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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컴지기 칼럼

아이의 삶, 부모의 삶

교컴지기 | 2017.10.16 15:46 | 조회 264 | 공감 0 | 비공감 0

학부모에게 주는 삐딱한 조언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면 여러 가지 달라지는 점이 있지만 가장 먼저 아이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학급 담임 선생님의 역할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담임 선생님께서 학급운영과 모든 교과의 수업에 도움을 주었지만 중학생이 되니, 담임 선생님은 조, 종례 시간과 본인이 담당하는 교과 시간에만 우리 반을 찾는다. 간혹 담임 선생님에게 다른 교과 공부에서 생긴 의문점을 질문하기도 한다. 이 경우 담임 선생님은 ‘그 질문은 OO교과 선생님에게 해 봐’라고 말한다. 아이 편에서는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친절이 아닌 달라진 안내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새로 만들어진 집단 안에서 자녀의 학업성취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할 것이다. 중학교라서 해서 아이의 성취도를 석차로 알려주진 않는다. 성취평가제 실시 이후로는 어디에도 과목별 석차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내 자녀가 집단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가가 아니라, 주어진 교육과정과 본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성실하게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와 학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누군가와 ‘비교’하는 방식을 피해야 한다. 이제 사춘기에 막 들어선 자녀와 대화할 때 옆집의 누구, 같은 반의 누구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면 의사소통이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부모는 내 자녀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그 친구는 공부를 잘하는지, 행실이 바른지 걱정한다. 그래서 그 기준으로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하여 질문한다. 공부는 어땠는지, 친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괴롭히는 아이는 없는지 등. 바뀐 환경에 따른 걱정이 많다. 그것보다는 아이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먼저 물어보라. 요즘 아이의 생각이 어디를 향하고 있고, 부모 입장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조력해야 할지 물어봐주는 것이 소통에는 훨씬 이롭다. 공부, 친구관계 등을 추궁하듯 물어보면 아이는 입을 다물 가능성이 높다. 친구와 겪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것을 부모와 상의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아이는 친구들끼리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화해하며, 그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는다.
중학교 1학년이 되면 이성에 대하여 눈을 뜨는 시기이다. 이성교제를 허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부모의 몫이 아니라 아이의 자유의지이다. 다만, 이 시기에는 청소년기의 여러 특징들이 드러나면서 상대 성(특히 남학생이 여학생을 향하여)에 대하여 무례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이성을 대할 때 정중한 태도를 갖도록 조언하라. 자유로운 대화도 좋지만 이성인 상대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좋은 책을 읽도록 권하는 것은 부모의 몫이지만,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까지 정해주는 것은 과잉 친절이자, 아이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책을 읽는 것은 지적 실천 행위이면서 마음의 소양을 쌓는 과정이자, 독립자존의 자기 성장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스스로 서서 자기 성장을 추구하는 아이로 기르고 싶다면, 아이의 독서 목록을 부모가 만들어주고 싶은 욕구를 버리는 것이 좋다. 아울러 책 읽기를 너무 진로 문제와 연계시키지 않도록 한다. 어떤 책을 아이의 독서 목록에 올리는 것이 좋을까를 부모가 고민하게 되면, 곧 개입으로 이어지고 아이는 책읽기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릴 수 있다.
자녀가 고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면 부모는 긴장한다. 아이도 긴장한다. 사실 아이는 본인의 공부나 진로 문제 때문에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긴장하는 것을 보고 더 마음을 졸인다. 아이 앞에서 너무 자주 걱정과 우려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른 활동에 신경 쓰지 않고 학업에 완전하게 몰입하는 아이가 대학입시에서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낼까? 최근 연구들을 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다. 공부에만 열중한 아이일수록 실제 대학에 들어가서 적응하는 데 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나중 일이고 일단 최대한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바로 아이를 미치게 만드는 부모의 비뚤어진 사랑이다. 몰아치기식 공부로 대학에 들어간 많은 아이들이 정작 대학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여 고생하고 있다.
진지하게 아이와 대화하라. 아이의 최근 관심사가 무엇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부모에게는 어떤 방식의 조력을 원하는지 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관리 대상으로서의 자녀가 아닌, 수평적 대화상대로 대등하게 인정해 주는 것이다. 만약 대화 중 부모의 실수나 잘못이 드러난다면? 과감하게 사과하라. 부모에게 사과를 받아본 아이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알며, 타인에게도 담대하게 사과할 줄 안다.
공부 외에 취미생활을 갖도록 허용하라. 아이가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에너지를 발산할 기회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그 다음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도 이 과정은 필요하다. 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부모가 아이를 오로지 한가지의 길 ‘공부’로 내몬다. 잘 쉬어야 하고, 충분한 잠시간을 확보해야 공부 효과도 나온다.
제목에서 삐딱한 조언이라고 했지만, 이 방식이 정상이다. 그동안 너무 뒤틀린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우린 뒤틀림으로부터 정상으로 돌아올 때 어느 정도는 고통스럽다. 그런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서 아이의 바람직한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이는 학부모로부터 부모로 다시 서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민낯 경합을 양해하는 사회

압축적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겪으며, 교육은 세속적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된지 오래다. 교육을 통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얻고, 이것이 사회적 신분으로 연결되는 경우를 많이 보고 있거니와, 이제는 그것이 너무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희소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 이 게임의 룰을 '공정'하거나, '정의'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교육정책은 결국 각기 다른 이해와 욕구 충돌을 중재하는 기술쯤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이해욕구의 당사자들은 제 편에 유리한 정책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교육을 통한 생존과 신분상승의 욕구가 교육의 수단적 목표와 과도하게 접합한다.
정책을 통하여 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해야 하고, 공정한 기회를 통하여 정의로운 결과를 보장하겠다는 약속, 이것에 대한 당사자들의 각기 다른 방향에서의 기대는 당연하게도 강하게 분출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세속적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교육의 목적이 기능하고 있다고 언급을 했는데, 그럼 다른 한편의 목적이 또 있을까? 말하자면 교육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사태에 대한 비판적 사고력을 가지며, 현실에 대해 윤리적 책임감을 바탕으로 참여하는 시민적 소양을 기르는 것, 이런 총체적 목표를 향하여 성장을 거듭하는 것 그 자체가 교육이라고 하면 어떤가.
즉각 두 가지 반응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있을 거다. 한 쪽에서는 '우리는 교육이 가진 고유한 목표는 상실한 채, 욕망 실현의 도구로만 생각해 왔던 것이 아닐까?'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한가한 소리 하고 있네. 현실이 그러하지 않은데 나만 고상하게 가치 운운하다 낙오하는 삶을 살라고?'와 같은 원망이 나올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긴 하나 두 편 모두 '경합에 편승'하는 것으로 현실에 적응한다는 것이다.
각자 그리는 교육의 상은 달라도 세속적 욕망은 일치하는,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묘한 이중적 행태는 거의 모든 차원에서 경합과 그로 인한 자원독식을 허용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다른 한편을 설득할 수 없는 상태를 지속한다. 유독 교육에서만큼은 민낯을 드러내도 사회적으로 '양해'가 되는 기이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 결국 이는 교육에서 ‘좋은 합의’나 권위 있는 조정자가 탄생할 수 없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정직하게 생각해 보면 교육을 가치로 생각하든, 수단으로 생각하든, 혹은 이 두 가지의 절묘한 통합이라고 생각하든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현재의 교육'이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강력한 현실 논리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모든 교육문제를 둘러싸고 이해 당사자가 나뉘며, 권위를 상실한 정책은 '교육적 가치'는 커녕 '이해 조정자' 역할을 하기도 버겁다.
교육은 '풍요로운 삶을 위한 자양분을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하자. 그럴듯해 보이는 이 정의는 이미 세상에 나오는 순간 이해 당사자는 자기시선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말하는 풍요가 정신적 풍요인지, 물질적 풍요인지가 우선 갈릴 것이고, 삶과 자양분, 형성과 같은 말들 역시 화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 정의는 '교육이란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위한 자원을 (배타적으로) 획득하는 경합의 과정'로 해석되어도 하등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유독 교육 분야에서 이해와 요구는 첨예하고, 사회적 합의는 난망해 보이며 정책은 냉소의 대상이 돼 버렸다. 아무리 고상하게 교육적 가치를 주장해도, 그것이 내 문제가 되면, 양보란 있을 수도 없는 이 전사회적 분위기는 시민적 소양의 성장은 고사하고 정신과 문화의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이거나,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부모의 입장이거나,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입장이거나 할 것 없이 교육을 게임쯤으로 격하시키지는 않았으면 한다. 언제까지 게임의 룰을 내편에 유리하게 정하는 것에 에너지를 소모할 것인가? 교육은 인생게임라는 전제부터 해체되어야 소모적 경합에서 벗어나 가치든, 소양이든 운운할 수 있을 것이다.
더는 보이지도 않는 미래 때문에 아이들이 현재의 즐거움을 유보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에게 과잉 몰입하는 부모들도 제 삶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단지 아이들

3년 전 전직하기 전 근무했던 학교는 '단지 안'에 있는 학교였다. 그 전에 5년 동안 근무했던 학교는 '단지 밖'에 있었다. 그리고 또 전에 7년 동안 근무했던 학교는 '단지 안'에 있었다. 여기서 '단지'는 이 동네에서 가장 큰 아파트 단지를 이르는 말이다. 1980년대 서울 외곽 신도시 개발붐에 따라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이후 이곳은 '사교육1번지'로 성장한다. 단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도로 포장마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서울의 변방이었다. 장마철 한강의 지류가 넘치면 거의 모든 집의 1층까지 잠기던 그런 동네였고, 복개되기 전 흐르는 하수의 냄새가 코를 찌르던 곳이었다. 지금 하수가 흐르는 복개천은 패션거리로 변했다. 이곳에는 단지 중심축을 따라 크게 도는 일방통행 도로가 있다. 처음 이 동네를 방문한 분들은 일방통행 도로 때문에 목적지를 찾아가는 데 애를 먹는다. 이 중심축을 따라 상권이 형성됐다. 주종은 학원이다. 거의 모든 건물에 학원이 입주해 있으며 건물 전체가 학원으로만 이뤄진 곳도 꽤 있다.
그러면, '단지 아이들'이라는 말이 어떻게 생겨났고 지금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보자. 처음 단지 아이들이라는 말은 1단지에서 14단지에 이르는 아파트 단지 안에 살면서 단지 안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다시 그 안에 앞단지, 뒷단지라는 말이 있는데 앞단지는 1~6단지, 뒷단지는 8~14단지가 들어가 있다. 7단지는 반은 앞단지에 반은 뒷단지에 있는 경계 지역이다. 앞단지의 교육열이 좀 더 높고 이들은 뒷단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비하여 자부심이 높다. 단지 아이들에 대비되는 말로 여러 가지가 있다. '길 건너 애들'은 단지와 비단지를 구분하는, 도로 저편에서 단지 안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비슷한 말로 '연립애들', '빌라애들'과 같은 말이 있었다. 처음에는 '뚝방애들'로도 불렸는데 단지가 형성되면서 밀려난 세입자들이 주로 뚝방 인근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끊임없이 경계 짓고, 구분하는 일은 이 동네에서 아주 일상적이었다. 어쩌면 그런 구분과 경계가 이 동네의 사교육 열기를 형성하는 에너지였을지도 모르겠다. 경계 밖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 단지 아이들에게 이르는 부모들의 요구였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고등학교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단지 안에 초고층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리고 바로 옆에 신설학교가 생기면서 주상복합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이 학교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됐다. 당연히 다시 그들만의 경계 짓기가 생겨났다. 주상복합에 사는 아이들과 그냥 일반 단지에 사는 아이들의 구별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 '단지 아이들'이라는 호명은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었다. '단지 안'에 살기 위해, 그쪽에 있는 학교에 배정받기 위해 단지 밖의 두 배가 넘는 주거비를 감당했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져 '단지 아이들'은 '길건너 아이들'과의 비교우위 구분에 더하여, 주상복합에 사는 아이들이 비하하는 경계어로 자리 잡았다. 단지와 길건너를 구분하고, 앞단지와 뒷단지를 구분하며, 이제는 주상복합과 단지를 구분하는 끊임없는 계층 구분과 경계 짓기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무기력과 희망 없음'을 주입한다. 물론, 이 말이 상위계층 아이들의 인성이 나쁘고, 무조건 경쟁에만 몰입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보아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얻은 문화자본으로 인해 단지 밖 아이들에 비해 독서량이나 교양이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우울의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단지'라는 호명이 이제 그보다 더 잘사는 초고층주상복합이 생김으로써 그들에 의해 비하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낄 뿐이다.

즐기고, 느끼고, 공감하는 공부

교사들을 대상으로 ‘교육과정의 새로운 접근’을 주제로 강의할 때 아래와 같은 활동을 한다. 참고로 내가 연수 때 하는 활동은 ‘쓰기와 말하기’다. 쓰기와 말하기는 교사가 전문성을 발휘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다.
다음의 1), 2) 어휘군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1) 이해한다, 느낀다, 즐긴다, 감상한다, 공감한다, 사고한다 2) 쓴다, 비교한다, 고른다, 구분한다, 대조한다, 열거한다
1)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학습효과이다. 반면 2)는 즉시 확인할 수 있는 학습효과들이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학습효과를 내어 놓으라는 압박을 받는다. 결국 2)에 집중한다. 2)에서 동떨어진 시험 문제는 공정성이 없거나 타당도가 낮다는 지적을 받는다. 유식한 척 하는 사람은 '행동적이고 명세적인 학습목표'로 쓰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진짜 교육적 의미를 담는 활동은 1)쪽에 다 있다. 도대체 아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즐기고, 느끼고, 표현하지 못하는 교육이 무슨 교육인가? 1)은 교육과정의 이해 영역이고 2)는 교육과정의 기술 영역이다. 이해 VS 기술, 예술 VS 과학... 이 차이에 주목할 때만 우린 이런 미묘한 교육의 속성들을 깨칠 수 있다.
그것이 학교교육과정의 편성운영이든,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든 배우는 자의 삶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 모두 기술을 전수하거나 기존 교육과정에 주석을 달아 편하게 가자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것 역시 우리 안에 슬며시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는 성과주의의 단면이다.
2)는 절대적 지식관을 전제로 한다. 지식이란 인식주체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절대적 지식관이다. 지식의 통약불가능성을 부정하는 정초주의의 반영이다. 그런 지식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암기하는 것이 좋고, 그런 예술은 감동에 빠질 것이 아니라 작곡가는 누구고 어떤 사조인지를 기억하고 상기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서 여기에 '동기'를 대입해 본다. 말하고 쓰기 위해 언어를 공부하는 자는 좋은 글쓰기와 말하기를 한다. 시험을 보기 위해 언어를 공부하는 자는 그냥 시험만 잘 볼뿐, 몇 문장도 유려하게 쓰지 못하고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한다. 가르치는 자의 편에서 단지 학습효과를 즉시 확인하고, 시험 성적의 객관성과 타당도를 높이며 학습자와 학부모의 민원이 두려워 그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학습목표에 매달리면, 이런 동기로 배우고 가르치면 교육은 망한다.
좋은 교육은 즐기고, 느끼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사고하고 표현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적 사태들의 종합이다. 아이의 변화를 믿고 기다려라. 어떤 학습효과는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만이 지금의 아이가 좋은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2013년 뉴욕 타임즈 해외판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한국의 학생들은 잔인한 대학시험을 보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한다. 극단의 경쟁이 학생들의 자살률을 높인다. 이 어리석은 시험을 통과하여 대학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당신의 삶을 유보하지 말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오로지 자식 걱정을 하는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가꾸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올인하는 것을 일종의 사회적 규범으로 여긴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데 10년 이상을 소비한다. 고등학교, 아니 대학공부를 마치고 나서 자녀가 어엿한 독립자존으로 섰는지를 보면 안다. 대학을 졸업해도 독립은커녕 취업과 결혼을 위해 부모가 또 다른 방식으로 보살펴야 할 형국이다. 이렇게 부모의 삶은 내 것이 아닌 자녀의 것이 돼 가고, 자녀교육에 집착하는 왜곡된 문화는 대물림의 악순환을 지속한다. 오늘 한국 사회의 처참한 비극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도처에 자녀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유보한 부모가 넘쳐난다. 그리하여 시민은 없고 삶을 저당 잡힌 부모만 있다. 서울시에 산다고 시민인가? 진정한 시민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공동체에 책임 있게 참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정치인이나 언론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까지 이해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 비판적 사고로 자신의 소양을 쌓아가는 사람이 시민이다. 이런 소양이 이른바 '시민성'이다. 이런 까닭에 오로지 자녀의 성공에만 집착하는 성인은 시민이 아니라 나이만 먹은 미성숙자에 불과하다.
시민성이 결여된 미성숙한 어른들로 사회가 채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선, 현상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어려워진다. 누군가 이념대결을 부추기면 거기에 휩쓸리거나 선전과 선동에 쉽게 넘어간다. 언론에서 하는 모든 이야기를 사실로 착각하거나 좁은 세계관 속에서 보잘 것 없는 사고를 신념화한다. 그래서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개별화된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린다. 생태, 문화, 평화, 성(gender) 감수성을 갖지 못해 꼰대 기질로 버틴다. 나아가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한다. 불의는 참고 불이익을 참지 못하는 이기적 삶들이 넘쳐난다. 이것이 모두 공부와 사유가 부족한 탓이다. 왜 그럴까?
모든 사유의 출발점을 내 가족과 내 자녀의 성공에 두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동체에 책임 있게 참여하는 삶이 아니다. 학부모 인문학 강의를 하다보면, 사회와 구조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도 어느 결에 '자녀교육' 문제로 귀결되는 것을 본다.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와 경쟁하고 엄마는 옆집 엄마와 경쟁한다. 아빠는 직장에서 동료와 경쟁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 압박이 부모들을 자녀에 집착하게 만든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라. 그것이 곧 자녀도 살리고 나도 사는 길이다. 성숙한 시민으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고 책임 있게 행동하면 자녀는 그것을 보고 배우며 성장한다. 책을 읽지 않는 부모가 자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공부하지 않는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하니 자녀는 부모를 신뢰하지 못한다. 공부하지 않는 부모는 미성숙한 성인일 뿐이다.
삼삼오오 모여서 자녀 이야기, 학교 이야기, 학원 이야기에 열중하는 부모들은 귀한 시간을 그렇게 소모해선 안 된다. 그 시간에 자신의 교양을 쌓고 지성을 가꾸라. 부모가 지성을 갖춘 시민이 되는 것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다. 또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모습을 자녀가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자녀도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한다. 교육기본법 제2조는 교육이념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부모는 여기에 충실하라. 부모부터 자주적 생활능력을 갖고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라. 그러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국가가 원하는 시민이 아닌가?

인성교육을 넘어 시민성교육으로

국립국어원에서는 '인성'을 사람의 성품, 각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성에 교육을 붙인 '인성교육'은 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자질과 태도 및 품성을 배양시키는 교육이다. 지금 우린 인성교육 만능을 넘어 인성교육 환원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교육의 문제를 진단하고 개선책을 제시할 때, 인성교육은 빠짐없이 대안으로 등장한다. 어떤 낱말이든 사회적 맥락과 만나 그 의미를 획득한다. 인성교육 과잉현상 역시, 무엇인가 인성교육이 필요한 사회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회적 맥락이란 무엇일까? 인성교육의 강화를 주장하는 분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물질만능주의, 개인화, 소외, 양극화, 관계불능, 강력사건의 빈발 등을 든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문제들은 모두가 사회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들이다. 특히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외 없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 문제의 근원에 인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논리는 사회모순을 은폐하고 개인의 책임, 곧 인성을 묻는다. 이러한 인성교육은 위험하다. 잘못된 사회 구조와 시스템을 비켜나 항상 개인의 성찰과 반성만을 요구하며, 개인의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잘못된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고 온존, 강화시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성과 창의성을 합하여 '창의인성교육'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성도, 창의성도 도구적 개념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말하는 '창의인성'이란 인성과 창의성을 동시에 갖춘 '경쟁력 있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인성 자체도 인간의 기본적 품성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사회에서 인간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스펙' 정도로 인식한다.
이렇게 해서 창의인성 교육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교사연구모임도 만들어지며, 수업에는 '창의인성교육 요소'를 삽입하며, 창의인성교육 사례를 발표하고 전파한다. 이 같은 현상은 창의와 인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얼마나 도구화, 기능화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른바 창의성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에서 시작된다. 창의성 교육 프로그램을 적용한다고 창의성이 신장되지 않는다.
결국, 창의인성교육은 '창의', '인성', '교육'이란 좋은 말을 붙여 만든 도구적 관점의 산물이다. 과학고에서 신입생을 뽑을 때 실시했던 과학창의성 전형도 그러하다. 결국 이 전형에 응하는 학생들은 평가가 가능하도록 가시적 성과 혹은 산출물을 보여야 한다. (교육부에서는 이 전형의 문제점 때문에 없앤다고 발표함). 창의성을 높여준다는 사교육이 팽창한다. 바야흐로 창의성이 하나의 스펙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인성교육을 시켜준다는 사교육 역시 여러 가지 형태로 선을 보인다.
지금 시급한 것은 인성교육이 아니라 시민성교육이다. 민주주의, 생태, 환경, 계급, 인종, 성(gender) 등의 문제를 인성으로 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시민성교육은 개별적 인간에게 의무와 책임을 부과하는 인성교육을 넘어 개인과 구조,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와 맥락에서 시작한다. 과거 '충효예' 같은 교육은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순종적 인간을 기른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금 이야기하는 인성교육 역시 충효예 교육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이다. 시민성교육과 인성교육의 중요한 차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것이다.
창의인성교육도 마찬가지다. 서로 들어맞지 않는 단어를 조합하여 프로그램화한다고 해서 창의적이면서도 품성이 갖추어진 인간이 길러진다고 생각하는가? 자유의지를 배제하고 매뉴얼에 기초한 창의성 교육은 실적 위주 전시성 사업을 부른다. 이런 풍경 꽤 보았다.

진짜 복지에 대해 알려 주마

몇 해 전 북유럽 교육탐방 길에 보았던 핀란드의 한 학교 풍경이 떠오른다. 블록타임 수업의 중간 2-30분을 쉬는 시간으로 정하여 아이들을 모두 운동장으로 내보내어 놀게 하고, 아예 교실 문을 잠그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한겨울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뛰어 노는 모습이 활기찼다. 이처럼 북유럽 국가에서는 발달 시기 아이들의 놀이와 잠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준다. 보통 고등학생들도 여덟 시간 이상의 수면 시간을 보장받고, 심지어 고3 학생들도 오후 세시 반이면 귀가하여 다양한 신체 활동을 즐긴다. 이 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대책 없이 아이들의 신체활동을 권장할까?
내 의문에 대한 그들의 답은 간명했다. 아이들이 충분히 놀고 에너지를 발산하면 그 다음 수업 시간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아이들이 한창 성장하는 시기에 충분히 신체활동을 하게 해야 성인이 됐을 때 잔병치레나 중병에 걸리지 않아서 국가의 의료보험 재정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른바 이들이 자랑하는 ‘무상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복지선진국 북유럽 국가에서 무상의료가 가능할 수 있었던 바탕은 아이들에게 충분한 신체활동과 잠을 보장하여 소모적 의료재정 투입의 원인을 최소화한 것이다. 무상의료 정책을 시행하는 나라에서 개인의 의료비를 국가가 부담하려면 개인의 몸을 먼저 튼튼하게 하고 질병을 예방하여 의료비용의 국가 부담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이것이 복지의 선순환이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기까지 과잉 학습, 과잉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게 하고 그렇게 하여 암을 비롯한 중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아졌을 때, 4대 암이나 희귀난치병 등에 대해 국가가 의료비를 부담하겠다는 식의 복지정책은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난 정부에서 3~5세 무상보육 정책인 누리과정 예산 때문에 지금 한창 중앙정부와 시도교육청이 마찰을 빚었다. 시민들이 보기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대통령이 공약을 했는데 사업만 펼쳐 놓고 비용 부담은 시도에 떠넘기는 방식이니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무상급식 문제 등을 슬쩍 끼어 넣어 진영 다툼을 유도했다. 복지에 관한 철학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얘기다. 시민들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부모의 사회적 활동을 보장한다? 허울 좋은 이야기일 뿐이다. 자기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활동과 생계전선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등치될 수 있는 것인가? 부모들이 오랜 시간 직장에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아이를 부모의 품에서 분리해 놓자는 것이 ‘누리과정’이고 ‘돌봄교실’이다. 복지철학의 부재는 이렇듯 복지 공공성의 왜곡과 일탈을 부른다.
과잉 노동에 시달리는 젊은 부모들을 칼퇴근시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주는 것이 제대로 된 '보편적 복지'이고 '복지 공공성'이다. 아이를 밤늦도록 부모에게서 분리하고 그 비용을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지, 시도가 부담해야 하는지 논쟁하는 것 역시 복지 철학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다. 물론 따지고 들어가면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국민을 상대로 공약을 했으므로 그것에 관해 책임지는 것이 일차적이다. 그러나 우린 예산 다툼을 넘어 제대로 된 복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치적, 국민적 합의조차 없다. 그러니 답답하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장의 학습시간, 세계 최고의 자살률... 이것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복지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좋은 복지는 재정투입의 최소 조건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충분한 잠과 놀이 시간을 확보해주어서 발달이 충분하게 이뤄지도록 돕는 것, 성인들 역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육아시간 및 여가의 시간을 확보해주자는 것이다. 국가는 국민들이 스트레스 받을 일을 만들지 말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책무를 다하여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의료비 지출이 획기적으로 감소할 터이니 그것을 바탕으로 ‘무상의료’까지도 실시할 수 있다는 담대한 전망을 가지라는 것이다.

'과잉'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우리 교육은 '결핍'이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과잉'의 상태에 놓여 있다. 더 문제는 교육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과잉의 상태를 지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필요한 정도보다 넘치면 과잉이다. 그 반대일 경우 결핍이다. '필요한 정도'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지만 일반상식 수준에서만 생각해도 필요한 정도는 직관으로 알 수 있다. 우리 교육의 많은 문제들은 과잉을 결핍으로 착각하는 데서 온다. 기왕 부모 교육학이라 했고 번호까지 붙였으니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부모 관심사 중 으뜸인 자녀교육 문제부터 풀어보자.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부모는 어떤 생각을 먼저 하게 될까? 아이가 '자신의 삶'을 야무지게 살기를 바랄까? 아니면, 아이를 위하여 어떤 공부를 어느 시기에, 얼마나 시키는 것이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 한국의 일반적인 부모들이 자녀와 관련하여 가장 으뜸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육'이다. 왜 그럴까 하는 문제는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고, 자나깨나 '아이=교육'으로 몰고 가는 등식 때문에 아이도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부모 또한 그들의 삶을 살지 못한다. 단적으로 말하여, 비극적 삶이다. 교육이 희망을 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부모와 아이를 비극적 삶으로 이끈다는 역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첫 번째 문제, 너무 일찍 공부를 시킨다
'공부를 한다'고 하지 않고 '공부를 시킨다'라고 한 것은 이 행위의 주체가 아이가 아닌 부모라는 말이다. 특히 한국 아이들은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때부터 무분별한 '학습노동'에 노출된다. 겨우 두 돐이 지났을 뿐인 아이가 수시로 바라볼 수 있도록 벽에 '가나다라...'와 'A, B, C, D...' 알파벳이 적힌 차트를 붙여 놓는다. 아이에게 제공되는 도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것들보다 학습에 유리한 쪽으로 선별된다. 어린이집에서 보육만 담당하는 곳은 없다. 유치원에서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뒤쳐지지 않도록 읽기, 쓰기 교육이 행해진다. 영어교육을 병행하는 곳도 있다. 아이가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반교육'이다.
두 번째 문제, 너무 앞당겨 공부시킨다
아이에게 무려 10년을 앞당겨 공부시킨다는 뉴스가 있었다. 나아가 초등학생에게 의과대학생 수준의 학습을 시키고,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과외 교사가 미술가들의 그림집을 보여주면서 "고갱 할아버지는 후기 인상파셨는데..." 하는 뉴스 영상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1~2년 앞당겨 하는 선행학습은 일상이 돼 버렸다. 아이들이 앞당겨 배우는 내용의 어려운 개념과 원리를 이해할 수 없으니, 문제를 푸는 기술 위주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많은 아이들이 수학문제의 정답을 구해 놓고도 어떻게 풀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정작 학교 수업에서는 흥미를 잃어버린다. 자신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생각하는데, 딱딱한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 집중을 강요당한다. 단언컨대 아이의 발달 단계를 무시한 마구잡이식 선행학습은 학습이 아닌 '학대'이다. 이로써 아이는 '일탈'할 수 있는 조건을 빠짐없이 구비한다.
세 번째 문제, 너무 많은 시간을 공부한다
공부 시간 자체가 많은 것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삶과 유리된 잡다한 지식들을 기계적으로 과다하게 장시간 주입하는 경우, 반드시 탈이 나게 돼 있다. 한국 아이들은 신체적, 정서적으로 발육이 왕성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춘기 시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여한다. 이로써 아이들이 가져야 할 상상력과 영감, 도전정신, 신체적 발현 욕구, 제대로 된 탐구의욕이 모두 날아간다. 이들에게 공부의 목적은 단 하나,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가기'이다. 그것은 십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들어왔고, 생각해 왔으며, 꿈에서도 그리는, 그래서 마침내 고착화된 욕망이 됐다. 여기에 진정한 학습동기가 파고들 수 없다. 그래서 방향을 전제로 한 동기보다 '강한 동기'가 환영받는다. 잘못된 동기는 '강할수록' 위험한데도 말이다. 아이가 끔찍한 폭력에 노출되어 가해자와 피해자로 불리고, 더러는 스스로 제 생을 마감하는 이유, 무엇인가? 철학도 방향도 없이 '강한 동기'만을 요구받다가 더는 현실을 딛고 일어설 힘을 상실한 까닭이 아닌가?
너무 일찍, 너무 앞당겨서, 너무 많은 시간 공부하는 문제를 놓고 이것을 강요하는 것들을 하나씩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혹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경쟁적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고도 하고, 공교육 시스템이 부실하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교사들의 빠르고도 강력한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 사태가 있게 한 여러 구조와 환경의 문제가 있다. 나쁜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서 아이를 나쁘게 키운다는 것이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태는 두 가지의 방향에서 고민을 해야 한다. 하나는 시민들의 깨어있는 생각으로 지배구조를 잘 구축하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고, 체계적인 준비와 연대가 필요하다. 이것을 '정치'하는 자들에게 맡기지 말고 다양한 층위에서 풍부한 활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의 진척이 더디다고 해서 '자녀의 삶을 죽이는' 부모의 왜곡된 교육관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향 중 하나는 '부모가 깨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담대한 방식의 깨어남이라야 한다. 깊이 생각하라. 아이가 성장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에 반드시 명문대학과 좋은 직장이 필수 조건인지, 진정 아이가 에너지를 쏟고 싶어 하는 곳이 어디인지, 어떨 때 즐거워하는지 '반드시' 살피라. 당신 삶이 아니다. 아이가 생생한 삶을 느끼며 살 수 있도록,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느날 시스템의 획기적 개선과, 좋은 교육환경과, 좋은 교사를 만나도 헛것이다. 교육혁신의 바람도, 소망하던 교육과정 재구성도 준비 없이 맞으면 어떤 사태가 되는지 우리는 보고 있다.

진짜 공부

우리 청소년들이 가장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공부해라”라는 말이다. “그만 먹고 공부해라”, “그만 놀고 공부해라”, “그만 자고 공부해라”... 청소년들이 귀가 따갑게 듣는 말들이다. 아마도 먹는 것, 노는 것, 자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공부인 모양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필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20년이 훌쩍 넘어서야 잘 먹는 것, 잘 노는 것, 잘 자는 것이 공부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잘 하는 것이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었다. 선생님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화려하게 성공한 사람, 공부를 못하여 인생의 낙오자가 된 사람들의 예를 수시로 들어주시면서 혹시라도 마음이 풀어질까 경계하며 쉴 새 없이 자극을 주셨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오늘도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열두 시까지 쉼 없이 하는 공부가 도대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물론 여러분의 대답은 있다. 대학입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 그런 사치스런 생각을 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공부를 안 하면 대학에 못 들어가고 대학에 못간 사람을 인생의 실패자로 낙인찍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 성인들이 아니냐고… 그래서 필자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청소년들은 사실상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청소년들이 하는 공부의 대부분은 사실 여러분들의 선배들이 축적해 놓은 지식을 가능한 많이 보고, 또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러한 지식들 가운데에는 당장 필요해 보이는 것도 있고 영원히 써먹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다. 초중고등학교 12년을 거치면서 공부한 지식들은 정확히 하루 만에 심판을 받는다. 그러니까 수능시험을 치르고 나면 너무 허탈한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 심하게 말하면 도박과도 같은 공부이다.
필자는 이러한 방식의 공부로 수많은 우리의 발전 가능성 있는 청소년들의 능력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다른 내용, 다른 방식의 공부를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서 했더라면 훨씬 커다란 성취감과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항상 느낀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공부가 실제로 사회에서 타인을 만나 경험을 쌓고, 의미 있는 소통 속에서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기에는 다소 미흡한 것 같다. 요즘 젊은 청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참으로 ‘아이디어가 빈곤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잘못된 공부 방식의 결과이다. 많은 양의 지식과 정보를 기억하는 데만 신경을 썼지 이것을 다시 내 생활 속에서 적절하게 적용하면서 더 새롭고 창조적인 지식들로 구성 해 가는 데는 여러모로 미흡해 보인다.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 상황도 어딘가에 있을 모범답안을 먼저 찾는다.
사실 똑같이 한 시간 공부를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실생활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분이 될 수도 있고 그저 시험을 위한 단순 암기에 그칠 수도 있다. 대학입시는 몇 년 고생하면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통과함과 동시에 여러분들은 그 몇 배의 기간에 해당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왕에 하는 공부라면 보다 창조적인 방법을 고민해 볼 수 없을까? 물론 이 부분은 선생님들도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이다. 다행히 요즘 들어 이런 학습방법을 고민하는 선생님들이 예전보다 훨씬 늘어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똑 같은 지식이라도 단순하게 암기를 통하여 받아들이는 것보다 친구들과의 토론과 협동 작업을 통해서 가치를 판단하고, 더 넓고 깊은 지식과 호흡하는 방식은 여러분들의 아이디어를 훨씬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누구나 입만 열면 정보화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간상은 ‘창조적이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학습방법으로 ‘자기주도적 학습’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구호로만 외치면서 실제 우리들의 학교는 과거의 공부 방식에서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필자도 노력하겠다. 그러자면 청소년들과 그리고 부모들의 공감대 형성이 꼭 필요하다. 진짜 공부 한 번 해 보자. 서울특별시교육청 정책연구 장학관 함영기
이 자료는 학부모 인문학 강좌 자료 중 일부입니다. 특히 교사이자 학부모인 샘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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