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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컴지기 칼럼

기초학력의 미래지향적 재개념화와 정책 전환 탐색

교컴지기 | 2019.04.06 20:25 | 조회 872 | 공감 1 | 비공감 0

기초학력의 미래지향적 재개념화와 정책 전환 탐색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수원

중등교원연수부장   함 영 기

 

기초학력, 메타프레임적* 접근

 

기초학력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교육부가 발표한 2018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가 발단이 됐다. 교육부는 중3 및 고2 학생을 대상으로 3% 정도를 표집하여 총 473개교, 26,255명에 대한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 국어, 수학, 영어 교과에 대하여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정의적 특성 분석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학교생활 행복도의 '높음' 비율이 중학교 61%, 고등학교 59%로 비교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2015년과 비교했을 때 중, 고 각각 6.7%p, 11.6%p 증가한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교과별 성취수준 중 보통학력 이상 비율은 모두 80% 이상인데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높다는 것, 그리고 정의적 특성 분석 결과 학교생활 행복도는 이전에 비하여 상당한 폭으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이 같은 데이터를 근거로 한 아이도 놓치지 않고 기초학력을 책임지겠다는 '기초학력 지원 내실화 방안'을 발표했다. 전반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과거의 일제고사 방식으로 인식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학력을 정의하는 방식, 기초학력보장법의 내용, 주요과제 및 세부 추진 계획에 있어서는 여전히 지난 시기 지원 방안에서 크게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초학력 진단체제의 개편 등 4개의 대영역과 각각의 영역에 따른 총 26개의 세부 과제를 나열하고 있는데 이 내용이 아쉬운 것은 단지 그 자체로 미흡하거나 불충분해서가 아니다. 추진과제를 보면 기초학력에 대한 개념화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프레임 설정 부분에서 특히 아쉽다.

 

그동안 기초학력이라는 개념을 지탱해 온 주요 수단은 '학업성취도 평가'였다. 애초 전집평가를 실시하다가 이 방식이 무용하다는 여론에 따라 표집으로 바꾸어 실시하고 있었다. 이 결과는 자주 교육적 해석보다는 정치적 공방의 소재가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치상 나타난 기초학력 미도달률만 가지고 정말 우려할 만큼 기초학력이 하락한 것인지, 나아가 정말 그런 방식으로 구한 데이터가 현실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는 것인지도 지금으로선 모호하다. 우린 그동안 기초학력, 학력, 역량을 바라보는 상이한 접근 방식에 대하여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미래역량 논의가 한창일 때 '학력이냐 역량이냐'와 같은 논쟁이 있었다. 사실 이 같은 논쟁은 무익하다. 역량 혹은 학력의 두 가지 개념 중 무엇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미래역량 논의를 하면서 일부 학자들이 마치도 미래역량은 기존의 지식교육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인 양 확대 해석을 한 탓에 '학력 : 역량'이라는 왜곡된 구도가 설정되기도 했다. 그러자 지식교육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사람들은 이른바 역량론자들이 기본학습을 소홀히 하면서 그저 아이들의 흥미에 기대 안이한 교육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역량 논의를 할 때 큰 범주에서 동의하는 내용은 지식, 가치, 태도 영역이다. 흔히 지식은 인지역량으로, 가치는 사회/정서역량으로, 태도는 행동(사회적 참여)역량으로 푼다. OECD 핵심역량을 비롯하여 국가교육과정의 핵심역량, 시도교육청의 역량 관련 논의 등 지금까지 상당히 역량 담론이 제시되었다. 한편 기존의 역량(competence) 담론의 대안으로 또 다른 역량(capability) 담론도 제출되고 있다. 어떤 역량 접근이든 각 역량 담론들이 첫 번째 범주로 중시하는 것이 바로 인지역량이다. 그러니까 혁신교육이 학력신장을 소홀히 하고 아이들의 흥미에만 집중했다는 것은 왜곡이다. 혁신교육은 당연히 미래역량의 가장 중요한 범주로 인지역량을 지향한다.

 

인지역량은 사실적 지식의 습득을 비롯하여,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 지식을 이해하고 분석, 종합하는 능력, 비판적 사고 능력을 포함한다. 인지역량의 핵심 구성 요소는 대상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결국 문해력(literacy)’이다. 지금 세간에 회자되는 기초학력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기준을 정하고 그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에 주어져야 할 최소학력을 말한다. 기초학력 보장법안에 따른 정의는 '학생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을 통하여 갖춰야 하는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을 포함한 최소한의 성취수준을 충족하는 능력'이다.

 

정해진 기준에 따라 문항을 개발하고 평가 결과에 따라 어떤 기준에 이르지 못한 학생들의 비율을 따진다는 것은 한 학생(each one)의 능력 개선과 관련해서는 큰 시사점을 주지 못한다. 토드 로즈(2015)는 그의 책 평균의 종말에서 교육정책이 평균과 데이터에 함몰돼 결국 아무도 만족하는 정책을 내어 놓지 못한다고 질타한다.

 

지식과 역량, 학력과 기초학력을 분리하여 사고하면 결국 이 각각의 능력을 신장하기 위한 절차와 프로그램을 고민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학력은 인지역량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기초학력이라 부르는 사물에 대한 이해 능력, 기본 교양 등은 어떤 기준을 정해 도달하려는 노력이 아닌, 기본 능력과 교양을 갖추고 더 깊은 지식을 탐구하거나 공감하고 실천하는 능력의 저변을 포괄적으로 이른다. 아울러 이른바 기초학력은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한 아이의 능력에는 여러 가정적 사회적 변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학습지원만 따로 떼어서 지원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학습복지 전략과 연계하여 사고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육부에서 발표한 데이터에 근거할 때 보통 수준 이상의 학생들도 많은 것으로 보아 기초학력 자체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격차가 발생하게 된 사회문화적 요인을 함께 조명해야 한다.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따라서 해결책도 복합적이며 입체적 성격을 띤다. 기초학력만 따로 떼어 프레임에 가둘 이유가 없다. 진정 해결을 원한다면 논의의 반경을 넓혀 한 학생을 둘러싼 제 요인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미래교육 담론이 있었다. 우리가 기초학력이라는 기준 중심 학력관을 다시 꺼내들면 미래지향적 노력에 대한 자기부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단순히 학력으로, 기초학력으로 명명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부터 토론이 벌어져야 한다. 아울러 학력이냐 역량이냐 하는 무익한 논의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식은 역량의 가장 중요한 범주인 인지역량이고, 이제 이 역량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지식을 연결하고 창조적으로 변용하며, 창의적 생성까지를 아우르는 포괄적 역량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 논의가 나올 때마다 정치 논리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기준과 수치를 뛰어 넘는 학력관에 대한 미래지향적 프레임 설정이 필요하다.



평균이라는 유령

30여 년 전 초임교사일 때 국영수 등 이른바 '주요과목'은 월례고사란 이름으로 한 달에 한 번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학기에 한 번씩 중간, 기말고사를 보았으니 일 년이면 총 여덟 번의 학교시험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경우 3학년은 연합고사를 봐서 고등학교 진학을 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비하여 수시로 모의고사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 년이면 대략 8~12회의 시험을 보았다. 한마디로 출제-시험-채점의 사이클이 일 년 내내 계속됐다.

 

어느 날 교장이 불렀다. 무슨 일로 불렀을까 궁금해 하면서 서무실(지금의 행정실)을 경유하여 교장실로 들어섰다. 교장이 앉으란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냥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도 벌 받는 학생 꼴이었다. 교장은 본인의 개인수첩에 적힌 무엇인가를 보고 언성을 높였다.

 

"아니, 함 선생은 아무리 초임이라도 그렇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으면 담임 반 성적이 꼴찌란 말이요! 본인이 수학과 아니요? 근데 어떻게 그 반 수학 성적이 꼴찌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문제를 풀게 해봐요. 성적 금방 올라가지. 아무튼 다음 달에는 중간 이상으로 올려 봐요."

 

수학교사인 내가 교장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 설명하기',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문제를 많이 풀도록 하는 것'이었다. 교장실을 나와서 교실로 올라가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갓 발령받은 내 입장에선 억울하기도 했다. 올해 내가 맡은 반은 그 학교의 명랑 쾌활한 아이들은 다 모아 놓은 듯 했다. 수업에 집중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소위 반 분위기를 이끌어줄 상위 그룹의 학생이 없었다. 기초가 돼 있지 않은 아이들이 유독 많았다. 그런데 옆 반에 수업을 들어가면 몇 녀석이 설명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줘서 나의 가르침을 정당화해주니 전체적인 분위기도 좋아 무척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때는 1980년대 중반, 교장의 권력은 지금보다 훨씬 절대적이었다. 가끔 마주치면 "열심히 가르치고 있죠?" 이렇게 중간 점검이 들어왔다. 그 말을 들은 날은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것 마냥 하루가 힘들었다. (사실 이로부터 1-2년 후에 난 교장 말을 듣지 않는 골칫덩어리 교사가 된다.) 그 학교는 신설학교였고 첫 해 나와 또 한명의 신임교사, 이듬해에 또 신임교사 둘이 와서 2년차까지는 신임교사 4명이 가르쳤다. 그러니 교수학습방법과 관련하여 물어볼 만한 경력교사도 없었던 셈이다.

 

하도 교장이 괴롭히니 분석을 해 보았다. 내가 들어가는 다섯 학급의 특성, 아이들 분위기, 각 학급의 담임들의 학급운영 방식을 살폈고, 다른 수학교사들과 협의하여 서로 수업을 참관했다. 분석 결과 교사들의 가르치는 지식, 기술, 열정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 반에 기초가 몹시 떨어지는 아이들 몇이 있고, 최상위권 학생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유달리 학생들이 명랑한 것 정도였다. 이때부터 동료교사와 협력하여 배움이 더딘 학생들의 희망을 받아 한 반에 70명씩 넣고 일주일에 두 번 보충학습을 했다. 성적이 저조한 이유 중 교사 변인이라 할 수 있을만한 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큰 변동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아이들의 전입, 전출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우리 반에서 전학을 가는 학생은 상위권, 전학 오는 학생은 하위권인 거다. 성적 저조의 큰 원인은 '학급 구성원'이었던 셈이다. 그럼 교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다음 해에는 제비뽑기를 잘 해서 분위기 좋은 학급을 만나야지, 혹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전학을 가주면 좋고, 새로 전학 오는 아이는 공부 잘 하는 아이로 받았으면... 이런 비교육적 생각을 하게 된다. 담임들이 이런 문제로 예민해지니 반 편성을 할 때 전교 석차를 지그재그로 배치하여 최대한 성적을 고루 분포하게 하는 방법을 썼다.

 

생각해보니, 내가 교장으로부터 실력 없는 교사로 질타를 받는 것은 내가 맡은 학급, 특히 우리 반의 수학 성적, 즉 개별 학생들의 성적을 모두 더하여 학생 수로 나눈 평균이 낮다는 것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성적을 올려서 평균이 조금 올라가더라도 배움이 더딘 아이의 성적이 그대로라면 이 평균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거기다가 학급별로 석차를 내어 석차가 낮은 학급 담임을 야단을 쳐서 평균을 올린들, 하위권 아이들의 학력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평가의 개념에 접근하는 상이한 방식들

 

그리 멀지 않은 지난 날, 학교에서 시험을 보면 일등부터 꼴등까지 석차를 내어 가정으로 통보했다. 그리고 학급별로도 성적 평균을 비교하여 최상위 반부터 최하위 반까지 줄을 세웠다. 석차를 내어 성적을 비교하는 방법이 상대평가, 석차 없이 자신이 도달한 점수만을 기록하면 절대평가다. 상대평가는 집단 내에서 누가 우수한지 판별하거나, 소수의 인원을 선발할 때 쓴다. 그래서 상대평가를 지향하는 관점을 '선발적 교육관'이라고도 한다. 이 방식의 평가는 피평가자 간에 경쟁을 조장한다. 이 평가방식의 관심은 교육목표에 도달하는 것보다 다른 학생보다 앞서는 것에 있다.

 

절대평가는 성적은 산출하지만 다른 학생과 비교는 하지 않는다. 개인의 학습목표 도달 정도를 측정하기 때문에 우수학생이 많이 나올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등급으로 표기하는 상대평가는(지금의 수능과 내신이 대표적), 얻은 점수를 줄 세워 일정 수를 잘라 특정 등급을 부여한다.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나보다 잘 한 사람이 있으면 설사 학습목표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최상위 등급은 받을 수 없다.

 

절대평가는 줄 세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설계를 잘 하면 다양한 평가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절대평가를 평가혁신의 시작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생들의 성장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하되, 그것을 비교하지 않으므로 이 관점은 '발달적 교육관'에 기초한다. 물론 완전히 기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평가 역시 설계를 잘못하면 평가의 본질을 훼손할 수도 있다.

 

초임 때 그렇게 나를 볶아댔던 교장이 가졌던 관점은 '선발적 교육관'이다. 일단 시험을 보았으면 집단 내에서 상위권이 돼야 한다는 논리다. 이 방법은 반드시 일등과 꼴찌를 가르기 때문에 만약 내가 꼴찌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교장실로 불려 들어가 질책을 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귀에 못이 박할 때까지 반복하여 설명해주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때까지 문제를 풀게 하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사실상 과거의 예비고사, 학력고사, 현재의 수능 모두 '선발적 교육관'을 기반으로 한다.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원은 한정돼 있으므로 선발과 탈락을 가르는 정교한 방법을 개발하고자 한다. 선발에는 선발의 이유가, 탈락에는 탈락의 이유가 설명이 돼야 한다. 이 이유가 설명되면 '공정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고 납득이 되지 않으면 공정하지 않다는 시비가 일어난다.

 

학종:정시논쟁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정시는 계량화된 성적과 등급을 보여주니 승복할 명분이 생긴다. 그런데 학종은 그 방식을 잘 모르니 탈락의 이유가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종은 고등학교에선 '기록'하는 것이지만 대학에선 '줄 세우기' 자료로 활용한다. 학습자의 전인적 성장을 기록한다는 측면은 평가가 지향해야 할 바다. 그러나 그것이 선발의 방법으로 쓰이니 학부모는 공정성에 시비를 건다. 사실상 지난 해 논쟁은 이것이 핵심이었다.

 

지금 중학교까지는 절대평가를 적용한다. 예외가 있는데 특성화고 전형에 쓰기 위해 3학년 말에 모든 학생들을 줄 세워 백분율을 산출한다. 특성화고등학교는 그 설립 취지에 맞게 새로운 전형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그래야 일단 중학교까지라도 진정한 절대평가가 완성된다. 간혹 학부모가 자기 자녀가 전체에서 어느 위치에 속하는지 묻기도 한다. 그런데 공식적으로는 석차를 내지 않으니 어떤 교사는 엑셀에 아이들 전체 성적을 얹어 석차를 내어 주기도 한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5년 전만해도 이런 교사들이 있었다. 교사 자신도 석차가 없으니 답답하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평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발적 교육관에 기대는 태도다.

 

지금은 학급별 석차를 산출하지 않는다. 무익하기 때문이다. 내가 초임교사일 때 그 교장의 입장에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확실한자료를 토대로 교사를 통제하는 맛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선발적 교육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사를 관리, 통제하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학급의 성적이 학년평균에 근접해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가 나온다. 과거에는 학급 석차가 낮으면 질책을 받았는데 지금은 평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질책을 받는다. 그런데 이 가상의 수치인 학급평균이라는 것은 학습자 개인의 학습개선과는 큰 상관이 없다. 모든 아이들이 동일한 폭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터 접근법과 개인의 관계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기초학력 미도달률은 어떻게 산출하는 것일까. 만약 서울 학생들의 수학교과 기초학력 미도달률이 10%라고 하자. 이 숫자는 서울에서 평가에 참여한 학생들 중 일정한 성취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들을 모두 더하여 나온 수치를 전체 학생 수에 대한 비율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서울학생 수학교과 기초학력 미도달률 10%란 비율은 학습자 개개인의 성취와는 큰 관련이 없다. 우리 학교는 낮아져도 다른 학교가 높으면 서울의 기초학력 미도달률은 개선된다.

 

왜냐하면, 서울 안에서도 지역 격차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20개구에서 기초학력 미도달률이 증가해도 나머지 5개구에서 획기적으로 감소했다면 학업성취가 개선됐다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성취를 계량화했을 때 생기는 난점이다. 그런데 이런 접근은 학력을 근거로 한 정치적 공세를 펼치기에 좋다. 석차나 평균 등의 계량화된 성취수준은 외적으로는 학생들의 학습개선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교사나 학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학력을 평가하는 방식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정치적 공세의 수단이 됐다. 이 공세의 핵심은 '전집 표준화 검사'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학생들의 역량 함양은 전집이냐 표집이냐와는 무관하다.

 

따지고 보면 상위 %, 하위 %로 구분하는 교사들의 근무성적평정도 상대평가적 요소를 담고 있다. 그냥 열심히 근무해서 될 일은 아니고 상위 30% 안에 들어야 를 받을 수 있다. 차등 성과급 역시 누군가는 S등급을, 누군가는 B등급을 받은다. 그런데 교사들의 성취라는 것을 질적으로 측정할 수 없으니 그저 연구수업을 몇 회했는가, 수업은 일주일에 몇 시간을 하는가, 연수는 몇 시간을 들었는가와 같이 업무를 기능화하고 계량화한다. 업무를 계량화하면 교사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파편화할 수밖에 없다. 차등 성과급 도입 이후 학교현장이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계량화한 성취수준의 함정을 알아보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다. 알다시피 현대국가의 모든 정책은 지표 싸움이다. 수출 몇 억불 달성, 국가경쟁력 몇 위, 국민총생산, 개인별 소득 수준 등등 모두 계량화된 수치를 합하거나 평균 낸다. 예컨대 여기 열 명의 시민이 있다. 아홉 사람은 소득이 없다고 하고 그 중 한 사람은 일 년에 일억을 번다고 하자. 그럼 이곳의 개인 소득 평균은 한 사람 당 천만 원이다. 실제 소득 양극화가 심한 나라에선 이런 현상이 빈번하다. 이때 정책은 무기력한 아홉 명에 신경 쓰기보다 한 사람이 돈을 더 잘 벌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것이 이른바 규제완화다. 그러면 총소득이 많아져서 고용이 창출되고 소득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는 논리다. 실제로는 모든 시민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지만 평균이라는 수치를 올린다.

 

한 가지 더 예를 들겠다. 한 학교는 학급당 학생 수가 30명이다. 다른 학교는 소규모 학교라 5명이다. 정책은 이를 더하여 둘로 나눈다. 결국 다른 것은 사라지고 학급당 학생 수 17.5명만 남는다. 정책은 17.5명에 맞게 수립된다. 결과적으로 30명의 학교도, 5명의 학교도 만족하지 못하는 정책이 나온다. 이 역시 평균의 함정이다. 평균은 아주 쉽게 집단문화를 만들어낸다. 평균을 중시하는 곳에선 평균을 깎아 먹는 구성원은 질타를 받는다. 심한 경우 집단 밖으로 축출되기도 한다. 미국에선 학업성취도 평가의 평균을 올리기 위해 부정행위를 했다. 그 평균이 올라간다고 해서 슬럼가에 있는 유색인종들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 인간의 개별성과 고유성에 집중하지 못하면 이 같은 폭력이 지속된다.

 

아마티아 센(1999)은 이 점을 잘 간파하였다. 나라마다 GDP 상승에 열을 올리지만 실제 이 같은 정책이 빈민을 효과적으로 구제하는 것은 아니다. 토드로즈(2015) 역시 평균에 기초한 교육정책을 비판한다. 이미 오래 전 찰스 디킨스는 소설 어려운 시절에서 한 교실 사례를 들어 나라가 부자인 것과 학생 개인의 삶은 연관이 없음을 말했다. GDP 관점은 국민을 동원한다. 우리는 산업화 시기에 이를 경험한 바 있다. 세대가 바뀌고 바뀌어 계몽과 동원으로는 미래사회의 다양한 변화에 대처할 수 없게 됐. 새로운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이런 전근대적 관점들을 먼저 청산하는 것이 순서다.

 

 

성취수준 계량화의 의도

 

미국의 낙오방지법(NCLB)에 의한 성취도 평가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시도했던 전집 표준화 검사는 과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우리 사정에선 어떠할까. 그것은 지난 시기 소위 일제고사라고 불린 전국적 학업성취도 평가 때 드러났다. 이 데이터가 전집이든 표집이든 신뢰성 면에서는 검증이 힘들다는 것은 현장 교사들이 잘 알고 있다.

 

먼저 교육평가는 왜 하는지 알아보자. 학습자의 상태 점검(진단평가), 학습과정의 개선 사항 추출(형성평가), 일정시기 학습 후 목표도달도 측정(총괄평가), 직접 관찰에 의하여 수행 정도를 평가(수행평가) 등 교육목적을 위한 평가들이 있다. 학교현장에 이뤄지는 평가는 사실상 위와 같이 이뤄진다.

 

문제는, 이 모든 평가들의 목적이 학습자 상태를 진단하거나, 교육목표 달성도의 점검과 교수학습 개선의 지표를 추출한다는 것보다는 오로지 학생의 상대적 성취 정도에 과잉 경도돼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중고에서 실시하는 모든 평가는 일종의 '준비평가'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한 준비평가인가. 바로 대학입시다. 현실에서 평가의 성격은 본질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 시험이 내신에 반영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에 따라 시험 보는 태도가 다르다. 전집 표준화 평가는 내신에 반영하지 않는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엎드려 자는 학생, OMR 카드에 한 번호만 죽 표기하는 학생, 지그재그로 표기하는 학생이 속출했다. 내신에 반영되지 않는 이 평가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평가를 희화화하는 나쁜 평가였던 셈이다. 그리하여 교사가 답안지를 이송하기 전에 먼저 OMR 카드를 확인하여 아무 것도 표기하지 않았거나 한 번호만 마킹한 것을 골라내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진다.

 

'시험에서 피평가자가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를 통해 얻은 결과의 왜곡을 암시한다. 이 같은 사례는 서울지역에서 내가 학교에 있을 때 경험한 사실들이다. 학생들 잘못이라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본질로부터 먼 평가를 강요해오고 있었는지, 이미 학생들은 왜곡된 평가 개념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가는 오로지 선발만을 위한 것으로 뇌리에 각인돼 있는 아이들에게 "이 평가는 전국적인 진단을 통해 교육을 개선하는 것이니 내신에 반영이 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시험에 임하세요."라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한편 또 다른 평가 왜곡의 시도가 있다. 이 평가를 앞두고 시도별 비교에 민감한 곳에선 아이들에게 시험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시험 준비는 왜 평가를 왜곡하는가. 이 평가의 속성 자체가 지금 그대로의 상태에서 현재 도달 정도를 '진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제유출이나 공모 등 부정행위가 있을 수 있다. 부정행위가 생기는 이유는 이 결과를 토대로 학교를 관리, 통제하려 들기 때문이다. 관리, 통제의 극단적 경우는 평가를 통하여 학교를 폐교하고 교사들을 해고하는 것으로 실제 미국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기초학력' 지원을 위한 전제들

 

위 부제에서 기초학력을 따옴표 처리한 것은 기초학력을 바라보는 상이한 관점들을 확인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 능력을 기초학력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한지에서 부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기초학력 미도달률 학생들에게 지원할 정확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자는 것이고, 그렇게 된 원인도 짚어보자는 것이다.

 

우선, 나는 전집이든 표집이든 이런 방식의 진단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유는 앞선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시험이 시험으로서 권위를 잃고 한껏 희화화돼 있는 상태에서 얻은 데이터로 처방을 모색한다는 것 자체가 과녁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학생들의 상태에 대한 진단은 필요가 없는 것일까. 진단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교사는 아무도 없다. 다만, 이 진단이 실질적이기 위해선 그 층위를 '교실'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이미 개발된 진단 프로그램은 많다.

 

문제는 진단이 놓치고 있는 점을 따져야 한다는 것인데, 특정 기준을 세우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려내는 진단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진단이 아니다. 그때 나올 처방이란 보충학습을 부과하여 그 기준까지 계량적으로 끌어올리는 것뿐이다. 무엇을 위한 진단인가, 진단으로 밝혀내야 할 것과 후속작업은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가 없는 진단은 결국 '기준 도달 여부' 점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쉽게 기초학력이라 부르는 것의 정확한 실체는 무엇이고,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어떻게 개념화할지에 대하여는 앞서 기초학력, 메타 프레임적 접근에서도 밝힌 바 있다. 간단히 말해 공부는 진리탐구와 인격함양, 그리고 삶의 방편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보통 전자를 내재적 목표, 후자를 외재적 목표라고 부른다. 이를 통합하면 '전인적 발달'이다. 공부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닌, 전인적 발달을 위한 수단이자 과정이다.

 

이러한 전인적 발달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에 소위 학력과 역량이 있다. 물론 이미 아래서 언급한 역량의 세 요소 중에 인지역량에서 주요하게 지식획득을 다룬다. 이때의 지식이 하는 역할은, 그 자체로 사실적 습득을 위한 것과 보다 넓고 깊은 지식을 탐구하기 위한 기본인지역량이 있다. 즉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며, 다른 지식과 연결하고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 이것을 다른 말로 문해력(literacy)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능력은 아이들에게 기본적으로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기초학력의 대안적 개념이자, 프레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이다. 기초학력은 필연적으로 기준을 정하고 도달률을 체크하는 평가를 통해서 신장할 수 있다는 논리적 귀결을 가져온다.

 

문해력으로서 기본 인지역량을 형성하는 여러 요소가 있다. 기초학력 개념은 이 학생이 '학습이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방책은 학습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이 접근은 학생의 상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80년대 이후에는 학생의 성취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문화적 재생산', 즉 가정의 환경요인을 든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격차'이다. 요즘 유행하는 쉬운 말로 다시 하면 금수저, 흙수저이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요소 즉 문해력으로서 기본 인지역량, 그리고 격차해소의 방안으로서 접근이 내가 말하는 기초학력의 재개념화 방식이자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이다.

 

 

'기초학력' 지원을 위한 실질적 제언

 

앞선 글에서 기초학력을 문해력으로서 기본 인지역량으로 재정의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것을 규정하는 원인이 단순히 공부 부족이 아니라 이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가져왔던 '격차'에 있다고도 했다. 이글에서는 이 역량을 어떻게 신장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인지를 적는다.

 

서울에는 '3품 교육공동체'라는 용어가 있다. 여기서 3품은 가족품, 학교품, 마을품을 말한다. 이 개념은 학습이 복지와 분리되어서는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헛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제안하게 됐다. 이미 가정에서부터 회복 불가능한 격차를 가지고 온 학생에게 "지금부터 네가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여 거짓말이다. 이는 학습격차 문제의 근원적 해결점이 어디에 있고, 어떤 접근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살피는 진지한 고민을 막는다.

 

정책은, 한 아이(each one)의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 전체의 평균적 상태를 보고 지원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기껏해야 평균적 수치를 얼마간 올리는 것에 불과할 뿐 한 아이가 가친 격차를 실질적으로 해소할 수 없다. 15년 전부터 시작한 교육복지는 이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할 때가 됐다. 각 학생의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정책이 어떻게 협업하고 통합해야 하는지를 모색해야 한다.

 

한 아이의 성장에 집중한다는 개념이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관련 부처가 제각각 성실하게 지원하는 것이 현재 상태다. 이를 테면 교육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등은 서로 간의 협업과 정보 공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각자 정책을 쏟아낸다.

 

학교에서 적용중인 다중지원팀은 북유럽 모델을 일부 차용한 아이디어다. 한 학생을 지원할 때 학습 결손만으로 접근하지 말고 아이의 정서 심리 상태를 비롯한 여러 부분을 함께 통합지원하자는 취지에서 운영한다. 이 정책을 '실질화'하고 예산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다중지원팀의 둘레에 가족, 학교, 마을이 있다. '한 아이의 성장을 위한 통합적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이다.

 

기초학력 미도달률을 수치적으로 낮춘다고 한 학생의 실제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 배움이 더딘 학생의 경우 순수한 의미에서 공부가 싫어 성취가 낮아지는 경우보다 이미 가정에서부터 대물림된 격차가 더욱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때 정책의 한 축은 명확하게 가족지원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이 문제는 복지의 영역이자 교육의 영역이므로 양 영역 간의 협업적 운영 방식이 필수적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교육과정이 요구하는 성취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들이 수학을 특히 못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교과의 난이도가 특별이 높은 것이 미도달자를 양산하는 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만들어 놓고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네 탓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하다.

 

내 제안은 '문해력으로서 기본 인지역량'으로 기초학력을 재개념화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가정과 학교와 마을이 한 아이의 성장에 집중하는 통합적 지원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울러 격차해소를 학습복지의 관점에서 접근하되, 가정을 문제해결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교 차원에서 운영하는 다중지원팀의 실질적 운영을 위한 충분한 예산확보와 구성원의 전문성 신장 등을 위한 지원도 절실하다. 이런 근원적 접근을 도외시하고 평균적 미도달률을 개선하자는 시도는 철학부재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실익도 없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메타프레임이란 용어를 쓰게 된 까닭은 '기초학력'이라는 개념이 교육적 해결을 모색하는 것을 넘어 정치공방의 소재로 쓰이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학력 내지는 기초학력을 바라보는 상이한 관점은, 한편에서는 일제고사 반대투쟁, 다른 한편에서는 혁신교육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논리, 진영논리를 모두 넘어서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고민할 필요가 생긴다.

프레임은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안에 대하여 서로 설정하는 프레임이 다를 때, 소모적 갈등이 일어난다. 진정한 문제의 해결은 이 갈등을 넘어서는 데서 시작한다. '메타프레임(meta-frame)'은 각 주장이 근거로 하는 프레임을 넘어 그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건설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상이한 프레임을 넘어서는 포괄적 프레임'이라는 의미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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