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는 오랫동안 국내에 낭만주의 시인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로렐라이>와 같은 낭만적 시의 이미지에 싸여 있던 그는 작고한 시인 김남주에 의해 혁명가적 정신이 소개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이네 전공 학자 정용환 상명대 교수가 번역한 <낭만파>는 하이네의 현실참여적·사회비판적 면모를 확인시켜주는 그의 대표적인 산문이다.
현실참여·비판시인 하이네
진면목 보여주는 산문들
낭만파·복고정치 동맹 폭로
괴테'자연'을 '역사'로 대체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하이네는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강했던 독일 사회에 적응하려고 꽤나 노력했다. 하지만,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개신교로 개종하기도 했던 그는 변호사나 교수 같은 바라던 직업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에 이미 정치적으로 급진적이었던 그는 독일의 보수적 지배세력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1831년 그는 망명하듯 독일을 떠나 파리로 갔다. 7월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파리는 ‘혁명의 예루살렘’이었다. <낭만파>는 1833년 프랑스 사람들에게 독일 문화의 진실을 알리려고 쓴 책이다.
책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낭만파>는 독일 낭만주의 문학을 호의적으로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풍자적으로 비판하는 책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평론가 스탈 부인이 쓴 <독일론>이 대유행이었고, 독일 문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생각을 규정하고 있었다. 스탈 부인은 그의 책에서 독일 관념철학과 낭만주의 문학을 ‘독일적 본질의 정화’라고 말하면서, 독일 문학이 정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이네의 <낭만파>는 스탈 부인의 이 견해를 겨냥한 것이었다. 하이네는 이 책에서 독일 낭만주의와 복고정치 사이의 동맹관계를 폭로한다. 초점은 후기낭만주의에 맞추어져 있다. 독일의 낭만주의는 초기에 사해동포주의·공화주의·자유주의와 같은 진보적 이념을 품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에 대항하는 전쟁이 계기가 돼 급속히 반동화했으며, 중세의 신분제적 기독교국가를 모범으로 삼는 국수주의적 경향을 강화한다. 하이네가 비판으로
삼은 것은 이 후기의 ‘정치적 낭만주의’였다.
하이네는 이 후기낭만주의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대학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낭만주의 운동의 핵심인물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을 비판의 표적으로 삼는다. 그는 위험할 정도의 풍자적 언어를 구사해 슐레겔의 학문적·비평적 작업이 지나치게 과거지향적이며 사상내용도 형편없다고 공격한다. 나아가 “북아메리카의 야만족이 사는 숲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서도 아버지가 늙고 쇠약해지면 아들에게 맞아죽는 법”이라고 하며 자신의 문학적 부친살해를 정당화한다.
그의 신랄한 언어의 화살은 독일 낭만주의의 최고봉인 괴테도 피해가지 않는다. 그는 괴테의 문학이 그 예술적 표현에서 완벽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담긴 사상의 알맹이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리스 신화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만든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인 조각상이 아이를 낳지 못했듯이 괴테의 작품도 ‘행동’을 낳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괴테의 아름다운 말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 그것이 단순히 예술만을 통해서 생겨난 모든 것에 내려진 저주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외쳤으면서도, 결국 행동 없는 예술로 귀결된 까닭을 그는 괴테의 ‘자연범신론’에서 찾았다. 신이 만물에 보편적으로 내재한다는 괴테의 범신론은 ‘예술의 자율성’을 보증해주는데, 하이네는 여기에 맞서 ‘역사범신론’, 다시 말해 신이 역사에 내재한다는 생각을 내세운다. “신은 괴테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만물에 똑같이 현현하지 않는다. …신은 운동·행동·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의 신성한 입김은 역사의 책장을 통해서 분다. 신의 진정한 책은 바로 역사다.” 역사의 진보를 믿고 그 진보에 참여하는 것을 예술가·지식인의 사명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이네의 <낭만파>는 후기낭만주의를 극복하려는 동시대 독일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특히 막 자라나던 청년헤겔파의 비평활동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옮긴이는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