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의 지위를 다시 생각함
1990년에 쓴 글을 들춰보다가 당시 교육현실을 분석하면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으로 1) 비민주적 교육행정, 2) 교육내용의 국가독점, 3) 열악한 교육환경, 4) 교원의 사회, 경제적 지위, 5) 유린당하는 교육주체의 권리를 꼽았던 것을 발견했다. 문득 슬픔이 몰려왔다. 글을 쓰고 25년이나 지난 지금 위 다섯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진전된 것이 없구나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교육행정은 더욱 정교하고 촘촘하게 교사와 학생을 '전자적으로' 관리하고 있고, 그때보다 훨씬 가시적 성과를 요구하고 있으며 개별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관료주의는 더 심화되었다. 교육환경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아이들의 변화가 더 빨라서 학급당 학생 수가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는 불편하다. 교원의 경제적 지위는 다소 상승했지만, 사회적 지위는 땅에 떨어져 그 권위가 예전만 못하다. 한국의 학생, 학부모가 교사를 존경하지 않지만 직업으로서 교사는 희망한다는 GEMS의 진단은 교사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 중에도 교육내용의 국가독점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역사 교과서 파동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교육내용을 독점하고 싶은 욕구는 참으로 끈질기구나 하는 것이다. '국정' 교과서 부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그들에게 이 문제는 자못 처절하기까지 하다. 국정이든 검인정이든 국가에서 교육내용을 독점하려 드는 경우, 교과서는 아래와 같이 기술된다. 아래는 25년 전 이글을 쓰면서 교과서를 보고 인용한 내용들이다.
"국가안보를 위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일시적으로 자제하는 아량과 슬기가 필요하다."(고교 사회 1)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모든 비능률, 모순, 비리를 척결하며 국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민주목지국가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의 장래를 밝게 빛날 것이다."(고교 국사 하)
"열대기후 지역은 ... 밀림 때문에 개발이 늦어지고 있으며, 문명 정도가 낮은 종족들이 남아 있다. 백인들이 진출한 이후 고무, 카카오 등을 재배하는 농업이 발달하였다."(중학교 사회)
"작업 중에 일어나는 사고는 대부분 사람의 정신이 해이한 데에서 온다" (중학교 공업)
놀랍지 않은가? 다른 것은 그렇다치고 사회 교과서에 열대기후 지역을 철저하게 서양의 백인 중심 사고로 묘사했다는 사실 말이다. 백인이 진출하여 열대지역의 농업이 발달했다는 이 폭력적 기술은 곧 인종 문제를 바라보는 당시 교과 전문가들의 인식을 투영하고 있다. "작업 중에 일어나는 사고는 대부분 사람의 정신이 해이한 데에서 온다"는 기술은 또 어떤가? 성인이 되면 대부분 노동자가 될 아이들에게 자본가의 편에서 "이 다음에 취업하여 사고나면 그 책임은 너에게 있어."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지금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이지만 불과 25년 전의 일이다.
물론 그 이후 교과서 내용은 많이 바뀌었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민주화의 진전, OECD에 가입하면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에 대한 요구, 무엇보다 교과서 발행 체제가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국정으로 회귀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위의 교과서 기술에서 보듯, 교육내용을 국가에서 독점하려 들면 국민은 대단히 불행해진다.
내가 교과서 파동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있다. 사실 교과서가 검인정이냐 국정이냐 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교육과정의 역사이다. 지금쯤이면 적어도 검인정을 유지할 것이냐, 자유발행제를 검토할 것이냐 정도가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교육학자, 교과전문가, 교사들은 이 문제를 담론으로 밀어 올려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 교과서와 교육과정의 관계는 무엇이고, 교과서에 나온 내용은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것인지 등 교과서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논의가 이미 시작되었어야 한다.
교과서 파동이 격화된 것도 따지고 보면 좌우를 막론하고 '교과서의 절대적 지위'를 신봉하는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암기주입식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이 관행화된 나라에서는 교과서에 담긴 지식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시험의 자원'이다. 모든 것이 왜곡되다 보니, 교과서 문제 하나도 달랑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토론하는 세태를 불러왔다.
당연히 교학사 교과서는 교재로서 부적절하다. 그러나 적어도 우린 지식이란 무엇인지? 지식은 꼭 교과서 속에 담겨야 하는지, 교과서는 교사와 학생을 매개하는 가장 훌륭한 학습자원인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방법은 교과서 밖에 없는 것인지 등등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1990년에 쓴 글을 들춰보다가 당시 교육현실을 분석하면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으로 1) 비민주적 교육행정, 2) 교육내용의 국가독점, 3) 열악한 교육환경, 4) 교원의 사회, 경제적 지위, 5) 유린당하는 교육주체의 권리를 꼽았던 것을 발견했다. 문득 슬픔이 몰려왔다. 글을 쓰고 25년이나 지난 지금 위 다섯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진전된 것이 없구나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교육행정은 더욱 정교하고 촘촘하게 교사와 학생을 '전자적으로' 관리하고 있고, 그때보다 훨씬 가시적 성과를 요구하고 있으며 개별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관료주의는 더 심화되었다. 교육환경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아이들의 변화가 더 빨라서 학급당 학생 수가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는 불편하다. 교원의 경제적 지위는 다소 상승했지만, 사회적 지위는 땅에 떨어져 그 권위가 예전만 못하다. 한국의 학생, 학부모가 교사를 존경하지 않지만 직업으로서 교사는 희망한다는 GEMS의 진단은 교사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 중에도 교육내용의 국가독점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역사 교과서 파동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교육내용을 독점하고 싶은 욕구는 참으로 끈질기구나 하는 것이다. '국정' 교과서 부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그들에게 이 문제는 자못 처절하기까지 하다. 국정이든 검인정이든 국가에서 교육내용을 독점하려 드는 경우, 교과서는 아래와 같이 기술된다. 아래는 25년 전 이글을 쓰면서 교과서를 보고 인용한 내용들이다.
"국가안보를 위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일시적으로 자제하는 아량과 슬기가 필요하다."(고교 사회 1)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모든 비능률, 모순, 비리를 척결하며 국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민주목지국가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의 장래를 밝게 빛날 것이다."(고교 국사 하)
"열대기후 지역은 ... 밀림 때문에 개발이 늦어지고 있으며, 문명 정도가 낮은 종족들이 남아 있다. 백인들이 진출한 이후 고무, 카카오 등을 재배하는 농업이 발달하였다."(중학교 사회)
"작업 중에 일어나는 사고는 대부분 사람의 정신이 해이한 데에서 온다" (중학교 공업)
놀랍지 않은가? 다른 것은 그렇다치고 사회 교과서에 열대기후 지역을 철저하게 서양의 백인 중심 사고로 묘사했다는 사실 말이다. 백인이 진출하여 열대지역의 농업이 발달했다는 이 폭력적 기술은 곧 인종 문제를 바라보는 당시 교과 전문가들의 인식을 투영하고 있다. "작업 중에 일어나는 사고는 대부분 사람의 정신이 해이한 데에서 온다"는 기술은 또 어떤가? 성인이 되면 대부분 노동자가 될 아이들에게 자본가의 편에서 "이 다음에 취업하여 사고나면 그 책임은 너에게 있어."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지금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이지만 불과 25년 전의 일이다.
물론 그 이후 교과서 내용은 많이 바뀌었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민주화의 진전, OECD에 가입하면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에 대한 요구, 무엇보다 교과서 발행 체제가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국정으로 회귀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위의 교과서 기술에서 보듯, 교육내용을 국가에서 독점하려 들면 국민은 대단히 불행해진다.
내가 교과서 파동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있다. 사실 교과서가 검인정이냐 국정이냐 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교육과정의 역사이다. 지금쯤이면 적어도 검인정을 유지할 것이냐, 자유발행제를 검토할 것이냐 정도가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교육학자, 교과전문가, 교사들은 이 문제를 담론으로 밀어 올려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 교과서와 교육과정의 관계는 무엇이고, 교과서에 나온 내용은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것인지 등 교과서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논의가 이미 시작되었어야 한다.
교과서 파동이 격화된 것도 따지고 보면 좌우를 막론하고 '교과서의 절대적 지위'를 신봉하는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암기주입식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이 관행화된 나라에서는 교과서에 담긴 지식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시험의 자원'이다. 모든 것이 왜곡되다 보니, 교과서 문제 하나도 달랑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토론하는 세태를 불러왔다.
당연히 교학사 교과서는 교재로서 부적절하다. 그러나 적어도 우린 지식이란 무엇인지? 지식은 꼭 교과서 속에 담겨야 하는지, 교과서는 교사와 학생을 매개하는 가장 훌륭한 학습자원인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방법은 교과서 밖에 없는 것인지 등등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