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컴지기 칼럼
교육의 주체가 그들의 언어로 미래교육을 상상하는 이야기
치유적 글쓰기
치유적 글쓰기
오로지 이타적인 마음으로만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 겠다. 더하여,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글을 쓰는 목적이다. 자기 자신의 위해 쓰는 글, 이것이 치유적 글쓰기의 본질이다.
절대 빈곤은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풍요 속의 결핍 때문에 고통받는다. 결핍의 양상은 무기력 혹은 고독과 소외감으로 나타난다. 특히 현대인들이 느끼는 소외는 때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스스로 생을 정리하는 안타까운 사건들의 근원들을 추적하면 거의 예외없이 소외의 문제가 있다. 사람은 많으나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실존적 소외의 본질이다.
결국, 글을 쓴다는 행위는 소외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절박한 외침인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의 한 방편인 것이다. 여기 페이스북을 보라. 조금만 신경쓰면 관찰되는 내면의 외로움을 호소하는 글이 도처에 널려있다. 내 직관은 그런 글들이 훨씬 더 눈에 들어오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배설하듯이' 자기 홍보에 열을 올리고(사실은 이것도 외로움 해소의, 혹은 자신의 오욕칠정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은 상대를 하나 정하여 쉴 새 없이 두드려 팬다(이런 측면에서 누군가 공공의 적이 돼 있는 상황은 현대인들의 분노를 수렴하는 역할을 한다). SNS의 기능 중 훌륭한 것이 이렇게 표현하고 발산하게 함으로써 우울이나 소외를 극단적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외부 세계와 의사소통할 때 보통 세 가지 방법에 의존한다. 말, 글, 실천이다. 이 중 말은 들어줄 상대가 있어야 하고 실천은 그것을 담보해줄 상황이 조건이 된다. 그런데 글은 상대가 없이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다양한 방법으로 쓸 수 있다. 공개, 비공개를 막론하고 솜씨와 조악함을 넘어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수단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 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글은 내가 추천하는 가장 좋은 '치유제'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솔직담백한 개인의 일상적 서사'를 좋아하고 또 즐겨 읽는 편이다. 이렇게 타인의 글을 읽고 그의 내면을 상상하며 때로 쌍방간 소통을 시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어떤 사람이 글을 쓸 때는, 그 글이 미칠 파장과 반응에 신경을 쓴다. 그 글은 어렵게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하고, 타인을 설득하고, 공감하고 싶은 욕구의 반영이기 때문에 적절한 방법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 글쓰기 세상의 매너다. 이것은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에 '품앗이'의 성격을 가질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나에게 울림을 주는 글, 혹은 내 사유를 재촉하는 글, 별 것 아닌 일상사에서 묻어나오는 따뜻함과 진지함, 치열한 삶의 흔적들을 보면 우리는 '좋아요'나 간단한 '댓글'을 달아 '당신의 얘기를 잘 들었어요. 공감해요.'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품앗이가 잘 되어 치유의 효과가 커진다면 아마 심리치료사들, 정신과 의사들 일거리가 많이 줄어들지 모르겠다. 그분들의 생계 걱정은 되지만 그 분들이 줄어들수록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에 토를 다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공짜로 쓸 수 있는 좋은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경험을 만난다. 대부분 현대인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는 '실존적 소외감'을 느낀다. 서로 부대끼고 공감하고 위로하며 극복해 간다. 에너지를 얻고 삶의 의미와 용기를 얻는다. 안목과 통찰력을 키워 세상을 보는 눈을 가다듬는다. 이것이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이다.
꽤 긴 글이었다. 아마 여기까지 읽은 교컴가족들께서는 댓글 한 줄 달아야 겠다는 욕구를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말리지 않겠다.
교컴지기
오로지 이타적인 마음으로만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 겠다. 더하여,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글을 쓰는 목적이다. 자기 자신의 위해 쓰는 글, 이것이 치유적 글쓰기의 본질이다.
절대 빈곤은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풍요 속의 결핍 때문에 고통받는다. 결핍의 양상은 무기력 혹은 고독과 소외감으로 나타난다. 특히 현대인들이 느끼는 소외는 때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스스로 생을 정리하는 안타까운 사건들의 근원들을 추적하면 거의 예외없이 소외의 문제가 있다. 사람은 많으나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실존적 소외의 본질이다.
결국, 글을 쓴다는 행위는 소외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절박한 외침인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의 한 방편인 것이다. 여기 페이스북을 보라. 조금만 신경쓰면 관찰되는 내면의 외로움을 호소하는 글이 도처에 널려있다. 내 직관은 그런 글들이 훨씬 더 눈에 들어오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배설하듯이' 자기 홍보에 열을 올리고(사실은 이것도 외로움 해소의, 혹은 자신의 오욕칠정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은 상대를 하나 정하여 쉴 새 없이 두드려 팬다(이런 측면에서 누군가 공공의 적이 돼 있는 상황은 현대인들의 분노를 수렴하는 역할을 한다). SNS의 기능 중 훌륭한 것이 이렇게 표현하고 발산하게 함으로써 우울이나 소외를 극단적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외부 세계와 의사소통할 때 보통 세 가지 방법에 의존한다. 말, 글, 실천이다. 이 중 말은 들어줄 상대가 있어야 하고 실천은 그것을 담보해줄 상황이 조건이 된다. 그런데 글은 상대가 없이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다양한 방법으로 쓸 수 있다. 공개, 비공개를 막론하고 솜씨와 조악함을 넘어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수단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 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글은 내가 추천하는 가장 좋은 '치유제'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솔직담백한 개인의 일상적 서사'를 좋아하고 또 즐겨 읽는 편이다. 이렇게 타인의 글을 읽고 그의 내면을 상상하며 때로 쌍방간 소통을 시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어떤 사람이 글을 쓸 때는, 그 글이 미칠 파장과 반응에 신경을 쓴다. 그 글은 어렵게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하고, 타인을 설득하고, 공감하고 싶은 욕구의 반영이기 때문에 적절한 방법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 글쓰기 세상의 매너다. 이것은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에 '품앗이'의 성격을 가질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나에게 울림을 주는 글, 혹은 내 사유를 재촉하는 글, 별 것 아닌 일상사에서 묻어나오는 따뜻함과 진지함, 치열한 삶의 흔적들을 보면 우리는 '좋아요'나 간단한 '댓글'을 달아 '당신의 얘기를 잘 들었어요. 공감해요.'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품앗이가 잘 되어 치유의 효과가 커진다면 아마 심리치료사들, 정신과 의사들 일거리가 많이 줄어들지 모르겠다. 그분들의 생계 걱정은 되지만 그 분들이 줄어들수록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에 토를 다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공짜로 쓸 수 있는 좋은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경험을 만난다. 대부분 현대인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는 '실존적 소외감'을 느낀다. 서로 부대끼고 공감하고 위로하며 극복해 간다. 에너지를 얻고 삶의 의미와 용기를 얻는다. 안목과 통찰력을 키워 세상을 보는 눈을 가다듬는다. 이것이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이다.
꽤 긴 글이었다. 아마 여기까지 읽은 교컴가족들께서는 댓글 한 줄 달아야 겠다는 욕구를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말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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