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 암흑시대 지성인 눈·귀 연 촌철살인, 리영희
=[실록 민주화 운동]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1970~80년대 학생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수많은 책 중에서 단연 으뜸은 현 한양대 명예교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다.
리영희의 저서 10여권 가운데 첫 번째 평론집인 이 책은 74년 6월5일 초판이 발행되어 78년까지 9쇄가 나왔지만, 이후 당국으로부터 불온서적으로 지목되어 시중 서점에서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이 책은 대학가 서점에서 판매대 밑에 은밀히 감춰놓고 팔 만큼 당시 대학가 최고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80년대 초반에는 구입하기가 어려워 가격이 1,900원이던 것이 헌책방에서 1만원가량에 거래되기도 하였다. 특히 학생운동 선배들은 후배들이 대학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도록 권했고, 이를 읽고 난 후배들은 여지없이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전논’이란 줄임말로 은밀히 불리던 이 책이 당시 학생들에게 그토록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전논’은 대학 신입생들에게 실로 ‘새로운 하늘과 땅’이었다. 당시 교과서가 강요한 대로 맹목적 충성심과 일률적 가치관으로 현실을 바라보던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이 책은 일시에 새롭게 열어주었다.
리영희는 ‘창작과비평사’의 사회과학 신서 제4권으로 출간된 ‘전논’ 머리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이 교회권력과 신학 도그마 때문에 ‘사실’로서가 아니라 ‘가설’이라는 전제 하에 출판된 것에 비유하여, ‘정치적 신학’의 도그마가 지배하는 그날까지 가설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할 것임을 밝힌다. 70년대 초반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정경연구’ ‘창조’ ‘다리’ 등의 월간지에 실었던 글을 한데 묶어낸, 지극히 평범한 형식의 이 평론집은 그러나 예측과 달리 가설의 전제를 일찌감치 벗어던져 버린다.
‘죽의 장막’ 중국 본토 사회의 실제 모습, 장제스(蔣介石) 시대의 중국, 일본의 재등장, 베트남전쟁의 진실 등은 리영희의 해설을 통하여 젊은 감수성을 사로잡았다.
군사정권의 관제교육이 심어놓은 상식과 가치들은 여지없이 부정되었다. 종신 집권체제인 유신의 허구성과 강력한 국가주의 망령을 직시하는 것은 그들에게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와 강렬한 빛을 보게 될 때의 눈부심과 전율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개안과 충격은, 그러나 밀실에 고립된 개인에게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이 머무는 드넓은 광장의 집단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프랑스 신문 르 몽드가 매우 적절히 명명했듯, 리영희는 ‘한국 젊은이들의 사상의 은사’로 자리했다. 77년 ‘전논’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우상과 이성’이 출간되면서 그의 붓은 더이상 가설의 논리가 아닌 ‘우상에게 도전하는 이성’의 힘으로 성장한다. 이미 ‘전논’을 통해 눈을 뜬 사람들은 그동안 진실을 가렸던 우상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고, 이에 대항하는 힘으로서의 자양분을 그의 책에서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 가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 그러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우상과 이성’ 머리글에서)
리영희는 자신의 예언대로, ‘우상과 이성’이 출간되자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2년 만기의 징역을 살게 된다. 그의 글쓰는 행위는 ‘이성의 몸부림이었으나 우상들에게는 도전 행위였으며, 따라서 우상의 노여움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리영희는 1964년 조선일보의 외무부 출입기자 시절,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안건을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에서 검토 중”이란 기사를 썼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적이 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80년대 중반까지 모두 아홉 번 체포되고, 다섯 번 감옥에 갔으며, 언론계와 교수직에서 각각 두 번씩 쫓겨났다. 진실을 추구한 대가는 이처럼 혹독한 것이었다.
그의 신념은 일찍이 청년시절부터 싹텄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3세 때인 1951년, 군의 초급장교로 근무하며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직접 목격한다.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진실된 가치를 밝혀내 진실 이외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충성을 거부하려는 종교 같은 신념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자전 에세이 ‘역정’에서)
그의 글은 학생들뿐 아니라 군부독재의 하수인역을 기꺼이 담당했던 공안검사들도 열심히 탐독해야 했다. 대학가의 시위현장에서 붙잡힌 학생들을 조사하면서 그들 대부분이 ‘전논’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하자 이에 놀란 검찰 관계자들은 ‘전논’을 읽지 않고는 정확한 수사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단체로 책을 구입하여 탐독했던 것이다.
리영희는 오로지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율적인 인간의 창조를 위해서, 당시 사회를 지배한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한 저항적 입장에서, 군인통치의 야만성과 반지성을 고발하기 위해서, 시대정신과 반제·반식민지·제3세계 등에 대한 폭넓고 공정한 이해를 위해서, 남북 민족간의 증오심을 조장하는 사회현실에 반발하면서 두 체제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고 또 썼다. 관변 지식인들이 유신에 협조하고 아부할 때, 또는 많은 교수들이 자책과 번뇌에 시달리되 행동에 나서지 못하면서 ‘겨울공화국’ 벌판의 암울한 침묵 속에 빠져 있을 때 리영희의 메시지는 선지자의 외침처럼 울려퍼졌다.
진실의 세례를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기꺼이 감옥으로 행진해 갔다. 스스로 죽은 이도 많으며 국가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도 참 많았다. 이에 대해 리영희는 자주 공·사석에서 자신의 고뇌를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70년대 초부터 ‘전논’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등의 책을 통해서 지적·사상적 영향을 받은 후배, 후학 독자들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독재·자유·인권·통일운동의 긴 세월 어느 단계에서인가 제적되고, 고문당하고, 쫓기고, 투옥되고, 불구자가 되고, 죽임을 당한 분들과 그 가족들과 영혼에 대해서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일정한 도의적·인간적 빚을 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 산다”
구차하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자책, 지식인으로서의 리영희의 염결성(廉潔性)은 오래도록 그를 얽어매었다. ‘전논’ 이후 ‘8억인과의 대화’(77), ‘분단을 넘어서’(84), ‘베트남 전쟁’(85), ‘역설의 변증’(87), ‘自由人 자유인’(90),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94) 등의 저술활동에 전념하는 20여년동안 리영희의 화두는 진실의 추구, 이성적 인간과 사회로부터 단 한번도 비껴나 있지 않았다.
90년대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잠시나마 ‘지식인 집단의 환경 예측능력 상실시대’를 맞이했을 때도 그는 오직 “진실은 균형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인식될 수 있음”을 설파했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와 우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다.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머리글에서)
리영희는 1929년, 김소월이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산을 넘는 육천리’로 노래한 평북 삭주에서 궁벽한 산골 소년으로 자라나 식민지의 중학 시절을 늘 배고픈 공부벌레로 성장했다. 광신적 반공주의가 이성을 잠재운 시기 동안에 그의 붓은 치열하게 이성이 눈뜨는 새벽을 기다리며 투쟁했다. 그러다가 냉전의 철옹성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 95년에 발병하여 병마와 싸우다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왼손이 다소 부자유할 뿐 그의 정신은 아직 겨울 소나무처럼 시퍼렇다.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던 날, 그는 한시를 지어 친지 몇 사람에게 팩스로 발송했다.
“否氏狂亂不知其終(부시의 광란이 끝을 알 수 없으니)
人類自尊卽面危亂(인류자존이 위란에 직면했도다)
錦繡疆土將變火海(금수강토가 장차 불바다로 변할지니)
韓民當呼反戰平和(한민족은 마땅히 반전평화 외쳐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이처럼 리영희는 평화주의자이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 기자)
리영희는 누구인가
=[실록 민주화 운동]학연·지연 벽넘어 국제문제 전문가로=
이북 출신에다 내노라하는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요, 박사학위를 가진 것도 아닌 리영희의 이력은 학연과 지연의 혜택을 애초부터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리영희 특유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강조가 더욱 강화됐을지 모른다.
리영희의 공식적인 학교교육은 1950년 국립한국해양대학 졸업으로 끝난다. 그마저 전쟁통에 학교와 연락이 두절되어 학사학위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자신의 저서가 문제될 때마다 공안검사들로부터 “해양대학에다, 그것도 항해과 출신이 무슨 국제정치를 논하느냐”는 조롱을 수없이 받았다. 이에 대해 리영희는 82년 쓴 에세이에서 “학위라는 ‘후광’이 없는 나의 처지가 몹시 힘에 겹다”고 고백한 적도 있지만 성실과 정열을 무기로 헤쳐나갔다.
리영희의 성실성과 꼼꼼함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통역장교로 입대해 7년동안 근무한 리영희는 전장을 돌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익혔다. 제대 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근무하던 30대 초반에는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통신원으로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고 한국의 정치상황을 분석한 논평을 투고해 여러차례 기명으로 실리기도 했다.
오랜 외신기자 생활은 리영희로 하여금 한국사회를 압도한 반공주의의 도그마에서 빠져나와 국제정세 전문가의 길을 걷게 했다. 특히 71년 위수령에 반대하는 ‘지식인 선언’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15년간의 언론인 생활을 마감한 뒤로는 한양대에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중국정치를 연구했다. 역시 독학으로 중국어를 익혔음은 물론이다.
일반인의 공산권 관련자료 접근이 통제되던 시절, 리영희는 기자로서, 교수로서 정부기관의 중국(중공) 및 북한 관련 자료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당시 그 자료실의 어떤 자료를 뽑아도 열람 카드에 리영희의 이름이 빠진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희를 넘긴 리영희는 몸이 불편한 요즘에도 신문의 국제면은 빼놓지 않고 읽고 있으며 평생 해오던 대로 중요 기사는 스크랩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종합기획부(02-3701-1156~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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