간 동안 광주시는 공식적인 치안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치안체계를 유지하였다. 그토록 많은 총기류가 시민들의 수중에 있었지만, 그로 인한 불상사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이나 금은방 등 평소 범죄자들이 노릴만한 곳에서도 이 기간중에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세계민중항쟁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광주시민들은 성숙한 민주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견지하였다는 점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이 오로지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시민봉기였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공격을 받은 곳은 그들을 억압하는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곳이거나 사실보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방송국과 같은 보도매체들이었다.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구식 개인화기만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온갖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계엄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시민군은 항쟁기간 쌓아왔던 모든 기대가 무너지며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 계엄군도 광주시민들 마음 속에 이미 뿌리깊게 자리잡은 자랑스러움과 긍지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 다시 우리들 주변에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지방에서 일어난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엄청난 물리력을 앞세운 군부의 진압작전으로 일단은 좌절되었지만 그것은 실패한 역사로만 기억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거로서 오늘의 우리에게 그 교훈과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80년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사회운동 진영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혈맹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인식은 급속하게 깨져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80년 광주항쟁 이후 반미운동의 고양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80년 5월의 광주를, 나아가 \'80년 봄의 민주화운동을 부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일관하였다. 그때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모아진 것은 이른바 \'5월투쟁\'이었다. \'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억압적인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국민들의 단합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독재체재가 어느정도 불식되었으며, 정부도 체제유지를 위하여 어느 정도 양보를 하여 미진한 수준에서나마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광주항쟁은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뒤바꾼 전대미문의 시민무장봉기였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80년 5월, 광주시민의 선혈을 발판으로 권좌를 차지했다. 그러나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5. 6공화국의 집권층이 보여준 광주양민학살만행과 천문학적인 부정부패가 온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은 \'역사와 정의와 법\'에 의한 단죄의 행로를 걸었다.

    그간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신군부가 권력을 송두리째 흔들던 5공화국 7년동안, 광주항쟁의 실체를 밝혀 줄 각종 군 자료와 증거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6공화국의 여소야대라는 정국속에서 열렸던 광주특위 청문회를 통해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이 상당부분 밝혀졌다.
    문민정부의 초기에는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단죄보다는 역사에 의한 처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이 나라의 \'헌정을 유린하고 국민을 살육한 부도덕한 신군부 집단\'에 대한 전국민적 처벌 요구가 자칫 영원한 역사적 과제로 미루어질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거세지는 \"광주민중항쟁 책임자 처벌\"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검찰은 다시 전면 재수사에 나섰고 그들은 \'역사에 의한 단죄\'가 아닌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 저항권을 말살한 헌정 초유의 내란집단\'으로 규정되어 전세계의 관심속에 \"법과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반면에 전국민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기의 재판\'에도 불구하고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과거의 역사적 잔재와 의식의 소유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광주항쟁의 진상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해도 반드시 국민과 정의의 힘에 의해 낱낱히 밝혀질 것이다.

    현 정부가 광주항쟁을 세계사에 유래없는 초이성적 초도덕적 투쟁이라고 규정한 만큼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계승 방안을 위해 광주시민과 더불어 전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무한경쟁시대라고 말한다. 이 21세기를 준비하고 기약하기 위해서는 한 시대의 아픔과 절규에서 스스로 벗어나 우리 사회의 가능성과 역동성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실현, 바로 이것이다. 서로 돕고 신뢰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실현을 통해 광주민중항쟁 정신은 더욱 더 찬란한 역사속의 빛으로 승화될 것이다.

     

    홈 > 5·18역사 > 배경
    5.18이 있기까지 과정을 간추려서 그려본다. 이승만정권부터 그칠줄 모르는 독재청지..
    12년간 이승만은 정권을 잡았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물결에 부딛치고 곧 4.19의거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이에 다급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하였고 이어 윤보선의 제 2공화국이 탄생했지만 정말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정부의 부정부패, 2공화국의 무능함.. 이 모든게 5.16 군사쿠데타를 일이키게 했다고 볼수 있다.
    박정희(당시계급 소장)는 1961. 5. 16 오후 3시를 기해 군사들을 동원하여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부정부패를 추방한다는 명분하에 쿠데타를 일이킨다.

    이어 18년간의 긴 유신정권이 시작된다.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를 위해 제 7차 헌법개정을 통해 유신정권을 자리매김하게 된다 술자리에서 마음대로 말도 못하고 그저 소리죽여 살아야 했던 시대.. 영문도 모른체 끌려가서 옥사를 치루는 사람들..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 유신정권에 맞서 부마항쟁이라는 대민족 민주화 물결을 일으킨다.
    이는 단순한 유신체제의 저항운동을 넘어 대한민국 최초의 신자유주의의 저항운동이라고 역사가들은 해석한다.

    국민들의 민주화 갈망은 더욱 간절했다.
    이에 결말은 박정희의 피살로 이어진다. 부마항쟁에 연이은 박정희의 피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식당 만찬에서 1979. 10. 26 박정희를 시해한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킬때 김종필과 함께 앞장 섰던 인물이다.) 이에 게엄령이 선포되고 익일 최규화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된다.

    이에 전두환은 몹시 분노하였다. 평소 아버지처럼 모시던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제일먼저 김재규를 족치기 시작한다.

    박정희 시해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은 오랫동안 갈망해온 민주화를 실현할수 있겠다며 모두 기대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12.12 사태가 일어난다.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었으며 12.12 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직함으로써 만반의 준비를 갖춘것이다.

    12.12 사태가 끝나고 한참이 지난후..
    게엄령은 해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1980년 5월 17일 게엄령이 확대되면서 김대중을 구속하고 평소 눈에 가시처럼 두었던 호남지역을 무차별하게 밀기 시작한다.

    이후 전두환이 집권하게 되고 눈물어린 5.18의 비극이 채 가시지도 않은 87년 6월 다시한번 6월 항쟁이라는 거센 민주화 물결이 일어난다.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왔으며 그때마다 국민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나라가 바로선다. 오늘날이 있기까지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날을 부르짖으며 울분을 토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최루탄 앞에서 목숨을 잃었던가...

     

     

    홈 > 5·18역사 > 전개과정

    0시 비상 계엄령 확대실시
    5·17계엄확대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계엄포고 10호를 통하여 ①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 대학 휴교 ③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④ 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⑤ 언론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김대중씨를 비롯한 정치인 수백명을 강제 연행하였다. 더불어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을 투입했으며 특히 서울과 광주가 주요 공격의목표였다. 서울에는 1. 3. 5. 9. 11. 13. 공수여단이 배치되었고 광주 7공수여단33대대 35대대로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시위 진합 훈련을 수련한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정예부대가 무력으로 진압을 함으로써 5. 18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 공수부대원간 최초충돌
    5월 18일 오전에 전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실시 및 전국대학의휴교조치가 취해진 것을 모르고 일상적으로 학교에 나온 학생들이 교문에서 계엄군에 의해 제지되었다. 이때 학교 수위실 옆에는 계엄군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학생들 2, 3명이 꿇어 앉혀져 있었다. 갑작스런 휴교조치와 교문 옆에 구타당한 학생들을 보고학생들은 교문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오전 10시경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운집한 학생들의 수는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계엄군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일부 학생들은 닫혀진 교문 안에 있는 공수부 대원에게 학생들의 구타와 학교출입금지 조치에 대해서 항의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학생들의 숫자가 불어나며 군중심리에 의한자연발생적 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교문과 일정한 거리를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계속 외쳤다. 이때까지는 돌을 던지거나 어떤 물리적 방법도 동원되지 않은 평화적이고 지극히 자연발생적인 시위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는 두어 차례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 방송을 한후,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와서 잡히는 학생들마다 곤봉으로 머리와 어깨 등을 구타하고 군화발로 걷어차거나 짓밟고 연행하였다.
    당시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김대중씨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등 이였다. 7공수여단은 주둔지 전남대학교를 나와 강력한 시위 진압을실시하였다. 시위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쫓아가 무차별 때리고 짖 밟았으며 쓰러진 사람은질질 끌고가 트럭에 실었다. 이러한 행위는 광주시민을상대로 한 학살 극이라 할 만큼 무자비하고 난폭했으며 진압봉과 대검으로 때리고 찔렀으며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뒤 쫒아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구타한 후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혀 포박 연행했다. 이때 연행자는대학생 114명, 전문대생35명, 고교생6명, 재수생66명, 일반시민184명 등 합계 405명이었으며 이중 68명이 두부외상, 타박상, 자상(대검)등을 입었고 12명은 중태였다고 2군 사령부 계엄상황 일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전해진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를 즐겨라\"
    공포와 불안으로 하루를 보낸 다음날인 19일 광주지역은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고, 관공서나 기업체, 공장 등은 대체로 정상근무를 하였지만 일손을 거의 놓고 18일의 공수부대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한 상태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들이 시내 전지역에 걸쳐서 삼엄한 경비를 서며 공포분위기를조성하고 있었고,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시민들은 그냥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시내로 나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자며 몇 명씩짝을 지어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군중은 2,000∼3,000명으로 불어났으며,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10시 40분부터 경찰과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인 해산에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던시민들은 그냥 쫓겨가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서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금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군중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4시경 모든 이동을 마친 11공수여단 병력 1,140여명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이다.
    11시 30분경 다시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이 시작되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기사, 고시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린 학원생들 그 모두가 그들의 진압대상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그 안에서 젊은 사람이 발견되면 무작정 구타 한뒤 연행하였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 채 군 트럭에 실려갔다. 당시 광주지역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전명칭이 그러했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은 시내 중심가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 시가지 전역에 걸쳐서 자행되고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만행이 백주대로에서 자행된 것이다.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이어...
    이런 상태에서 19일 오후로 접어들면서 시위의 양상은 수세에서공세로 바뀌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의 중심세력이 대학생에서 시민대중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는데 바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행위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트럭에 실려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손길을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경상을 입은 많은 부상자와 죽어 가는 사람 수에 비해 광주 시내 병원시설로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홈 > 5·18역사 > 피해자현황
    구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7,189 120 2,063 5,006 228,369 (694)
    사망 218 14 50 154 17,042
    행불 363 16 277 70 9,048
    상이 5,088 47 1,620 3,193 172,388 (22)
    기타 1,520 43 116 1,589 29,891 (671)
    ※ 중복지급자 694명을 제외할 경우 실제 인정인원수는 4,312명임
    구 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2,693명 21 448 2,224명 142,792
    사망 190 12 24 154 17,042
    행불 148 2 108 38 4,914
    상이 2,290 4 315 1,971 120,332
    기타 65 3 1 61 504
    구 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2,791 83 865 1,843 39,226 (649)
    사망 15 2 13 - -
    행불 117 9 99 9 1,129
    상이 1,483 36 682 765 28,410
    기타 1,176 36 71 1,069 9,687 (649)
    ※ ( )은 90년에 상이로 인정받고 93년에 기타(수형·연행훈방)로 인정받은 자
    구 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837 9 358 470 28,047 (28)
    사망 10 - 10 - -
    행불 54 2 35 17 2,208
    상이 494 3 269 222 12,798 (12)
    기타 279 4 44 231 13,041 (16)
    구 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868 7 392 469 18,304 (17)
    사망 3 - 3 - -
    행불 44 3 35 6 797
    상이 821 4 354 235 10,848 (10)
    기타 - - 0 228 6,659 (7)
    ※( )은 90,93,98년에 상이 또는 기타로 인정받고 2000년에 기타 또는 상이로 인정받은 자
    구분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사망자 207 23 2 - 3 179
    부상자 2,392 453 44 38 62 1,795
    기타희생 987명 316명 26 30 33 582
    小 計 3,586명 792명 72명 68명 98명 2,556명
    ※ 서울(북부, 남부, 수원, 인천, 의정부, 춘천, 강릉) / 대전(홍성, 충주, 청주)
        부산(울산, 마산, 진주, 제주) / 광주(익산, 전주, 목포, 순천)
    구분 본인 유족
    사망·행불자 207명 - 207명
    부상자 2,392명 2,252명 140명
    기타희생자 987명 966명 21명
    3,586 3,218 368
    1급 33명 2급 13명 3급 19명 4급 18명 5급 43명
    6급 18명 7급 67명 8급 63명 9급 122명 10급 111명
    11급 108명 12급 450명 13급 88명 14급 1,099명
    합계 2,252명
    홈 > 5·18역사 > 사적지안내
    \"전남대학교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5·18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학문에 몰두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면서 항쟁의 불씨는 뿌려졌다. 이어 18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 시위를 벌렸다.
    계엄군은 항쟁기간 중 시내에서 끌고 온 시민들을 여기 종합운동장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 집단 구타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주검은 학교 안에 매장되었다가 그 후 발굴되었다. 당시 정문 앞에는 용봉천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을 불법 감금했던 이학부 건물도 철거되었으며 교문도 모양이 바뀌었다.

    금남로

    금남로는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5·18광주항쟁 기간 중 연일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다.
    5월 18일 가톨릭센타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으며 5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이 거리를 누볐다.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까지 30여만 광주시민이 매일 운집,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던 금남로는 5·18광주민중항쟁을 상징하는 거리다.
    5·18광주민중항쟁 이후에도 항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가톨릭센타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 집회가 계속 열렸다. 항쟁 당시 가톨릭센타에는 천주교광주대교구청과 CBS광주방송국이 들어서 있었다. 천주교광주대교구청에서는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계엄군의 잔혹한 살상행위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피어린 투쟁을 전국의 교회기관에 알려 광주의 진실을 전국과 세계에 전파시켰으며 항쟁 이후에도 계 속 \'5월광주\'를 불밝혀 왔다.

    도청

    도청은 5·18광주민중항쟁 본부가 있던 곳이며,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수많은 시민군이 이곳에서 산화했다.
    항쟁 초기 이곳 도청은 군부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와 분노를 표출하는 표적이었다. 그것은 \"가자, 도청으로!\" 라는 짧은 구호 속에 잘 응축되어 있다. 계엄이 불법 확대되면서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집단 발포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광주시민들의 결사 항전에 쫓겨 5월 21일 오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이곳에서는 항쟁지도부가 활동하였고,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수습책을 논의하는 등 시민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이곳은 또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맞서 싸운 시민군의 최후 결사항전지로, 마지막 항전에서 수많은 시민군들이 산화하였다.

    5.18민주광장

    5·18민주광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다.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이 여기 분수대를 연단으로 하여 각종 집회를 열어 항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18일 이전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대규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이 집회에는 광주시내 고등학생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 철수 이후 끊임없이 민주화 투쟁 결의를 다지는 각종 궐기대회가 열렸던 이곳은 바로 5·18 광주민중항쟁 정신을 낳은 산실이다.
    항쟁 후에도 전국에서 벌어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산화한 민주 열사들의 영혼이 이곳에 들러 시민들의 분향을 받으며 전국민의 투쟁 의지를 일깨웠다.

    상무관

    상무관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자들의 주검을 임시 안치했던 곳이다.
    집단 발포와 무자비한 진압에 희생된 주검이 이곳에 안치되자 시민들은 다시 한번 계엄군의 행위에 분노의 눈물을 삼켰다.
    5·18광주민중항쟁 기간동안 광주시민들은 줄지어 분향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면서 민주화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광주역광장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시위가 더욱 가열된 5월 20일 밤 광주역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은 무자비한 유혈 진압에 항의하며 나아가 는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21일 아침 이곳에서 주검 2구가 발견되었다. 이들 주검이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옮겨오자 이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만명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함 으로써 항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광주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공수부대의 만행을 단 한줄도 보도하지 않았던 언론기관은
    시민들의 분노에 의해 불타고 만다.

    계엄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은 항쟁 열기는 물론 계엄군의 과잉진압 행위마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아 시민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다. 시민들이 진상을 사실대로 보도하라고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5월 20일 밤 광주MBC, 다음날 새벽 광주 KBS 건물이 불탔으며 광주세무서 건물에도 불길이 올랐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계엄군에 대한 항의요, 응징의 표현이었다.

    조선대학교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5·18광주민중항쟁 이전부터 이 지역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항쟁기간에는 시민군 지도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따라서 이 대학에도 계엄군이 즉시 진주했으며,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시내 곳곳에서 연행되어 온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체육관, 야전막사 등에 수용되어 계엄군으로부터 잔혹한 폭행을 당한 현장이기도 하다.

    광주교도소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이 주둔해 있으면서 담양, 순천방면으로 이동하던 차량과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양민이 희생당한 곳이다. 계엄군의 이런 행위를 항의하기 위해 달려간 시민에게도 중화기로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항쟁기간 중 무고한 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이 곳 광주교도소로 끌려와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 시신은 인근 야산에 매장되었다가 5·18직후 발굴되었다.

    5.18구묘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묻혔던 곳으로 \'망월동 묘지\'라 불려왔다.
    당시 가족과 친지들은 항쟁 와중에서 공포와 분노에 떨며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싣고 와 이곳에 묻었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5월 27일 도청 함락 때 희생된 주검은 청소차에 실려와 묻혔다. 그 뒤 이곳이 \'민주성지\'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자 군사반란집단은 묘를 파내게 하는 등 묘지자체를 없애려 획책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 묘지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97년 새로운 5·18묘지가 완성되자 이곳에 묻혔던 영령들은 치욕의 17년을 뒤로 하고 새 묘역으로 이장되어 비로소 편안히 눈을 감게 되었다. 여기 구 묘역은 당시의 참상을 처절하게 안고 있는 곳인 데다 그 동안 수많은 국내외 참배객들이 수 없이 다녀간 곳이므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출처 http://www.518.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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